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진(公州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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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도 공주목에 설치한 육군 거진으로, 전기에는 공주진관(公州鎭管), 후기에는 공주진영(公州鎭營)으로도 불림.

개설

공주진은 1457년(세조 3) 진관체제가 시행될 때 충청도 육군의 거진으로 설치되었다. 공주진은 공주목사가 병마첨절제사를 겸하여 평시에는 제진(諸鎭) 군병의 훈련과 점검을 주도하면서, 유사시에는 공주진관을 중심으로 방어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1594년(선조 27)부터 지방군을 개혁하는 가운데 공주진영을 설치하였다. 공주진영의 군병은 『여지도서』에 따르면 4,297명이었다. 공주진영은 속읍(屬邑) 군병을 훈련시키고 검열하였다. 육군이지만 강화도 방어에 참여하였으며, 도적 체포 등 치안 유지도 담당하였다. 아울러 수재(水災)가 심한 해에는 민간인을 돕는 일에도 나섰다.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공주진은 1457년 군익도(軍翼道)체제를 대신하여 진관체제가 시행되면서 거진 공주진관으로 설립되었다. 진관체제는 군익도의 ‘도’가 행정구역의 도와 혼동되는 것을 막고, ‘도’라는 지역적 성격보다 ‘진’이 갖는 군사기지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임진왜란 초기의 육지 전투에서 일본군의 조총과 수령이 육군의 군사지휘관을 겸임한 진관체제의 문제점 등으로 고전하자 이를 시정하기 위해 공주진영을 설립하였다. 즉 정부는 명나라의 『기효신서』를 도입하여 포수 중심의 삼수병을 육성하며, 군대의 편제도 ‘영(營)-사(司)-초(哨)-기(旗)-대(隊)’로 바꾸고, 영장을 파견하여 수령 대신 군병을 지휘하게 하는 등, 1594년(선조 27)부터 지방군을 개편하는 가운데 공주진영도 설치하였다.

조직 및 역할

조선전기의 거진 공주진은 공주목사가 병마첨절제사를 겸임하여, ‘임천, 한산, 공주, 전의, 정산, 은진, 회덕, 진령, 연산, 이산, 부여, 석성, 연기’ 등 제진의 훈련과 점검 및 유사시 제진의 군병을 집결시켜 공주진관을 방어하였다.

조선후기 충청도 우영(右營)인 공주진영은, 조선전기의 거진인 공주진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속읍은 ‘공주, 노성, 옥천, 전의, 은진, 회덕, 진령, 연산, 부여, 석성, 연기’이며, 공해(公廨)는 『호서읍지』에 따르면 ‘장청·훈련청 각각 12칸, 호소헌(虎嘯軒)·사령방 각각 10칸, 내아(內衙)·집사청·형리청 각각 9칸, 내삼문·외삼문 각각 3칸’이 있었다.

군병은 ‘별장 2명, 천총 3명, 파총 6명, 초관 29명, 기고관 2명, 기패관 60명, 교사 20명, 훈도 1명, 마병 579명, 보군 3,595명’ 등 총 4,297명이었다. 치안을 담당한 토포군관 35인도 『양역실총』 등에서 확인된다.

영장 일행의 급료인 미(米) 84섬 등 공주진영의 재정은 소속 읍이 마련하였는데, 공주목이 ‘수미(需米) 49섬 13말 8되, 포진찬가미(鋪陳饌價米) 55섬 13말 8되’ 등 가장 많이 부담하였다. 공주진영은 영장순력(營將巡歷)을 통해 속읍 속오군 등의 훈련 및 무기·복장 상태를 점검하였고, 병자호란이 끝난 후 강화도 방어에도 참여하였으며(『효종실록』 2년 6월 3일), 1894년에는 동학농민군을 충청감영 뒷산인 봉황산에서 격퇴하였다. 1665년(현종 6) 공주영장이 토포사(討捕使)를 겸임하자 공주진영은 토포영이 되어 도둑, 천주교도, 임술민란 주도자와 적극 가담자 등을 체포하였다. 물난리가 심하던 1810년~1859년에는 조련이나 점열 대신 제언(堤堰) 수축 등 민간인을 돕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변천

조선전기 공주진관은 임진왜란 중에 진영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공주진영으로 바뀌었다. 공주진영 속읍의 수는 공주진관 제진 13개 중에서 ‘임천, 한산, 정산’이 홍주진영으로 이속되는 대신 청주진영에서 옥천이 옮겨와 11개로 줄었고, 속읍 가운데 이산은 노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아울러 1654년(효종 5) 이후 공주영장 파견이 확정됨으로써 공주목사의 속읍 군사지휘권은 공주영장에게 넘어갔다. 공주진영은 1665년(효종 6)부터 토포영이 되어 치안도 담당하였다. 공주진영은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 때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각사등록(各司謄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속대전(續大典)』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호서읍지(湖西邑誌)』
  • 『양역실총(良役實總)』
  • 『부역실총(賦役實總)』
  • 『기효신서(紀效新書)』
  • 김우철, 『조선후기 지방군제사』, 경인문화사, 2001.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서태원, 『조선후기 지방군제연구-영장제를 중심으로-』, 혜안, 1999.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서태원, 「조선후기 청주진영연구」,『호서사학』42, 2005.
  • 서태원, 「조선후기 해미진영연구」,『역사교육』92,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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