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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36 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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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민심언 |
한글표제 | 민심언 |
한자표제 | 閔審言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태조~세종 |
집필자 | 이기순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사망 | 1452년(단종즉위) |
본관 | 여흥(驪興) |
묘소소재지 | 경기도 통진(通津) 봉상리(鳳翔里) 위곡(渭曲) |
증조부 | 민적(閔頔) |
조부 | 민유(閔愉) |
부 | 민지생(閔智生) |
처_장인 | (부인)송씨(宋氏): 송전(宋琠)의 딸 (첩)장씨(張氏) (첩)최씨(崔氏) |
자녀 | (1자)민징원(閔澄源) (2자)민충원(閔沖源) (3자)민준원(閔浚源) (4자)민담원(閔澹源) (1녀)김치기(金恥其)의 처 (2녀)이처공(李處恭)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민심언(閔審言) |
총론
[ ?~1452년(단종즉위) = 90여 세]. 조선 초기 태조~세종 때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고려 전농시(典農寺) 소윤(少尹)민지생(閔智生)이다. 예조(禮曹) 전서(典書)민경생(閔慶生)의 조카이고, 태종의 국구(國舅) 민제(閔霽)의 5촌 조카이다.
태조~태종 시대 활동
이성계(李成桂) 일파가 조선을 건국할 때 그 집안이 이성계의 지지 세력이었으므로, 고려 왕조에 이어 조선 왕조에서도 그대로 벼슬하였다. 1396년(태조5) 그가 봉상시(奉常寺) 협률랑(協律郞)으로 있었을 때, 조선의 개국공신 정희계(鄭熙啓)의 시호(諡號)를 잘못 정하여, 태조가 시호를 정한 봉상시 박사(博士)최견(崔蠲)을 비롯하여 봉상시 관원을 모두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국문한 뒤에 모두 파직하였다. 1404년(태종4)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가, 그 뒤에 호조 정랑이 되었다. 1408년(태종8) 그가 호조 정랑으로 있을 때 호조 좌랑장안지(張安之)의 부정이 발각되었다. 장안지는 군자감(軍資監)에 속해있던 양전(良田)을 자기 친한 사람의 척박한 전지(田地)와 맞바꾸어 주었으며, 또 백성들의 양전(良田)을 빼앗아 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그도 이에 연루되어 하옥되고 심문 당한 다음 파직되었다. 1409년(태종9) 대간(臺諫)에서 민무구(閔無咎) · 민무질(閔無疾) 형제가 누이 원경왕후(元敬王后)를 믿고 횡포를 부린다고 탄핵하여 그들을 제주도에 유배시켰는데, 그는 당시 사헌부 장령(掌令)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6촌 형제들을 탄핵하는 데 참여하였다. 그의 6촌 민무구 형제는 태종의 미움을 사서 끝내 죽음을 당하였는데, 이렇듯 그는 왕실과의 인척 관계 때문에 은혜도 입고 수난도 겪었다.
세종 시대 활동
1423년(세종5) 첨총제(僉摠制)가 되어 세종의 명령을 받고 두만강 유역의 아목하(阿木河: 회령) 등지에 사는 오도리족과 오랑캐족의 대소 추장을 선위(宣慰)하였다. 그 뒤에 광주목사(廣州牧使)에 임명되었는데, 1425년(세종7) 세종이 광주(廣州) 지방에서 강무(講武)할 때 나가서 임금 일행을 마중하였으므로, 세종이 사냥한 짐승을 내려주었다. 잇달아 수원부사(水原府使)가 되었다가, 1428년(세종10) 돈녕부(敦寧府)첨지사(僉知事)에 임명되었고, 돈녕부 동지사(同知事)로 승진하였다. 그때 진하사(進賀使)의 부사(副使)로 임명되어, 정사(正使)대제학유사눌(柳思訥)과 함께 표전문(表箋文)을 받들고 중국 명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1429년(세종11) 함길도관찰사에 임명되어 함흥부윤(咸興府尹)을 겸임하였다. 이때 중국에 공헌(貢獻)할 해동청(海東靑)을 잡아서 바치자, 세종이 민심언에게 표리(表裏) 1벌을 하사하였다. 1430년(세종12) 민심언이 관찰사로 있을 적에, 세종이 조세(租稅) 제도를 개혁하기 위하여 새로 공법(貢法)을 만들고 이에 대하여 수령과 품관(品官) · 촌민(村民)에게 찬반(贊反)을 묻는 여론 조사를 실사하였다. 전국 8도에서 찬성이 98,657명이고, 반대가 74,149명이었는데, 함길도에서는 75명은 찬성, 민심언과 수령 14명, 그리고 품관 · 촌민 등 7천 3백 87명은 반대하였다.
