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수소(警守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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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야간 통행금지 위반자를 단속하기 위해 도성 내외에 설치한 경비 초소.

개설

경수소는 야간 통행금지 위반자를 단속하기 위해 도성 내외 여러 곳에 설치한 경비 초소로 통금 위반자를 일시적으로 유치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도성 안에는 87개소, 도성 밖에는 19개소 등 모두 106개소가 운영되었는데 체포된 사람은 장형에 처하였다. 다만 부득이하게 야간 통행을 한 경우는 정상을 참작하여 처벌을 하지 않기도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화재 예방과 도둑 방지를 위해 야간에 군사들이 도성을 순찰하였으나 모든 골목길을 다 순찰하기도 어렵고 숨은 도적을 잡기도 힘들어 요소에 파수처를 설치하고 병력을 두어 감시하게 하였다. 세종 때에 경수소 설치가 처음 논의되었으며 1436년(세종 18)에 경수소 설치와 병력 배치 및 순찰 규칙이 상세히 규정되었다(『세종실록』 18년 3월 2일).

조직 및 역할

경수소는 도성 안에 87개소, 도성 밖에 19개소 등 모두 106개소가 운영되었다. 경수소마다 군인과 지역 주민이 함께 근무하였으며, 건물은 각 부의 관리가 주민들을 시켜 관리하게 하였다. 경수소 근무 인원들은 경수첨(警守籤)이라 새긴 경첨(更籤)을 휴대하였으며 병조에서 내려준 군호를 받아 야간 통행 허가를 받지 않은 인원을 적발·체포하여 새벽까지 구금하였다. 통행금지로 체포되면 잡힌 시각에 따라 초경인 저녁 7시~9시와 5경인 새벽 3시~5시에는 10대, 2경인 밤 9시~11시와 4경인 새벽 1시~3시는 20대, 3경인 밤 11시~새벽 1시는 30대의 장형에 처해졌다. 뇌물을 받고 통행금지 위반자를 임의로 놓아준 자는 군법으로 논하였다. 긴급한 공무나 질병, 상사(喪事), 해산 등 부득이 야간에 다녀야 할 일이 있는 사람이 경수소에 사정을 알리면 초소 근무자는 함께 목적지까지 데려다준 후에 병조에 그 내용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변천

문종 때에 경수소마다 건장한 장정 5, 6인씩 두어 숙직하도록 하였으나(『문종실록』 즉위년 6월 7일), 경수소에 배치된 인원 중 지역 주민들은 노약자가 많아 도적을 만나도 잡지 못하고 오히려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에 1462년(세조 8)에 갑사·별시위(別侍衛)·파적위(破敵衛) 및 기보병 등을 경수소마다 2명씩 배치하고 지역 주민들과 함께 지키도록 하였다. 『경국대전』에는 정병 2인과 지역 주민 5인이 함께 경수소를 지키도록 확정되었다. 연산군 때에는 궁궐 파수를 강화하기 위하여 궁궐 주위에 추가로 설치되기도 하였고 명종 때에는 도적을 막기 위해 전국 각지의 요소에도 설치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과 좌·우포청에서 도성 수비와 순찰을 맡았다. 이와 아울러 초소를 중심으로 한 경계근무보다는 주기적인 순찰이 강화되었고 경수소의 숫자는 대폭 축소되어 16개만 운영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