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신(金友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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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24년(세종 6)∼1510년(중종 5) = 87세]. 조선 전기 성종(成宗)~중종(中宗) 때의 무신. 호조 참의(參議)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 등을 지냈다. 자는 대빙(待聘)이고, 시호는 호간(胡簡)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내자시(內資寺) 윤(尹)을 지낸 김해(金侅)이고, 어머니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관찰사(觀察使)성개(成槪)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개성유후(開城留後)를 지낸 김자지(金自知)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고려 때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낸 김도(金濤)이다. 성종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사부(師父)였으므로 특별한 은전을 받았다. 좌의정김안로(金安老)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성종~중종 시대 활동

1453년(단종 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여러 차례 대과(大科)에 실패하여 끝내 문과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세종(世宗) 때 형조 판서(判書)를 지낸 김자지의 손자라고 하여, 성종이 잠저에 있을 때 사부로 뽑혀 어린 성종에게 글을 가르쳤다.[『이요정집(二樂亭集)』 권13 「지중추부사김공신도비명(知中樞府事金公神道碑銘)」 이하 「김우신비명」으로 약칭]

1472년(성종 3) 어쩔 수 없이 무관으로 나가서 사옹원(司饔院)직장(直長)이 되었다가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으로 옮겼다. 1473년(성종 4) 연달아 부모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였다. 상복을 벗자, 종부시(宗簿寺)주부(主簿)로 임명되었다가 해주판관(海州判官)으로 나갔다. 1479년(성종 10) 군기시(軍器寺) 주부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통진현감(通津縣監)으로 나갔다.(『성종실록(成宗實錄)』 14년 11월 17일) 임기가 차기 전에 성종이 특별히 공조 정랑(正郞)으로 불러들였고, 1484년(성종 15) 다시 단양군수(丹陽郡守)로 나갔다. 이때 김우신이 종기를 앓자, 성종이 의약을 보내주어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성종실록』 15년 10월 11일),[「김우신비명」]

1491년(성종 22) 나이 68세 때 성종이 특별히 명하여 국가 재정의 요직인 호조 참의(參議)에 임명하여 2년 동안 국사의 논의에 활발히 참여하였다.(『성종실록』 22년 7월 5일) 그러나 1493년(성종 24) 나이 70세가 되어 김우신이 치사(致仕)하기를 청하였는데, 성종이 중추부 첨지사(僉知事)에 임명하여 한직에 머물게 하였다.(『성종실록』 24년 6월 27일),[「김우신비명」]

연산군(燕山君)이 왕위에 오른 후 김우신은 상호군(上護軍)으로 10여 년간 있었는데, 연산군이 양로연(養老宴)을 베풀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시켰다.[「김우신비명」]

<중종반정(中宗反正)> 직후인1506년(중종 1) 중종은 김우신이 성종의 옛날 신하라고 하여 특별히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승진시켰다.(『중종실록』 1년 10월 26일) 그리고 이듬해인 1507년(중종 2) 나이가 많은 고령자를 우대하면서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시켰고 중추부 지사에 임명하였다.[「김우신비명」]

1510년(중종 5) 2월 노병으로 서울 집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향년 87세였다.

성품과 일화

김우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은 청렴하고 간솔하였다. 행동은 자기 자신을 낮추고 의복을 아름답게 꾸미지 않았다. 가정에 식량이 여러 번 떨어져도 태연하였다. 벼슬살이할 때 청렴하고 신중하다고 소문이 났다.

김우신의 세 아들 김심(金諶)·김흔(金訢)·김전(金詮)은 모두 문과(文科)중시(重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줄줄이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김심·김흔·김전 3형제가 과거에 급제하고 아버지를 위하여 영친연(榮親宴)을 열려고 하자, 김우신이 사양하기를, “부귀영화는 내가 매우 두려워하는 바이다” 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만년에 이르러 명절이 되면 여러 아들들이 축수의 잔을 올렸다. 그때마다 김우신은 성대하게 친척들을 모아 놓고 하얀 수염과 머리털을 흩날리면서 젊었을 때와 다름없이 즐거워하면서 웃었으며, 손자들이 그를 모시고 죽 늘어섰다. 사람들이 부러워하기를, “이 세상에 보기 드문 일이다” 하였다.[「김우신비명」] 과거 시험에서 일찍이 아버지 김우신이 대과에 오르지 못한 한을 그 아들 3형제가 마침내 풀어주었던 셈이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호간이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목희리(木稀里)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좌의정신용개(申用漑)가 지은 비명(碑銘)김우신 이 남아있다.

부인 인천 이씨(仁川李氏)는 청풍군지사(淸風郡知事)이계충(李繼忠)의 딸인데, 자녀는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 김심은 문과에 급제하고 중시에 장원하여 중추부 지사를 지냈다. 차남 김흔은 진사시와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공조 참의(參議)를 지냈다. 3남 김전은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중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큰딸은 현감(縣監)오수정(吳壽禎)에게, 둘째 딸은 별제(別提)이종손(李終孫)에게 시집갔다. 측실 유씨(劉氏)는 장사랑(將仕郞)유기(劉奇)의 딸인데, 2남 2녀를 낳았다. 큰아들 김눌(金訥)은 사용(司勇)을 지냈고, 둘째 아들은 김침(金諃)이며, 큰딸은 참봉(參奉)남호(南譹)에게, 둘째 딸은 천문학(天文學) 훈도(訓導)김계흔(金啓昕)에게 시집갔다.[「김우신비명」]

연산군 때 김우신은 서자 김눌을 적자(嫡子)로 삼으려고 무척 노력하였다.(『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5년 2월 23일) 김심·김흔·김전 3형제는 자기들을 키워준 서모 유씨를 친어머니처럼 모셨는데, 유씨가 세상을 떠나자 3남 김전은 서모를 계모(繼母)처럼 받들었다. 그러므로 김우신이 서자 김눌을 적자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조정의 의논이 둘로 나누어져서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연산군은 대간(臺諫)의 주장대로 적서(嫡庶)를 구분하여 허락하지 않았다.(『연산군일기』 9년 6월 21일)

2남 김흔은 3남을 두었는데, 3남인 김안로의 아들 김희(金禧)가 중종(中宗)과 장경왕후(章敬王后) 사이에서 태어난 효혜공주(孝惠公主)와 결혼하였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안락당집(安樂堂集)』
  • 『용재집(容齋集)』
  • 『허백정집(虛白亭集)』
  • 『이요정집(二樂亭集)』
  • 『모재집(慕齋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용재총화(慵齋叢話)』
  • 『음애일기(陰崖日記)』
  • 『점필재집(佔畢齋集)』
  • 『해동야언(海東野言)』
  • 『희락당고(希樂堂稿)』
  • 『충재집(冲齋集)』
  • 『음애집(陰崖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