1430년(세종12) 영흥부(永興府)의 군기고(軍器庫)에서 불이 났는데, 관찰사민심언이 불을 지른 자들을 체포하여 국문하면서 마음대로 압슬형(壓膝刑)과 장형(杖刑)을 실시하여 자백을 받아내던 중, 사람이 죽었다. 이 사실을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다가 발각이 되어 세종이 관찰사와 도사(都事), 영흥부사(永興府使) 등을 모두 체포하여 의금부에 넘기도록 하였다. 심문한 결과 관찰사민심언은 직첩을 회수 당하고, 여주의 정료간(庭燎干)이 되었다가 1433년(세종15) 직첩을 돌려 받았다. 1434년(세종16) 전라도도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이듬해 전라도에 견아상입(犬牙相入)한 비지(比地)를 정리하여, 용안현(龍安縣)을 함열현(咸悅縣)에 합치고, 고창현(高敞縣) · 흥덕현(興德縣)을 하나로 합치고, 창평현(昌平縣)을 담양부(潭陽府)에 합치고, 화순현(和順縣)을 능성현(綾城縣)에 합쳤다. 1435년(세종17) 중추원 부사에 임명되었다가 호조 참판이 되었고, 1436년(세종18)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실수를 범하여 파직되었다. 1441년(세종23) 유효통(兪孝通)과 함께 고신(告身)을 돌려받고, 다시 벼슬에 기용되었다.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로 나갔다가, 1452년(단종즉위) 12월 7일 노병으로 죽었는데, 향년이 90여 세였다고 한다. 그가 죽은 지 8년 뒤에 1460년(세조6) 세조는 그를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기록하라고 하여,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를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만들었다.
왕실과의 관계
고려 말엽에 이성계 일파는 혼인을 통하여 고려의 명문 집안과 혈연관계를 맺어서 그 지지 세력을 넓혀갔다. 민심언의 백부 민경생(閔慶生)은 고려말 우정승이정(李挺)의 둘째 사위였는데, 이정의 맏아들 이거이(李居易)는 태조이성계를 도와서 조선을 세운 원종공신(原從功臣)의 한 사람이었다. 우정승이정은 고려 말엽에 청주이씨(淸州李氏)의 중심인물이었다. 게다가 이거이의 맏아들 이저(李佇)가 태조이성계의 맏딸 경신공주(慶愼公主)와 혼인하면서, 청주이씨는 이성계의 지지 세력이 되었다. 또 민심언의 고조부 충순공(忠順公)민종유(閔宗儒)는 고려 첨의(僉議)찬성사(贊成事)를 지냈고, 증조부 문순공(文順公)민적(閔頔)은 밀직사(密直司) 대제학(大提學)을 지내면서, 여흥민씨(驪興閔氏)는 고려 말엽에 명문 집안으로 자리잡았다. 민적의 아들 3형제 중에서 둘째 아들 민유(閔愉)도 밀직사 대제학을 지냈는데, 바로 민심언의 조부였고, 셋째 아들 여흥군(驪興君)민변(閔忭)은 좌정승민제(閔霽)의 아버지였다. 민제의 둘째 딸이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李芳遠)과 혼인하여, 뒤에 원경왕후(元敬王后)가 되었다. 그러므로 민심언과 원경왕후는 6촌간이었다. 또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 사이에 태어난 맏딸 정순공주(貞順公主)는 이거이 아들 이백강(李伯剛)과 혼인하였다. 형 이저는 태조이성계의 맏사위가 되고, 동생 이백강은 태종이방원의 맏사위가 되었다. 고려 말엽에 이성계 일파는 혼인 정책을 통하여 명문 집안 여흥민씨(驪興閔氏)와 청주이씨(淸州李氏) 등을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여서, 이를 바탕으로 1392년 조선 왕조를 창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집안 배경으로 말미암아 고려가 망할 때 민심언은 고려 왕조에 충성하지 못하고 조선 왕조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민심언의 9대손 민시중(閔蓍重) · 민정중(閔鼎重) · 민유중(閔維重) 3형제의 부탁으로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표(墓表)를 보면, “세조가 왕위에 오르게 되자, 영명한 임금을 섬겨 공명을 이루려는 인사들이 천년 만에 한번 만나는 기회라고 경사스럽게 여겼으나, 그때 여흥민심언 같은 분은 개성부 유수의 벼슬을 버리고, 그 몸을 배에 싣고서 서강(西江)을 뒤로 한 채 통진(通津)의 봉상리(鳳翔里)로 돌아갔다. 조정에서 그를 당세의 명현(名賢)이라고 하여 특별히 형조 참판으로 불렀지만, 절의를 지키고 부임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록을 보면, 민심언은 세조가 등극하기 전인 1452년(단종즉위) 12월에 이미 졸(卒)하였으며, 또 1436년(세종18) 6월 세종 때 이미 형조 참판을 지냈다. 우암송시열은 그가 죽을 때 절의를 지킨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한편 『단종실록(端宗實錄)』「졸기」에는 그가 “성질이 인색하여, 화식(貨殖)만을 오로지 일삼았다.”라고 평하여, 왕실과 인척 관계에 있던 민심언에 대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통진(通津) 봉상리(鳳翔里) 서쪽 위곡(渭曲)에 있는데, 송시열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 부인 송씨(宋氏)는 송전(宋琠)의 딸인데, 백세 장수하였다. 자녀는 모두 4남을 두었는데, 차자 민충원(閔沖源)은 사헌부 집의(執義)를 지냈다. 차자 계통이 번성하여, 민충원의 아들 민수(閔粹)는 생원시에 장원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을 지냈으며 그 증손자 민제인(閔齊仁)은 문과에 급제하여 찬성(贊成)을 지냈다. 그리고 민심언의 8, 9대손 때에 여흥 민씨는 가장 번창한 시기를 맞이하였고, 10대손인 민유중의 딸은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송자대전(宋子大全)』
- 『동각잡기(東閣雜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지퇴당집(知退堂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