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진(羅州鎭)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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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나주진 |
한글표제 | 나주진 |
한자표제 | 羅州鎭 |
상위어 | 주진(州鎭), 병영(兵營), 순영(巡營) |
하위어 | 제진(諸鎭), 속읍(屬邑) |
동의어 | 거진(巨鎭), 나주진관(羅州鎭管), 나주진영(羅州鎭營), 나주토포영(羅州討捕營) |
관련어 |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나주영장(羅州營將), 나주토포사(羅州討捕使),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衛), 순찰사(巡察使) |
분야 | 정치/군사·국방/편제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서태원 |
폐지 시기 | 1895년(고종 32)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나주진(羅州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고종실록』31년 9월 17일 |
조선시대 전라도 나주목에 설치한 육군 거진으로, 전기에는 나주진관, 후기에는 나주진영으로도 불림.
개설
나주진은 1457년(세조 3) 진관체제(鎭管體制)가 시행될 때 전라도 육군의 거진(巨鎭)으로 설치되었다. 나주진은 나주목사가 병마첨절제사를 겸하여 평시에는 제진(諸鎭) 군병의 훈련과 점검을 주도하고, 유사시에는 나주진관(羅州鎭管)을 중심으로 방어하도록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초기에 육지 전투에서 조선군이 일본군에게 고전하자, 1594년(선조 27)부터 지방군을 개혁하면서 나주진영(羅州鎭營)도 설치되었다.
나주진영의 군병은 『군국총목(軍國摠目)』에 7,841명으로 적혀 있다. 나주진영은 속읍(屬邑) 군병을 훈련하고 점검하였다. 민란이나 변란을 진압하고 도적을 체포하는 등 치안도 담당하였다.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乙未改革)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나주진은 조선전기에 거진 나주진관으로, 군익도(軍翼道)체제를 대신하여 1457년(세조 3) 진관체제가 시행되면서 설립되었다. 진관체제는 군익도의 ‘도’가 행정구역의 도와 혼동되는 것을 막고, ‘도’라는 지역적 성격보다 ‘진’이 갖는 군사기지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 시행된 제도다.
임진왜란 초기 육지 전투에서 일본군의 조총과 수령이 육군의 군사 지휘관을 겸임한 진관체제의 문제점 등으로 고전하자 이를 시정하기 위해 조선후기에 나주진영을 설립하였다. 즉 정부가 명나라의 『기효신서』를 도입하여 포수 중심의 삼수병인 포수, 살수, 사수를 육성하고, 군대의 편제도 ‘영(營)-사(司)-초(哨)-기(旗)-대(隊)’로 바꾸고, 영장을 파견하여 수령 대신 군병을 지휘하게 하는 등, 1594년(선조 27)부터 지방군을 개편하면서 나주진영을 설치한 것이다.
조직 및 역할
조선전기에 거진인 나주진은 나주목사가 병마첨절제사를 겸임하여, ‘광주, 영암, 영광, 나주, 함평, 고창, 장성, 진원, 무장, 남평, 무안’ 등 제진의 훈련과 점열 및 유사시 제진의 군병을 집결시켜 나주진관을 방어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전라도 우영(右營)으로서 조선전기의 거진인 나주진의 역할을 대신하였는데, 속읍은 ‘광주, 영암, 영광, 나주, 함평, 능주, 화순, 무장, 남평, 무안’이었다.
군병은 ‘별장 2명, 천총 3명, 파총 9명, 초관 56명, 교련관 10명, 기패관 84명, 지구관(知彀官) 1명, 기고관 1명, 교사 7명, 화포교사 9명, 훈도 10명, 군뢰 60명, 대기수 92명, 대포수 23명, 취고수 35명, 당보군(塘報軍) 120명, 취반노(炊飯奴) 30명, 마군 568명, 보군 5,684명, 잡색군 9명, 각초하수솔(各哨下隨率) 865명, 군기감관 10명, 대변병방 1명, 대변군관 50명, 토포병방 2명, 토포군관 80명, 토포군사 20명’ 등 총 7,841명이었다.
나주진영은 영장순력(營將巡歷)을 통해 속읍, 속오군 등의 훈련을 비롯하여 무기와 복장 상태를 점검하였다. 1862년에는 함평민란을 일으킨 주모자를 체포하였으며, 1894년 동학농민군의 나주성 공격을 격퇴하는 데에 기여하였다(『고종실록』31년 9월 17일).
1665년(현종 6)에 나주영장이 토포사(討捕使)를 겸임하자 나주진영은 토포영이 되어 도둑 체포 등을 담당하였는데, ‘토포병방·토포군관·토포군사’는 진영의 치안을 유지하는 기능을 보여주는 인적 구성원이었다.
변천
조선전기에 나주진관은 임진왜란 중에 진영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나주진영으로 바뀌었다. 나주진영의 속읍은, 나주진관의 11개에서 ‘고창, 장성, 진원’이 제외되는 대신 ‘능주, 화순’이 추가됨으로써 10개로 감소하였다.
1654년(효종 5) 이후 나주영장의 파견이 확정됨으로써 나주목사의 속읍 군사 지휘권이 나주영장에게 넘어갔으며, 1665년부터 나주진영이 토포영도 겸하였다.
1895년 을미개혁으로 인하여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각사등록(各司謄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속대전(續大典)』
- 『여지도서(輿地圖書)』
- 『호남읍지(湖南邑誌)』
- 『양역실총(良役實總)』
- 『부역실총(賦役實總)』
- 『기효신서(紀效新書)』
- 김우철, 『조선후기 지방군제사』, 경인문화사, 2001.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서태원, 『조선후기 지방군제연구-영장제를 중심으로-』, 혜안, 1999.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서태원, 「조선후기 청주진영연구」, 『호서사학』42,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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