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사(侍衛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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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중앙군의 분산된 군병을 통일적으로 지휘하기 위해 조직한 경호 부대.

개설

건국 초 태조에게는 사적인 군대가 있었지만, 공적 군대에 의한 호위가 필요해져서 공적인 군사 체계를 갖추었다. 그리고 초기에는 백성 중 일부가 교대로 군역을 져서 궁궐을 지켰으나 이것에 문제가 많아 시위사(侍衛司)를 만들게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시위사의 모체는 군사 조직, 군사 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조선왕조의 군제는 대체로 5위(五衛) 체제를 근간으로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증설된 군영(軍營)에 의해 5위 체제가 약화되고 5군영 중심으로 전환되던 시기도 있었지만, 조선 말기까지 군사 제도의 근간은 5위였다.

5위의 모체는 고려시대 2군(二軍) 6위(六衛)에 조선 건국 직후 개설한 의흥친군(義興親軍)을 합쳐서 설치한 중앙군인 10위(十衛)였다. 10위는 좌위(左衛)·우위(右衛)·응양위(鷹揚衛)·금오위(金吾衛)·좌우위(左右衛)·신호위(神虎衛)·흥위위(興威衛)·비순위(備巡衛)·천우위(千牛衛)·감문위(監門衛) 등이었으며, 정3품의 상장군(上將軍) 각 1명과 종3품의 대장군(大將軍) 각 2명을 두었다. 태조는 이들을 시위군으로 삼아 지방으로 행행하였다.

10위는 1394년(태조 3) 개편하여 4개 시위사와 6개 순위사(巡衛司)로 구성되는 10사(十司)가 되었다. 10사의 내용은 1400년(정종 2) 사병(私兵) 혁파로 군사 지휘권이 국가에 귀속되고, 갑사(甲士)가 군대 종류 중 하나로 확립되면서 충실해졌다. 10사에는 각각 5령(五領)이 설치되었고 각 령에는 사직(司直) 3명, 부사직(副司直) 5명, 사정(司正) 5명, 부사정(副司正) 7명 등 20명이 소속되었다. 즉, 10사 50령의 총 1,000명에 이르는 인원이 갑사로 충당되었다. 이러한 10사의 지휘관으로는 공신(功臣)과 왕의 사위인 부마(駙馬) 등 유력자들이 임명되었다. 이때 도성의 치안을 맡는 부대가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와 충무순금사(忠武巡禁司)로 개편됨에 따라 1409년(태종 9)에는 10사를 9개 시위사와 1개 순위사로 개편하여 시위 임무를 강화했다. 이에 앞서 1403년 태종은 의흥친군의 통할을 위해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두었고 1466년(세조 12)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로 개편되었다.

1418년(세종 즉위)에는 태종이 상왕(上王)이 되면서 궁궐을 시위할 군사를 늘려 12개 사(司)로 확장했다. 그 뒤 1424년에는 다시 10사로, 1445년에는 또다시 12사로 바뀌었다. 갑사 중심의 10사 또는 12사로 유지되어 오던 중앙 군사 조직이 획기적으로 개편되어 5위의 원초적 모습을 갖춘 것은 1451년(문종 1)이다. 이때 12사가 의흥사(義興司)·충좌사(忠佐司)·충무사(忠武司)·용양사(龍驤司)·호분사(虎賁司)의 5사(五司)로 개편되고, 갑사와 별도로 태종에서 세종 연간에 설립되었던 별시위(別侍衛)·총통위(銃筒衛)·방패(防牌)·섭육십(攝六十) 등의 주요 군대 종류들도 5사에 소속되었다. 갑사 외에 여러 중앙군 군대 종류가 5사에 소속된 것은 중앙군의 군대 종류가 많이 늘어난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갑사를 포함한 여러 중앙군이 번상(番上)할 때에는 숙위하는 금군으로, 하번(下番)일 때에는 국방군으로 기능하도록 한 데 따른 조치였다.

