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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3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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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진관법 |
한글표제 | 진관법 |
한자표제 | 鎭管法 |
동의어 | 진관체제(鎭管體制) |
관련어 | 주진(主鎭), 거진(巨鎭), 제진(諸鎭), 자전자수(自戰自守), 대적견수(對敵堅守) |
분야 | 정치/군사·국방/병법·훈련법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박재광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진관법(鎭管法) |
조선전기에 시행된 주진(主鎭), 거진(巨鎭), 제진(諸鎭)의 지방 군사 통솔체제.
개설
조선초기 1457년(세조 2) 중앙에 오위(五衛) 체제를 정비하면서 지방 군사조직으로 진관체제를 정비하였다. 진관체제는 세조 이전에 있었던 군익도체제(軍翼道體制)를 개편하여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나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관할하는 주진 아래에 첨절제사(僉節制使)가 관할하는 몇 개의 거진을 두고, 그 밑에 절제도위(節制都尉)·만호(萬戶) 등이 관할하는 여러 진을 두어 유기적인 방어 체제를 이루도록 했다. 다시 말하면 각 도에 여러 개의 진관(鎭管) 조직을 갖추어 도내의 군사들을 가까운 진관에 분속시킨 다음 유사시에 각 진관의 군사책임자, 즉 당해 지역의 수령으로 하여금 그 지역의 방어책임을 맡게 하는 자전자수(自戰自守)의 체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느 한 지역의 군사가 패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하여도 인접 지역에서 대적견수(對敵堅守)케 하여 그 책임 구역을 방어할 수 있는 특징을 지닌 방어체제이다.
내용 및 특징
진관체제는 전국 행정단위의 하나인 읍을 군사조직 단위인 진(鎭)으로 편성해 그 크기에 따라 주진(主鎭), 거진(巨鎭), 제진(諸鎭)으로 나누고 각 읍의 수령이 군사 지휘권을 겸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현재의 수원, 여주, 광주, 남양주, 성남, 하남처럼 각 행정구역이 인접해 있는 경우 수원이 인구와 도시 규모가 가장 크다고 가정할 때 그곳이 주진이 된다. 두 번째 큰 성남, 남양주, 광주 등이 거진이 되고, 여주하남 등은 제진이 된다. 이에 따라 경기감사가 평소 행정기능을 담당하다가, 전쟁 등이 일어나면 그대로 군사지휘권을 갖게 된다. 당연히 거진과 제진은 주진의 명령에 복종해야 된다. 그러나 거진부터는 독자적 군사작전권이 있어 유사시 독립적인 군사행동이 가능했다.
진관체제의 장점은 각 행정구역이 자체적으로 군사기능을 담당하므로 수령의 강력한 통제 아래 지리에 밝은 이점을 이용해 지형적 특성에 맞는 작전을 구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 한 진관이 패퇴하면 다른 진관이 방위의 공백을 메워서 싸우게 하는 등 연계적인 체제로 형성돼 방어에 유리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소규모 지역향촌방위 개념이어서 대규모 침공에는 불리하다.
진관체제는 병농일치·양인개병을 기반으로 성립하는 것인데 16세기 초부터 양반관료층의 대규모 토지집적 현상이 일어나면서, 자영농이 몰락해 버렸다. 양반관료의 등쌀과 높은 세금, 잦은 부역 등에 못 이긴 자영농은 차라리 양반관료에게 스스로의 토지를 바치고 기꺼이 소작농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자영농의 몰락은 당연히 재정의 파탄을 불러왔고, 이는 군사의 군역 부담을 지원해주던 보인(保人)의 수가 감소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자연부락을 단위로 성립한 행정체제의 변질을 가져오게 돼 진관체제의 몰락을 더욱 부추겼다.
변천
세종 이래 연해·국경 등의 요새지에 영·진을 두었던 지방방위조직은 내지(內地) 주현의 방어가 소홀해지는 난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세조 때부터 국경지대인 평안도·함길도에 설치되었던 군익도체제를 전국으로 확장했다. 이에 내륙지방에도 거진을 설치하고 주위의 여러 읍을 중익·좌익·우익의 3익(翼) 체제로 정비했으며 각 읍의 수령들도 모두 군직(軍職)을 겸해 중익수령을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로 하고 좌익·우익 수령을 병마단련사(兵馬團練使)로 했다. 그리고 이들은 중앙으로 번상한다든가 또는 현지의 영·진·포에 입번하는 군사와 하번한 군사의 습진(習陣)에 관한 일들을 관장했다. 동시에 잡색군도 모두 각 익에 소속시켜 전국의 지방군 조직을 처음으로 획일화했다.
