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흥위(義興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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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앙군 조직의 중심이었던 오위에 속한 군사 조직.

개설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중앙군 조직을 정비하는 데 힘을 쏟았다. 처음에는 10위로 편성되었는데 태조가 친히 거느렸던 의흥친군좌·우위가 핵심이었다. 곧바로 4시위사(侍衛司)와 6순위사(巡衛司)로 바뀌면서 의흥시위사로 되었다.

이후 9시위사 1순위사 체제가 되었다가, 재차 12사로 변경되면서 의흥사가 되었다. 문종대에 오위진법(五衛陣法) 도입을 계기로 5사제가 수립되었으나 기존 체제에 변함이 없었다. 1457년(세조 3) 오위제로 바뀌면서 비로소 의흥위가 성립되었다. 오위진법에 의거하면서 중위가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이 건국된 뒤 정치적 안정 등을 이유로 중앙군을 꾸준하게 증강시켰다. 더불어 이들을 통솔하던 군사 조직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처음에는 십위(衛)로 편성되었는데, 그중 태조가 즉위 전부터 거느렸던 병력으로 편성된 의흥친군좌·우위가 핵심을 이루었다. 이것이 의흥위 이름의 기원이다.

곧이어 4시위사와 6순위사가 구분되고 각 관사가 중·좌·우군의 삼군(三軍)으로 분속되는 체제로 바뀌었다. 이때 의흥친군좌위를 의흥시위사(義興侍衛司)로 바꾸었다(『태조실록』 3년 2월 29일). 사병 혁파 이후에 군제 개편이 연이어 단행되면서 1409년(태종 9) 9시위사 1순위사로 바뀌었다. 또다시 1418년(태종 18)에 12사로 늘어나면서 충좌사(忠佐司)가 되었다. 세종대에 10사로 축소했다가 도로 12사가 되었으나 변화가 없었다.

문종의 주도로 오위진법이 도입되는 것을 계기로, 1451년에 5사제가 수립되었으나 의흥사는 변동이 없었다. 1457년(세조 3) 오위제로 바뀌는 것과 동시에 의흥위가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오위진법에 의거해서 개편이 이루어진 관계 조직 편성과 진법 훈련체계가 일체화되고, 이에 따라 의흥위는 전위(中衛)로 정해졌다(『세조실록』 3년 3월 6일).

조직 및 역할

오위제로 바뀌면서 중앙군을 구성했던 대부분의 병종들이 분속되었다. 의흥위에는 갑사(甲士)와 궁문을 지키거나 왕을 경호하는 근장(近仗)이 속하였다. 1469년(예종 1)에 약간의 변화를 도모하여 근장 대신에 용양위의 중앙군 대졸(隊卒)이 속하게 되었다.

『경국대전』에서는 분속된 병종이 달라졌는데, 의흥위의 경우에는 대졸이 제외되었고 그 대신에 보충대(補充隊)가 새로 들어왔다. 아울러 전국 진관(鎭管)의 모든 외방 군사도 오위 각 부별(部別)로 분속되었다.

이때 의흥위에는 서울의 중부와 개성부 및 경기 양주·광주·수원·장단 등 진관의 군사로 중부(中部)를 이루고, 강원도의 강릉·원주·회양 등의 진관의 군사로 좌부(左部)를 이루고, 충청도의 공주·홍주 등 진관의 군사로 우부(右部)를 이루고, 충주·청주 등 진관의 군사로 전부(前部)를 이루고, 황해도 황주·해주 등 진관의 군사로 후부(後部)를 이루었다.

소속된 중앙 병종의 군사는 대개 궁궐 시위와 국왕 호위, 그리고 수도의 치안 등을 다른 위의 병력들과 교대로 맡았다. 지방 군사들의 경우에는 대열에 참가했을 때의 소속을 규정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변천

임진왜란 이후 중앙 군제의 대대적인 변동으로 오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였다. 『속대전(續大典)』에 이르면 오위의 병제(兵制)를 모두 혁파하고 관명(官名)만 남겨 두도록 규정되었다. 이로 인해 의흥위라는 이름은 존속하였으나 실질적인 역할은 없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육군본부,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전기편 -』, 1968.
  • 천관우, 『근세조선사연구』, 일조각, 1979.
  • 윤훈표, 「조선 세조 때 병정(兵政) 편찬의 의미와 그 활용」, 『역사와 실학』40, 2009.
  • 차문섭, 「군사조직」, 『한국사 23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국사편찬위원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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