조직 및 역할

1394년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정도전(鄭道傳)에 의해 시위 병력이 개편되었다. 의흥친군좌위(義興親軍左衛)는 의흥시위사(義興侍衛司)로 고치고, 우위는 충좌시위사(忠佐侍衛司), 응양위는 웅무시위사(雄武侍衛司)로 고쳤다. 금오위는 신무시위사(神武侍衛司)로 고쳐서, 1사(司)마다 중(中)·좌(左)·우(右)·전(前)·후(後)의 5영(領)을 두어 중군(中軍)에 속하게 하고, 좌위와 우위는 용양순위사(龍驤巡衛司)로 고쳤다. 신호위는 용기순위사(龍騎巡衛司)로 고치고, 흥위위는 용무순위사(龍武巡衛司)로 고쳐서 1사마다 또한 5영을 두어 좌군(左軍)에 속하게 하였다. 비순위는 호분순위사(虎賁巡衛司)로 고치고, 천우위는 호익순위사(虎翼巡衛司)로 고쳤다. 감문위는 호용순위사(虎勇巡衛司)로 고쳐서, 1사마다 또한 5영을 두어 우군(右軍)에 속하게 하였다. 우시위(右侍衛)와 순위(巡衛) 등 10사는 1사마다 인신(印信) 1과(顆)를 주조(鑄造)하여 주고, 도위(都尉)로 하여금 이를 맡게 하였다.

이후 1395년 서반(西班) 관제를 개정하면서 시위 체제가 재조정되었다. 의흥친군좌위를 의흥시위사로 하였고, 우위를 충좌시위사로 하였다. 응양위를 웅무시위사로 하고, 금오위를 신무시위사로 하였다. 좌우위(左右衛)는 용양순위사로 하고, 신호위를 용기순위사로 하였다. 흥위위를 용무순위사로 하고, 비순위를 호분순위사로 하였다. 또한 천우위를 호익순위사로 하고, 감문위를 호용순위사로 개편하였다.

태조대 개편되었던 시위 체제는 태종이 집권하면서 다시 변하였다. 1409년 태종의 근신(近臣)인 이숙번(李叔蕃)이 중군을 맡고, 조대림(趙大臨)은 좌군, 권규(權跬)는 우군을 맡아 3군(三軍)이 돌아가며 숙위하였다. 태종은 군정(軍政)이 여러 문(門)으로 갈린 것을 염려하여 시위 체제를 간략하게 개편하였다. 태종은 시위 체제의 개편을 통해 왕이 군령(軍令)을 좌우하는 체제를 만들고자 했다. 3군에 모두 시위사를 두어 1군마다 1사가 돌아가며 입직(入直)하게 하되, 각 군의 총제(摠制)가 매 군(軍)에서 두 사람씩 돌아가며 입직하게 하고, 첨총제(僉摠制)도 차례로 입직하게 하였다. 그리고 중군의 1사로 순위사를 삼아 의용순금사와 더불어 각각 2개의 번(番)으로 나누고 3일씩 서로 교대하며 순찰하게 했다. 또한 10사의 매 1사에 상호군(上護軍) 2명, 대호군(大護軍) 3명, 호군(護軍) 5명, 갑사 200명, 대장(隊長) 20명을 두었다. 3군(三軍)의 호령(號令)은 병조(兵曹)와 의흥부(議興府)에서 왕의 지휘를 받아 했으며, 위급한 때에는 의흥부에서 친히 왕의 명령에 따라 직문추우기(織紋騶虞旗)를 받아 궐문(闕門)에 세우고 각(角)을 불러 입번(入番) 총제와 각 위(衛)의 상호군·대호군·호군이 계엄(戒嚴)하게 했다. 의흥부에서 추우기 없이 명령을 내린 자나, 각 위의 상호군·대호군·호군이 그 군(軍)의 직문기를 보지 않고 명령에 달려간 자, 병조와 의흥부의 명문이 없이 사사로이 군사를 모은 자는 모두 반역을 꾀한 것으로 처리하였다. 이처럼 시위 체제의 개편을 통해 태종은 숙위군을 직접 통솔할 수 있었으며 용양순위사 등 6개 순위사를 시위사로 만들었다. 따라서 시위사는 태종이 궁궐과 신변의 시위 체제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만든 부서라고 볼 수 있다.

변천

시위사는 왕대별로 발생하던 정변(政變)과 반정(反正) 이후 재편되던 정치 구도에 따라 금군이 재정비되면서 기능이 약화되었다. 군영이 설치되고 5위 체제가 이름뿐이게 되면서 시위사도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성고이성무교원정년기념논총 간행위원회 편, 『조선시대의 과거와 벼슬』, 집문당, 2003.
  • 차문섭, 『조선시대 군사관계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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