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진(淸州鎭)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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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청주진 |
한글표제 | 청주진 |
한자표제 | 淸州鎭 |
상위어 | 주진(主鎭), 병영(兵營), 순영(巡營) |
하위어 | 제진(諸鎭), 속읍(屬邑) |
동의어 | 거진(巨鎭), 청주진관(淸州鎭管), 청주진영(淸州鎭營), 청주토포영(淸州討捕營) |
관련어 |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청주영장(淸州營將), 청주토포사(淸州討捕使),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衛), 순찰사(巡察使) |
분야 | 정치/군사·국방/편제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서태원 |
폐지 시기 | 1895년(고종 32)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청주진(淸州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효종실록』 2년 6월 3일 |
조선시대 충청도 청주목에 설치한 육군 거진으로, 전기에는 청주진관, 후기에는 청주진영으로도 불림.
개설
청주진은 1457년(세조 3) 진관체제가 시행될 때 충청도 육군의 거진(巨鎭)으로 설치되었다. 청주목사가 병마첨절제사를 겸임하여 평시에는 제진(諸鎭)의 군병을 훈련시키고 점열(點閱)을 주도하였으며, 유사시에는 청주진관(淸州鎭管)을 중심으로 방어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육지 전투에서 조선군이 일본군의 조총과 진관체제(鎭管體制)의 문제점 등으로 고전하자, 정부가 1594년(선조 27)부터 지방군을 개혁하는 가운데 청주진영(淸州鎭營)도 설치하였다.
청주진영의 군병은 『호서읍지』에 따르면 5,471명이었다. 청주진영은 속읍(屬邑) 군병 훈련과 점열을 담당하였고, 남한산성과 추풍령을 방어하였다. 도적을 체포하는 등 치안도 담당하였다. 아울러 수재(水災)가 심한 해에는 대민지원(對民支援)에도 나섰다.
청주진영은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乙未改革)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전기 청주진은 거진 청주진관으로서, 군익도(軍翼道)체제를 대신하여 1457년(세조 3) 진관체제가 시행되면서 설립되었다. 진관체제는 군익도의 ‘도’가 행정구역의 ‘도’와 혼동되는 것을 막고, ‘도’라는 지역적 성격보다 ‘진’이 갖는 군사기지의 성격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시행된 것이다.
조선후기의 청주진은 청주진영으로서, 임진왜란 초기 육지 전투에서 일본군의 조총과 수령이 육군의 군사지휘관을 겸임한 진관체제의 문제점 등으로 고전하자 이를 시정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즉 정부는 명나라의 병서(兵書)인 『기효신서』를 도입하여 포수 중심의 삼수병(三手兵)을 육성하고, 군대 편제도 ‘영(營)-사(司)-초(哨)-기(旗)-대(隊)’로 바꾸었다. 더불어 영장을 파견하여 수령 대신 군병을 지휘하도록 하는 지방군 개혁을 1594년(선조 27)부터 시행하는 가운데 청주진영도 설치하였다.
조직 및 역할
조선전기의 청주진은 청주목사가 병마첨절제사를 겸임하여. ‘천안, 옥천, 청주, 직산, 목천, 문의, 회인, 청안, 진천, 보은, 영동, 황간, 청산’ 등 제진 군병을 훈련시키고 점검하였고, 유사시에는 제진의 군병을 집결시켜 청주진관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충청도 중영(中營)으로서 청주진영은, 조선전기 청주진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속읍은 ‘청주, 문의, 회인, 보은, 청산, 황간, 영동, 진천, 청안, 직산, 천안, 목천’이었으며, 건물로는 ‘동헌 6칸, 파청당(把淸堂) 8칸’이 있었다.
군병은 ‘별장 2명, 천총 3명, 파총 6명, 초관 33명, 기패관 58명, 영군관 50명, 토포군관 90명, 봉수별장 8명, 마병 714명, 보군 3,667명’ 등 5,471명이었다. 진영에서 사용되는 ‘종이, 붓, 먹’은 소속 읍에 배정되었으나, ‘영장 일행의 월급 84섬, 반찬값 48섬 11말 7되 6홉’ 등 대부분의 재원은 청주목이 마련하였다.
청주진영은 영장이 관할 지역을 순회하면서 속읍 속오군 등의 훈련과 무기 및 복장 상태를 점검하였고, 남한산성 방어(『효종실록』 2년 6월 3일)와 유사시 일본군의 한양 진격을 추풍령에서 막는 일을 담당하였다. 1665년(현종 6) 청주영장이 토포사(討捕使)가 되면서 청주진영은 토포영으로서 ‘도둑, 천주교도, 무신란(戊申亂) 가담자’ 체포와 호랑이 포획 등 치안도 담당하였다. 특히 청주진영은 수재가 심각했던 1810~1859년에는 조련이나 점검 대신 군병에게 둑을 쌓는 대민지원에도 나섰다.
변천
조선전기에는 청주진관이었으나 임진왜란 중에 진영제도가 시행되는 가운데 청주진영으로 바뀌었다. 청주진영의 속읍은, 청주진관의 제진 13개 중에서 옥천이 공주진영으로 옮겨 가면서 12개로 줄어들었다.
1654년(효종 5) 이후 청주진영에 영장 파견이 확정됨으로써 청주목사의 속읍에 대한 군사 지휘권이 청주영장에게 넘어갔다. 아울러 충청도좌영(左營)이었던 청주진영은 1652년 병영이 해미에서 청주로 옮기면서 중영이 되었고, 1665년부터 토포영을 겸하였다. 1683년(숙종 9) 추풍령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청주진영을 옥천으로 옮겼다가 군교와 하졸의 왕래가 어렵고 교련장도 없다는 이유 등으로 1687년 환원되었다.
청주진영은 1895년 을미개혁으로 인하여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각사등록(各司謄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호서읍지(湖西邑誌)』
- 『여지도(輿地圖)』
- 『양역실총(良役實總)』
- 『부역실총(賦役實總)』
- 『약천집(藥泉集)』
- 『기효신서(紀效新書)』
- 김우철, 『조선후기 지방군제사』, 경인문화사, 2001.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서태원, 『조선후기 지방군제연구-영장제를 중심으로-』, 혜안, 1999.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서태원, 「갑오개혁 이후 충청북도 지방군-청주지방대와 진위대를 중심으로-」, 『한국사연구』136, 2007.
- 서태원, 「조선후기 청주진영연구」, 『서호사학』42, 2005.
- 서태원, 「조선후기 해미진영연구」, 『역사교육』92, 2004.
- 임선빈, 「조선후기 ‘해미읍성’의 축성과 기능변천-충청병영성에서 호서좌영으로-」, 『역사와 담론』58,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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