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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36 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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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박황 |
한글표제 | 박황 |
한자표제 | 朴潢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인조 |
집필자 | 박은화 |
자 | 덕우(德雨) |
호 | 나헌(懦軒), 나옹(懦翁)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97년(선조 30) |
사망 | 1648년(인조 26) 5월 19일 |
본관 | 반남(潘南)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양주(楊州) 금촌(金村) |
증조부 | 박소(朴紹) |
조부 | (양조부)박응순(朴應順) (생조부)박응복(朴應福) |
부 | (양부)박동언(朴東彦) (생부)박동열(朴東說) |
모_외조 | (양모)광주정씨(光州鄭氏): 정엄(鄭淹)의 딸 (생모)신씨(申氏): 신발(申潑)의 딸 |
처_장인 | 남양홍씨(南陽洪氏): 홍서봉(洪瑞鳳)의 딸 |
자녀 | (1자)박세상(朴世相) (2자)박세주(朴世柱) (3자)박세환(朴世桓) (4자)박세남(朴世楠) (서자)박세교(朴世校)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박황(朴潢) |
총론
[1597년(선조 30)~1648년(인조 26) = 52세]. 조선 중기 인조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이다. 자는 덕우(德雨)이고, 호는 나옹(懦翁)·나헌(懦軒)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관찰사(觀察使)박동열(朴東說)의 아들로 사복시(司僕寺)정(正)박동언(朴東彦)에게 입양되었다. 양모 광주정씨(光州鄭氏)는 정엄(鄭淹)의 딸이고, 생모 신씨(申氏)는 신발(申潑)의 딸이다. 영의정(領議政)홍서봉(洪瑞鳳)이 장인이다. 김장생(金長生)을 스승과 같이 성심으로 받들었다.
인조 시대 활동
1621년(광해군 13) 정시(庭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이듬해 친아버지 박동열(朴東說)이 세상을 떠났다. 상복(喪服)을 벗자 1623년(인조 1)에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 시강원(侍講院) 설서(說書)가 되었다. 1624년(인조 2) 11월에 홍문관(弘文館)정자(正字)가 되었으며, 홍문관 박사(博士)를 거쳐 1626년(인조 4)에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 1627년(인조 5) 1월에 성균관(成均館)직강(直講)으로 전라우도 순검어사(巡檢御史)가 되어 내려갔다가 돌아와 이 해 8월에 수찬(修撰)이 되었다. 1628년(인조 6)에 상(喪)을 당하였다. 상복(喪服)을 벗자 1630년(인조 8) 6월에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 그 뒤 생모 신씨(申氏)를 봉양하고자 영광현감(靈光縣監)으로 나갔다. 1632년(인조 10) 7월에 이조 좌랑(佐郞)이 되었고,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을 거쳐 1634년(인조 12)에 대사간(大司諫)이 되고, 이조 참의(參議)가 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던 해인 1636년(인조 14) 대사간이던 박황은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이듬해 청(淸)나라가 화의에 반대하는 척화신(斥和臣) 17인의 압송을 요구하자, 격분한 그는 “어찌 차마 한 시대의 명류(名類)들을 모두 호랑이의 입에다 넣을 수 있단 말인가? 한 두 사람만 보내고 버티자.”고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15인은 무사할 수 있었다. 그는 볼모로 가는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모시고 심양(瀋陽)에 갔다가 1638년(인조 16)에 돌아와 병조 참판(參判)이 되었고, 다음해에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그때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과 동계(桐溪)정온(鄭蘊) 등을 모함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이의 부당함을 주장하다가 사직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다시 대사간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또 다시 심양에 불려갔다가 돌아와서 대사간이 되었다.
1643년(인조 21) 도승지가 되었다가,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나갔다. 1644년(인조 22)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심기원(沈器遠)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김해(金海)로 유배되었다가 1645년(인조 23)에 풀려나 복관(復官)되어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병이 나 1648년(인조 26) 5월 19일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박황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도량이 원대하고 풍채가 수려하여 탁월하게 세속의 테두리를 벗어났으므로, 마치 군계일학(群鷄一鶴)과 같았다. 그가 근본으로 삼은 것은 효도와 사랑, 충성과 진실이었다. 그러므로 어버이를 섬길 때에 뜻을 어기지 않았고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을 때 집에서 보낸 편지가 도착하면 움켜쥐고 울먹였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감동하였다. 조정에 나가 벼슬할 때 마음가짐과 일을 처리하는 것이 뚜렷하여, 시비(是非)가 한번 결정되면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또 선행과 의리를 좋아하여 남의 곤궁한 것을 서둘러 도와주어 마치 목마를 때 물을 찾듯이 하였다. 일찍이 자신이 탄 말을 백금(百金)을 받고 팔았던 적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관청에 많은 빚을 지고 야위어 죽을 지경에 놓였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그 돈을 다 털어서 주었다. 그가 이처럼 베풀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도성에서 으뜸이었던 그 가문의 가산(家産)도 그의 당대에 이르러 심하게 기울어졌으나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고 한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금촌(金村) 선영 아래 있다. 비명(碑銘)은 송시열(宋時烈)이 지었다. 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는 영의정(領議政)홍서봉(洪瑞鳳)의 딸인데, 4남을 두었다. 1자는 박세상(朴世相)이고, 2자는 박세주(朴世柱)이며, 3자는 박세환(朴世桓)이고, 4자는 박세남(朴世楠)이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청음집(淸陰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응천일록(凝川日錄)』
- 『명재유고(明齋遺稿)』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미수기언(眉叟記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