이러한 군익도체제는 1457년(세조 3)에 주요 지역을 거진으로 하되 나머지 주변 지역의 여러 진을 그에 속하도록 하는 진관체제로 개편되었다. 진관체제가 군익도체제와 다른 점은 종래 행정구역상의 도(道)와 혼돈하기 쉽던 도의 조직을 요새지나 군사기지로서의 거점적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 진으로 표시한 것과, 익의 체제를 지양하고 거진을 중심으로 여러 진이 이에 속하도록 하여 독진(獨鎭) 등을 없애고 각 진의 독자성을 살리는 등 일원적 군사체제를 더욱 분명히 한 것이다.
이후 1464년(세조 10)에는 정병(正兵)과 영진군(營鎭軍)을 합속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따라서 각 진관별로 시위군과 영진군을 각각 별도로 선발하여 서울의 번상시위와 진의 방위를 담당하던 체제에서, 각 관의 정병은 평상시 거주지역의 방위를 담당하다가 번차에 따라 상경 숙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진관편제는 약간의 수정을 거쳐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법제화되었다. 각 도에 병마절도사를 두어 도내 육군의 지휘권을 장악하게 했는데 이를 주진이라 했다. 주진 아래에는 거진이 있었는데, 거의 목사가 겸직하는 첨절제사가 지휘했다. 말단 진은 군수 이하가 첨절제사 이하의 직함을 맡았다. 한편 수군도 육군의 진관 편성체제에 따라 진관조직을 갖추었다. 육군과는 달리 제주도나 교동도 등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수령의 겸임이 없고 최고지휘관인 수군절도사 밑에 우후·첨절제사·만호 등의 직함을 두었다. 이로써 전국이 군사적으로 일원적인 통제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경국대전』에 나타난 25진관(鎭管) 체제의 편성은 다음과 같다.
① 경기도(京畿道) : 종3품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4원, 즉 광주진(廣州鎭)·수원진(水原鎭)·양주진(楊州鎭)·장단진(長湍鎭),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1원 월곶진(月串鎭)
② 충청도(忠淸道) : 종3품 병마첨절제사 4원, 즉 충주진(忠州鎭)·청주진(淸州鎭)·공주진(公州鎭)·홍주진(洪州鎭), 수군첨절제사 2원, 즉 소근포진(所斤浦鎭)·마량진(馬梁鎭)
③ 경상도(慶尙道) : 정3품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1원 경주진(慶州鎭), 종3품 병마첨절제사 5원, 즉 안동진(安東鎭)·대구진(大丘鎭)·상주진(尙州鎭)·진주진(晉州鎭)·김해진(金海鎭), 수군첨절제사 2원, 즉 부산포진(釜山浦鎭)·제포진(薺浦鎭)
④ 전라도(全羅道) : 정3품 병마수군절제사 1원 제주진(濟州鎭), 병마절제사 1원 전주진(全州鎭), 종3품 병마첨절제사 4원, 즉 나주진(羅州鎭)·장흥진(長興鎭)·남원진(南原鎭)·순천진(順天鎭), 수군첨절제사 2원, 즉 사도진(蛇渡鎭)·임치도진(臨淄島鎭)
⑤ 황해도(黃海道): 병마첨절제사 2원, 즉 황주진(黃州鎭)·해주진(海州鎭), 수군첨절제사 1원 소강진(所江鎭)
⑥ 강원도(江原道) : 병마첨절제사 3원, 즉 강릉진(江陵鎭)·원주진(原州鎭)·회양진(淮陽鎭), 수군첨절제사 1원 삼척포진(三陟浦鎭)
위의 6도(道)는 거진(巨鎭)을 나타낸 것인데, 각 진(鎭)은 그 부근의 고을을 관할하였다. 경상도를 예로 들면, 경주진(慶州鎭)은 울산(蔚山)·양산(梁山)·영천(永川)·흥해(興海)의 4고을을 관할하고, 안동진(安東鎭)은 영해(寧海)·청송(靑松)·예천(醴泉)·영주(榮州)·풍기(豐基)의 5고을을 관할하며, 상주진(尙州鎭)은 성주(星州)·선산(善山)·김산(金山)의 3고을을 관할하고, 진주진(晉州鎭)은 합천(陜川)·초계(草溪)·함양(咸陽)·곤양(昆陽)의 4고을을 관할하며, 김해진(金海鎭)은 창원(昌原)·함안(咸安)의 2고을을 관할하고, 대구진(大丘鎭)은 밀양(密陽)·청도(淸道)의 2고을을 관할하게 하였다.
