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진(原州鎭)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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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원주진 |
한글표제 | 원주진 |
한자표제 | 原州鎭 |
관련어 | 원주도(原州道), 원주목사(判原州牧使), 수어청(守禦廳) |
분야 | 정치/군사·국방/편제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윤훈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원주진(原州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조실록』 1년 9월 11일, 『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인조실록』 6년 9월 14일, 『효종실록』 7년 7월 16일 |
조선시대 강원도의 원주 지역에 설치한 지방 방위 조직인 진관.
개설
고려공민왕 때 원주목(原州牧)으로 복귀되었던 것을 조선에서도 그대로 계승하였다. 초창기부터 계수관(界首官)으로 정해질 정도로 대우를 받았으며, 한때 목사가 관찰사를 겸하기도 했다. 세조대에 군익도(軍翼道)체제가 확장되면서 원주도(原州道)가 성립되었다.
곧이어 진관(鎭管)체제로 개편되면서 비로소 원주진(原州鎭)이 설치되었다. 범위가 원주 주변 일대에 국한되었다가 소속 진(鎭)이 달라지면서 영서 남부 일대에 걸치게 되었다.
후기에는 소속 진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며, 영장제로 개편됨에 따라 잠깐 세워졌다가 혁파되었다. 수어청에도 소속되었으나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결국 제외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353년(고려 공민왕 2)에 원주목으로 회복되었는데, 설립 초기부터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의 계수관 가운데 하나로 정해질 만큼 거읍(巨邑)으로 제구실을 했다. 곧이어 도 이름이 강원도로 바뀌었는데, 강릉과 함께 원주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1397년(태조 6)에 각 도의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를 혁파하고, 각 진(鎭)에 첨절제사(僉節制使)를 두었을 때, 강원도에서는 삼척(三陟)과 간성(杆城)이 선정되었다. 1408년(태종 8) 강원도관찰사를 판원주목사(判原州牧使)가 겸하게 했으나, 얼마 후에 관찰사가 목사를 겸하는 것을 폐지했다. 다만 관찰사영(觀察使營)은 그대로 두었다. 1448년(세종 30)부터 다시 겸하게 했다가 뒷날 다시 나뉘었다.
1455년(세조 1)에 양계(兩界) 지역에 설치되었던 군익도체제를 전국으로 확장하면서 연해뿐만 아니라 내륙에도 거진을 두고 주변 고을을 분속시켰다. 이때 원주도(原州道)가 설치되면서 중익(中翼)에는 원주·횡성(橫城), 좌익(左翼)에는 영월(寧越)·평창(平昌)·정선(旌善), 우익(右翼)에는 춘천(春川)·양구(楊口)·홍천(洪川)·인제(麟蹄)·낭천(狼川)이 소속되었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다시 1457년에 군익도체제를 진관체제로 개편하면서 제도(諸道)의 중익·좌익·우익을 혁파하는 대신, 주요 지역을 거진으로 삼고 주변의 제진(諸鎭)을 그 휘하에 소속시켰다. 원주진(原州鎭: 한자 중복 삭제)이 비로소 설치되면서 평창·영월·횡성이 이에 속하였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이는 직전의 원주도에도 춘천 방면의 제진들이 독립해서 나가면서 원주 주변의 것들만 남아 있는 형상이었다. 그 이후에 소속 진들이 다시 한번 대폭 변동되었는데, 그 결과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실려 있다.
조직 및 역할
『경국대전』에 따르면, 정3품의 원주목사가 종3품의 병마첨절제사를 겸하면서 원주진관을 통솔하였다고 한다. 원주진에 소속된 춘천에서는 부사가, 정선·영월·평창에서는 군수가 종4품 병마동첨절제사를, 원주판관과 인제·횡성·홍천에서는 현감이 종6품의 병마절제도위를 겸하여 지휘를 받았다. 대체로 종전의 원주도에 소속되었던 제진들이 대부분 다시 원주진관에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중앙에 올라가 대열(大閱) 등에 참가했을 때에는 오위(五衛)에 소속되었고, 중위(中衛)였던 의흥위(義興衛)의 좌부(左部)에 속하였다.
변천
임진왜란 이후 지방 군제가 개편되면서 진관체제에도 변화가 생겼다. 게다가 지방군을 강화하고자 영장제(營將制)를 도입되면서 여러모로 달라졌다. 일단 군사적 식견이 있는 당상관(堂上官)을 전임의 영장으로 파견하여, 거진 수령이 행사하던 군사 지휘권을 이양받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했는데, 원주에도 파견되었다(『인조실록』 6년 9월 14일). 그러나 유지 비용이 너무 크다는 이유로 1637년에 혁파되었다. 병자호란 이후에 수령이 겸하는 겸영장제를 시행했는데, 이때 원주도 해당되었다(『효종실록』 7년 7월 16일).
『속대전(續大典)』에서는 중영장(中營將)을 원주목사가 겸하게 했으나, 『대전통편(大典通編)』에 이르러 횡성현감으로 이관되었다. 소속 진관에도 변화가 생겼는데 춘천부사가 종2품 병마방어사를 겸하면서 빠져나갔으나, 그 밖의 제진에는 변동이 없었다.
인조대에 도성 방위를 강화할 목적으로 수어청을 설치하고, 원주 등의 4영(營)을 그에 소속시켰다[『현종개수실록』 4년 11월 14일]. 이에 우영(右營)으로 삼았다가 본영(本營)이 있는 남한산성과 거리가 너무 멀어 급할 때에 쓰기가 어렵다면서 이를 혁파하였다[『숙종실록』 30년 12월 28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속대전(續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만기요람(萬機要覽)』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서태원, 『조선후기 지방군제연구』, 혜안, 1999.
- 육군본부,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전기편 -』, 1968.
- 육군본부,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후기편 -』, 1977.
- 차문섭, 『조선시대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