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진(全州鎭)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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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전주진 |
한글표제 | 전주진 |
한자표제 | 全州鎭 |
상위어 | 주진(主鎭), 병영(兵營), 순영(巡營) |
하위어 | 제진(諸鎭), 속읍(屬邑) |
동의어 | 거진(巨鎭), 전주진관(全州鎭管), 전주진영(全州鎭營), 전주토포영(全州討捕營) |
관련어 |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전주영장(全州營將), 전주토포사(全州討捕使),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衛), 순찰사(巡察使) |
분야 | 정치/군사·국방/편제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서태원 |
폐지 시기 | 1895년(고종 32)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전주진(全州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고종실록』 24년 8월 15일 |
조선시대 전라도 전주부에 설치한 육군 거진.
개설
전주진은 1457년(세조 3) 진관(鎭管)체제가 시행될 때 전라도 육군의 거진(巨鎭)으로 설치되었다. 전주부윤이 병마절제사를 겸하여 평시에는 제진(諸鎭) 군병의 훈련을 점검하고, 유사시에는 전주진관을 중심으로 방어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 초기 육지 전투에서 조선군이 일본군의 조총과 진관체제(鎭管體制)의 문제점 등으로 고전하자, 정부가 1594년(선조 27)부터 지방군을 개혁하는 가운데 전주진영도 설치되었다. 전주진영의 군병은 『군국총목(軍國摠目)』에 의하면 7,382명으로 적혀 있다. 전주진영은 속읍(屬邑) 군병의 훈련과 점열을 하였고, 민란 진압과 괘서를 쓴 범인이나 도적 체포 등 치안도 담당하였다.
전주진영은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乙未改革)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전기에는 거진으로서 군익도(軍翼道)체제를 대신하여 1457년(세조 3) 진관체제가 시행되면서 설립되었다. 군익도의 ‘도’가 행정구역의 도와 혼동되는 것을 막고, ‘도’라는 지역적 성격보다 ‘진’이 갖는 군사기지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 실시된 것이 진관체제다.
조선후기에는 임진왜란 초기의 육지 전투에서 ‘일본군의 조총과 수령이 육군의 군사 지휘관을 겸임한 진관체제의 문제점 등이 드러나자 이를 시정하기 위해 전주진영으로 바뀌었다. 즉 정부는 명나라의 『기효신서』를 도입하여 포수 중심의 삼수병(三手兵)을 육성하고, 군대의 편제도 ‘영(營)-사(司)-초(哨)-기(旗)-대(隊)’로 바꾸면서 영장을 파견하여 수령 대신 군병을 지휘하게 하는 등, 1594년(선조 27)부터 지방군을 개편하는 가운데 전주진영도 설치되었다.
조직 및 역할
조선전기의 전주진은 거진으로서 전주부윤이 병마절제사를 겸임하여, ‘익산, 김제, 고부, 금산, 진산, 여산, 전주, 정읍, 흥덕, 부안, 만경, 옥구, 임피, 금구, 용안, 함열, 고산, 태인’ 등의 제진 군병을 훈련시키고 점검하였으며, 유사시 제진의 군병을 집결시켜 전주진관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였다.
조선후기 중영(中營)인 전주진영으로 바뀌어 조선전기의 전주진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속읍은 ‘전주, 김제, 고부, 진안, 임실, 금구, 만경, 부안’이었고, 군병은 ‘별장 2명, 천총 3명, 파총 9명, 초관 51명, 교련관 10명, 기패관 75명, 지구관(知彀官) 1명, 기고관 1명, 교사 54명, 화포교사 10명, 훈도 10명, 군뢰 143명, 대기수 107명, 대포수 38명, 취고수 48명, 당보군 59명, 취반노(炊飯奴) 26명, 마군 556명, 보군 4,906명, 잡색군 423명, 각초하수솔 689명, 군기감관 8인, 대변병방 1, 대변군관 50명, 토포병방 2명, 토포군관 80인, 토포군사 20명’ 등 7,382명이었다.
전주진영은 영장순력(營將巡歷)을 통해 속읍 속오군 등의 훈련과 무기·복장 상태를 점검하였고, 괘서 범인을 체포하고 신문(訊問)하였다. 1894년에는 동학농민군 체포를 담당하였다. 아울러 1665년(현종 6) 전주영장이 토포사를 겸임하자 전주진영은 토포영이 되어 도둑의 체포(『고종실록』 24년 8월 15일) 등 치안도 담당하였는데, ‘토포병방·토포군관·토포군사’는 그러한 업무와 관련된 진영의 인적 구성원이었다.
변천
조선전기의 전주진관은 임진왜란 중에 진영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전주진영이 되었다. 전주진영의 속읍은 전주진관의 18개에서 ‘익산, 금산, 진산, 여산, 정읍, 흥덕, 옥구, 임피, 용안, 함열, 고산, 태인’이 제외되는 대신 ‘진안, 임실’이 추가됨으로써 8개로 축소되었다. 그 이유는 새로 설치된 여산진영에 옛 전주진관 소속 9개 읍이 이속되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1654년(효종 5) 이후 전주영장의 파견이 확정됨으로써 전주부윤의 속읍 군사지휘권은 전주영장에게 넘어갔으며, 1665년부터 전주진영이 토포영도 겸하였다.
전주진영은 1895년 을미개혁으로 인하여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각사등록(各司謄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여지도서(輿地圖書)』
- 『호남읍지(湖南邑誌)』
- 『군국총목(軍國摠目)』
- 『양역실총(良役實總)』
- 『기효신서(紀效新書)』
- 김우철, 『조선후기 지방군제사』, 경인문화사, 2001.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서태원, 『조선후기 지방군제연구-영장제를 중심으로-』, 혜안, 1999.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서태원, 「조선후기 청주진영연구」,『호서사학』42,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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