그러나 1457년 진관체제가 구축된 이후 오랫동안 왜구의 침입이 없이 태평시대가 계속되자, 진관체제는 상당히 이완(弛緩)되었다.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났을 때에 진관체제는 아무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특히 진관체제는 성립 기반이 지나치게 광범위하여 실제 방어에 있어서는 오히려 무력함이 나타나 그 기능을 상실해갔다. 대토지 집적 현상이 일반화되어 이로 인해 지주전호제(地主田戶制)가 확대되고, 군역(軍役)의 대납화(代納化)·포납화(布納化)가 늘게 되자 군사편성체제의 변화가 초래되어 진관체제는 15세기에 들어와 커다란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즉 군사의 군역 부담을 지원해주던 보인(保人)의 수가 감소되고 지주전호제가 확대됨에 따라 자연호 단위의 경제권이 위협받아 군사의 부담능력을 더욱 위축시켰다. 이것이 포납화 곧 방군수포(放軍收布)의 동기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방군의 대가로서 받는 포가 지방 재정을 충당하는 수단이 되었으며 그 고을에 해당된 전세(田稅)·공물(供物)·진상물(進上物) 등을 부담하기 위한 재원으로 방군수포는 더욱 확대되었다. 수군의 경우는 더욱 심했다. 그들의 역이 여러 병종 가운데 가장 고된 중역이었을 뿐 아니라 세습적인 요소가 많았고 또 연해의 각 포(浦)는 행정구역과는 관계를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본시 수군 이외에 부족한 인원을 근처 연해민이 아닌 자로 충당하기도 하여 정병보다 더 피폐해져 사실상 진관체제는 유지되기 힘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초의 전국적인 방위망인 진관체제는 유사시 여러 지역의 군사를 특정 장소에 집결시켜 대처하는 이른바 제승방략(制勝方略)의 응급적인 분군법(分軍法)으로 대체되어갔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이것마저 제구실을 하지 못함에 따라 유성룡(柳成龍)에 의해서 진관체제의 재정비론이 거론되었고, 이후 지방에 속오군(束伍軍) 등이 설치되었다.
의의
진관체제는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의 주진(主鎭) 아래에 몇 개의 거진을 두고 이 거진의 첨절제사가 여러 진을 통할하되 여러 진의 절제도위, 만호 등은 그 진을 중심으로 스스로 적을 방어하는 책임을 지는 자전자수의 체제이다. 각 진관의 정병은 평시 거주지의 방위력을 이루고 있다가 번차에 따라 상경, 숙위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요새지에 상주하는 유방병력(留防兵力)으로 활용되는 등 전국의 각 지역을 진관체제로 묶어 균일적 국방체제를 이룩했다. 이와 같은 진관체제는 국방병력의 일원화 조처를 이루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으며 단순한 지방군제의 조직에 그치지 않고 국가방어체제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진관체제는 행정관인 수령들이 군사지휘권을 장악함으로써 오히려 이들이 군사(軍事)를 몰라 등한히 하는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또 진관체제는 경제적 기반이 확고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행함으로써 문제점을 드러냈지만 제도 자체는 매우 의미 있는 것이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론 7 - 조선전기 국방체제의 제문제』, 1981.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론 9 - 조선후기 국방체제의 제문제』, 1981.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한국군제사』, 육군본부, 1968.
- 장학근, 『조선시대 군사전략』,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6.
- 정해은, 『조선후기 국토방위전략』,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2.
- 정해은, 『한국 전통병서의 이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4.
- 차문섭, 『조선시대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천관우, 『근세조선사연구』, 일조각, 1979.
- 오종록, 「조선초기의 변진방위와 병마첨사·만호」, 『역사학보』123, 1989.
- 차용걸, 「조선 성종대 해방축조논의와 그 양상」, 『백산학보』23, 백산학회,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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