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호원(朴好元)"의 두 판 사이의 차이
(XML 가져오기) |
(차이 없음)
|
2017년 12월 22일 (금) 01:36 판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박호원 |
한글표제 | 박호원 |
한자표제 | 朴好元 |
분야 | 인물 |
유형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중종~선조 |
집필자 | 박은화 |
자 | 선초(善初) |
호 | 송월당(松月堂)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27년(중종 22) |
사망 | 1584년(선조 17) |
본관 | 밀양(密陽) |
주거지 | 서울 |
증조부 | 박미(朴楣) |
조부 | 박광영(朴光榮) |
부 | 박이(朴苡) |
모_외조 | 장수 황씨(長水黃氏):황맹헌(黃孟獻)의 딸 |
형제 | (형)박충원(朴忠元) |
처_장인 | 광산 김씨(光山金氏):김명윤(金明胤)의 딸 →(자녀)1남 |
자녀 | (자)박정현(朴鼎賢)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박호원(朴好元) |
총론
[1527년(중종 22)~1584년(선조 17) =58세]. 조선 중기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과 호조 판서(判書) 등을 지냈다. 자는 선초(善初)이고, 호는 송월당(松月堂)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남평현감(南平縣監)박이(朴苡)이고, 어머니 장수 황씨(長水黃氏)는 황맹헌(黃孟獻)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형조 참판(參判)을 지낸 박광영(朴光榮)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조 좌랑(佐郞)을 지낸 박미(朴楣)이다.
명종~ 선조 시대 활동
박호원(朴好元)은 1552년(명종 7)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555년(명종 10) 8월 함경남도평사(咸鏡南道評事)가 되었다.[『명종실록(明宗實錄)』명종 10년 8월 30일] 1557년(명종 12) 10월 홍문관(弘文館)부수찬(副修撰)이 되었고, 1558년(명종 13) 2월 홍문관 수찬(修撰)을 거쳐, 그 해 4월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명종실록』명종 12년 10월 6일, 명종 13년 2월 6일, 명종 13년 4월 18일] 이어 5월에는 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이 되었고, 6월에 다시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되었다가, 그 해 7월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고, 9월에는 용강현령(龍崗縣令)에 제수되었다.[『명종실록』명종 13년 5월 29일, 명종 13년 6월 3일, 명종 13년 7월 21일, 명종 13년 9월 21일] 1560년(명종 15) 8월 특명으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문학(文學)이 되었고, 그 다음 해인 1561년(명종 16) 7월 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이 되었으며, 8월에는 의정부 사인(舍人)이 되었다.[『명종실록』명종 15년 8월 30일, 명종 16년 7월 11일, 명종 16년 8월 20일]
1562년(명종 17) 1월 반국대적토포사종사관(叛國大賊討捕使從事官)이 되어 임꺽정[林巨正]의 등 도적을 진압하고, 그 공으로 숙마(熟馬) 1필을 상으로 받았다.[『명종실록』명종 17년 1월 8일, 명종 17년 1월 10일] 그는 다시 홍문관 교리와 의정부 사인을 역임한 후, 1563년(명종 18) 2월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이 되었고, 그 해 5월 예빈시(禮賓寺) 정(正)이 되었다.[『명종실록』명종 17년 4월 16일, 명종 17년 9월 5일, 명종 18년 2월 29일, 명종 18년 5월 21일] 1565년(명종 20) 11월 사헌부 장령(掌令)을 시작으로 사헌부 집의(執義)와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 승정원 좌승지(左承旨), 승정원 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를 지냈다.[『명종실록』명종 20년 11월 20일, 명종 20년 12월 21일, 명종 21년 1월 21일, 명종 21년 8월 28일, 명종 21년 윤10월 9일, 명종 22년 3월 14일, 명종 22년 4월 2일]
1569년(선조 2) 윤6월 승정원 승지가 되었다가 그 해 9월 체직되었고, 1574년(선조 7) 7월 다시 승정원 좌승지가 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2년 윤6월 9일, 선조 2년 9월 2일, 선조 7년 7월 21일] 1576년(선조 9) 4월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1580년(선조 13) 윤4월 특명으로 호조 판서(判書)가 되었다.[『선조실록』선조 9년 4월 10일,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선조 13년 윤4월 1일] 1583년(선조 16) 3월에는 비변사(備邊司) 당상(堂上)으로서 인재를 추천하기도 하였다.[『선조수정실록』선조 16년 3월 1일]
성품
박호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타고난 자질이 너그럽고 온화한 것 같았으나 본래 학식이 없어 일을 처리하는 것이 혼매하며 족히 취할 만한 게 없었다.[『명종실록』명종 21년 윤10월 9일]
후손
부인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김명윤(金明胤)의 딸로, 1남 박정현(朴鼎賢)을 두었다.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