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도사목(治盜事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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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서울과 지방에서 발생한 도적을 단속하고 근절하기 위해 마련한 규정.

개설

조선시대 도적(盜賊)은 개별적인 절도(竊盜)·강도(强盜)에서부터 대규모로 집단화된 산적(山賊)·수적(水賊)·해적(海賊)·명화적(明火賊)까지 다양한 양상을 총칭한다. 나아가 조선의 지배층은 국가 체제와 사회 질서를 이탈해 도발하는 모든 저항 행위를 도적 혹은 적(賊)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 치도책(治盜策)은 단순한 도적에 대한 근절의 의미뿐 아니라 체제와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는 치안책(治安策)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조선시대 치안책은 포도(捕盜)·금도(禁盜)라는 명칭과 함께 다양하게 모색되었다. 특히 조선전기 치안책은 도적 단속을 위한 사목(事目)절목(節目)을 재정해 일정한 전형을 갖추는 데 주력하였다. 조선전기 빈번하게 재정되는 포도사목(捕盜事目)·포도절목(捕盜節目)·금도절목(禁盜節目) 등은 조정의 치안 정책이 변화·발전하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전기 중앙의 치도 활동은 형조(刑曹)·한성부(漢城府)·사헌부(司憲府)의 3법사와 순청(巡廳)·이문(里門)·경수소(警守所) 등의 방범 제도를 시행하였고, 지방은 방백(方伯)·수령(守令) 등 지방 행정관이 전담하였지만 단속에 역부족일 경우 경차관(敬差官)이 파견되었다. 이러한 치도 체계에도 불구하고 중앙과 지방에서 발흥하는 조직화되는 군도(群盜)를 단속하기 위해 세종~성종 연간 조정은 각종 치도사목을 마련하였다. 치도사목의 주요 내용은 전문적 치안 기구와 같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도적을 단속하자는 방안과 일반민의 감시 체계를 작동시키는 구포(購捕: 현상)를 활용하자는 방법 등이 제시되었다. 이렇듯 치도사목에 축적된 치안책은 마침내 중종(中宗)대 전문적 치안 기구인 포도청의 창설을 이루었다.

내용 및 변천

조선전기 치도사목은 주로 세종~성종 연간 작성되었다. 1435년(세종 17) 전(前) 형조(刑曹) 판서(判書)신개(申槩)가 치도 방안으로 오가인보(五家隣保: 오가작통)를 통한 야간 방범안과 포상을 내걸어 도적의 자수와 밀고를 권장하는 방안에 대한 포도사목을 작성해 올리기도 하였다. 같은 해 형조는 도적을 방비하는 조항을 마련하였다. 그 내용은 절도자를 국문할 때 신장(訊杖)의 횟수를 제한하지 않고, 죄인의 자수를 독려하고 고발자를 포상할 것과, 야간에 출입한 사람을 단속하는 내용을 제시하여 채택되었다.

한편 1468년(예종 즉위) 형조 판서 강희맹(姜希孟)이 치도사목(治盜事目)을 왕에게 바쳤다. 이 사목은 죄수의 자백 대신 증거에 의하여 처벌할 것, 도적에게 고신(拷訊: 고문)을 허락할 것, 절도자에게 경면(黥面: 문신을 새기는 형벌)을 할 것 등 매우 강도 높은 형벌 사용을 제시하였지만 채택되지 않았다. 또한 1469년(예종 1) 전라도(全羅道)와 경상도(慶尙道) 지역에 도적을 체포하기 위한 포도사목이 마련되었다. 이 사목에서는 도적이 극심한 경상도·전라도 지방에 중앙의 포도관(捕盜官)을 파견하는 방안과 파견된 포도관이 지방 수령과 공조하여 도적을 단속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사목은 조선시대 ‘포도관’이라는 명칭의 관리를 최초로 지방에 파견한다는 점에서 포도청 창설의 기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1472년(성종 3) 한성부(漢城府)의 금도절목(禁盜節目)이 마련되었다. 기존의 치도사목이 지방에 대한 치도책이 주류였다면, 이 절목은 서울이라는 특수 지역에 한정한 규정이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내용은 외방인의 도성 출입에 대한 제한, 여염(閭閻)의 순검(巡檢) 강화, 도성 내 빈집에 대한 관리, 장물에 대한 신고 등을 마련하여 도성 치안을 강화하였다. 또한 1481년(성종 12) 반포된 포도사목은 포도장(捕盜將)의 활용과 도성의 좌우(左右) 치안 체제를 도입하였다. 포도장은 포도청의 전신적 제도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 좌·우포도청의 도성 방치 체계의 토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성종대 조정이 도성의 안전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보다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치안 정책을 마련했음을 알 수 있다.

의의

조선전기에 마련된 치도사목은 『경국대전(經國大典)』 「형전(刑典)」 포도조가 마련되면서 정착되었고, 이후 치도 활동은 이상의 치도사목은 근거로 진행되었다. 또한 조선시대 치안 정책은 중종대 포도청이라는 전문적인 치도기관(治盜機關)이 설치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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