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진(廣州鎭)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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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광주진 |
한글표제 | 광주진 |
한자표제 | 廣州鎭 |
상위어 | 주진(主鎭), 병영(兵營), 순영(巡營) |
하위어 | 제진(諸鎭), 속읍(屬邑) |
동의어 | 거진(巨鎭), 광주진관(廣州鎭管), 광주진영(廣州鎭營), 광주방어영(廣州防禦營), 광주유수부(廣州留守府), 광주토포영(廣州討捕營) |
관련어 |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광주영장(廣州營將), 겸영장(兼營將), 광주토포사(廣州討捕使), 광주목사(廣州牧使), 광주부윤(廣州府尹), 광주유수(廣州留守), 남한산성(南漢山城), 광주방어사(廣州防禦使), 수어사(守禦使), 순찰사(巡察使) |
분야 | 정치/군사·국방/편제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서태원 |
폐지 시기 | 1895(고종 32)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광주진(廣州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36년 2월 18일 |
조선시대 경기도 광주에 설치된 육군 거진으로, 전기에는 광주진관, 후기에는 광주진영·광주방어영·광주유수부 등으로 불림.
개설
광주진은 1457년(세조 3) 진관체제(鎭管體制)가 시행될 때 경기도 육군의 거진(巨鎭)으로 설치되었다. 광주목사가 병마첨절제사를 겸임하여 제진(諸鎭) 군병의 훈련과 점열(點閱) 등을 주도하면서 유사시에 광주진관(廣州鎭管)을 중심으로 방어하도록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초기에 육지 전투에서 조선군이 일본군에게 고전하자, 1594년(선조 27)부터 지방군을 개혁하였는데, 광주는 1601년 광주목사가 지휘관을 겸하면서 경기도 전영(前營)이 되었다. 광주진영(廣州鎭營)은 1626년(인조 4) 남한산성의 방어를 맡는 광주방어영(廣州防禦營)이 되었고, 1633년 토포영을 겸하면서 도적 등을 잡았으며, 1795년(정조 19) 광주유수부(廣州留守府)로 승격하였다.
한편 광주진은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광주진은 1457년(세조 3) 군익도(軍翼道)체제를 대신하여 진관체제가 시행되면서 광주진관으로 설립되었다. 진관체제는 군익도의 ‘도’가 행정구역의 도와 혼동되는 것을 막고, ‘도’라는 지역적 성격보다 ‘진’이 갖는 군사기지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광주진은 임진왜란 초기 육지 전투에서 일본군의 조총과 수령이 육군의 군사 지휘관을 겸임한 진관체제의 문제점 등으로 고전하자 이를 시정하기 위해 광주진영으로 설립되었다. 정부는 명나라의 『기효신서』를 도입하여 포수 중심의 삼수병을 육성하였다. 군대의 편제도 ‘영(營)-사(司)-초(哨)-기(旗)-대(隊)’로 바꾸고, 영장을 파견하여 수령 대신 군병을 지휘하게 하는 등, 1594년(선조 27)부터 지방군을 개편하는 가운데 광주진영도 1601년 경기도의 전영이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조선전기 거진 광주진은 광주목사가 병마첨절제사를 겸임하여, ‘광주, 여주, 이천, 양근, 지평, 음죽, 양지, 죽산, 과천’ 등 제진의 훈련과 점열 및 유사시 제진의 군병을 집결시켜 광주진관을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선후기에는 경기도 전영이 되어 조선전기 거진인 광주진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광주진영의 군병은 광주부윤이 수어청의 전영장일 때 ‘속오 25초, 표하군 335명, 진군관 250명, 진군 2초’였고, 소속 읍은 ‘광주, 이천, 용인, 삼전도’였다. 광주진영은 유사시 국왕의 피신처로서, 도성의 외곽 방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남한산성의 방어(『선조실록』 36년 2월 18일)를 담당하였다. 1633년(인조 11) 광주목사가 토포사가 되자 광주진은 토포영이 되어 도적 체포 등 치안도 담당하였다.
변천
광주진은 1601년 광주목사가 지휘관을 겸임하면서부터 경기도 전영이 되었다. 광주진영은 1626년(인조 4) 광주의 읍치(邑治)를 남한산성으로 옮기면서 방어영이 되었고, 1633년(인조 11) 토포영이 되어 ‘금천, 과천, 양주, 포천, 영평, 가평, 양근, 지평’ 등의 소속 읍을 지휘하였다. 반면 총융청과 수어청 등이 창설된 후 군사 분야와 관련된 광주진영의 소속 읍은 전기 11개에서 크게 줄었는데, 광주부윤이 조선후기 중앙 5군영으로 경기도 남부에서 도성 외곽의 방어를 담당한 수어청의 전영장이었을 때는 4개에 불과하였다. 아울러 숙종대 이후 광주를 유수부로 승격시키고 광주유수로 하여금 수어사를 겸임하게 한 광주유수부제는, 군사력 강화와 국가의 재정 부담 등을 이유로 몇 차례 바뀌다가 1795년(정조 19) 광주유수가 수어사를 겸임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광주유수부는 1895년 을미개혁 때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징비록(懲毖錄)』
- 『중정남한지(重訂南漢誌)』
- 『기효신서(紀效新書)』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서태원, 『조선후기 지방군제연구-영장제를 중심으로-』, 혜안, 1999.
- 이존희, 『조선시대의 한양과 경기』, 혜안, 2001.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차문섭, 『조선시대 군사관계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96.
- 서태원, 「조선후기 광주의 군사지휘체계 변천」,『실학사상연구』 29, 2006.
- 이존희, 「조선시대 유수부 경영」,『한국사연구』 47, 1984.
- 이현희, 「조선 남한축성 여측」,『사총』 7, 197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