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吏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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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육조의 하나이고, 종친(宗親)·문관(文官)의 인사와 봉군(封君)·봉작(封爵) 및 문관의 근무 성적을 사정하는 등의 일을 관장한 정2품 아문.

개설

이조는 조선 건국 초에, 고려 공양왕 때 전리사(典理司)를 이조로 개칭한 것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정착하였다. 그 뒤 1405년(태종 5)에 육조(六曹)가 정2품 아문으로 승격되고 서정(庶政) 및 정책 기관으로 정착될 때, 문반의 인사 전반을 관장하는 추요(樞要)의 관서로 정립되어 조선후기까지 운영되었다. 관원으로는 장관인 판서(判書)와 당상관인 참판(參判)·참의(參議), 낭관인 정랑(正郞)·좌랑(佐郞)이 있었고, 속사에는 문선사(文選司)·고훈사(考勳司)·고공사(考功司) 등이 있었다. 또 속아문에는 종부시(宗簿寺)·상서원(尙瑞院)·내시부(內侍府)·충익부(忠翊府)·사옹원(司饔院)·내수사(內需司) 등이 있었다.

이조는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문반의 인사를 관장하였고, 그에 따라 국정을 총관하는 의정부(議政府)비변사(備邊司) 다음으로 중요한 관서로 부각되면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또 판서를 비롯한 관원은 재식(才識)을 구비하고 본인과 조상에 허물이 없는 사람이 엄선되어 대개 승자(陞資)·승직(陞職)되었으며, 같은 품계에 해당하는 육조의 다른 관원보다 우월한 지위를 누렸다. 특히 조선중기 이후에 정랑과 좌랑은 전랑(銓郞)이라고 불렸는데, 후임자를 천거하고 삼사(三司) 등의 당하관 이하 인사를 주관하는 등 위세를 부리면서 청요직을 대표하는 관직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이조는 1392년(태조 1) 조선의 개창과 함께 설치되었다. 그 뒤 1405년(태종 5)에 태종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시행한 여러 정책들, 곧 의정부의 기능 약화 및 육조의 기능 강화 도모, 이를 위한 육조의 서정 분장(分掌) 등의 조치에 수반되어 정립되었다. 또한 장관을 정3품 전서(典書)에서 정2품 판서로 승격하여 제수하고 판서를 조정에 참여하게 하는 등 육조를 정2품 아문으로 격상하고 정책 기관으로 삼은 조치에도 힘입은 바 컸다. 태종은 또 곧이어 육조가 국정 운영을 주도하고 각 조가 정사를 원활히 수행할 수 있도록 속사제(屬司制)를 정비하고, 정3품 이하 100여 아문을 육조에 나누어 소속시키고 소속 조의 지휘를 받아 정무를 처리하게 하는 속아문제(屬衙門制)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판서와 참판으로 하여금 속아문의 제조(提調)를 겸대하여 해당 관아의 정사를 지휘하고 관원의 인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그에 따라 이조는 문반의 인사 등을 주관하면서 육조의 다른 기관과 함께, 조선전기에는 의정부, 조선후기에는 비변사와 더불어 국정 운영의 중심이 되는 정책·정무 기관으로 기능하였다.

조직 및 역할

이조는 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와 더불어, 조에 편제된 세 속사(屬司)를 주관하면서 직장(職掌)으로 규정된 ‘문선·훈봉·고과 등에 관한 정사’를 관장하여 국가의 통치를 뒷받침하였다. 관원으로는 1434년(세종 16)에는 정2품 판서 1명, 종2품 참판 1명, 정3품 당상 참의 1명, 정5품 정랑 3명, 정6품 좌랑 3명이 있었는데, 이후 1741년(영조 17)에 정랑·좌랑 각 1직이 삭감되었다.

이조의 속사에는 1405년(태종 5)에 설치된 문선사·고훈사·고공사 등이 있는데, 이조의 주요 업무인 문선·훈봉·고과를 각각 분장하였다. 그 후 관제 정비 등을 거치면서 문선사는 종친·문관·잡직·승직을 제수하는 등의 일을, 고훈사는 종친·재상·공신의 책봉과 추증에 관한 일을, 고공사는 문관의 공로와 과실 및 근면과 태만 등을 사정(査定)하는 일을 각각 관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장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법제화되었고, 이후 이조가 폐지될 때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속아문 역시 1405년에 육조속아문(六曹屬衙門) 제도를 실시할 때 그 관아의 업무가 이조의 정사와 관련되는, 승녕부(承寧府)·공안부(恭安府)·종부시·인녕부(仁寧府)·상서사(尙瑞司)·사선서(司膳署)·내시부·공신도감(功臣都監)·내시원(內侍院)·다방(茶房)·사옹방(司饔房) 등을 소속시키면서 정착되었다. 이후 관제의 정비 및 경비 절약 등을 목적으로 실시한 관아의 혁파·설치·소속 조의 변경 등에 따라 몇 차례 변천을 겪은 뒤, 『경국대전』에 종부시·상서원·내시부·충익부·사옹원·내수사로 법제화되었다. 그 뒤 종부시가 종친부(宗親府)에 합병되고 충익부가 혁거되었으나,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에 따른 근대적 관제 개혁으로 의정부 이하 모든 관아가 크게 의정부·궁내부(宮內府)와 그 소속 아문으로 개편되면서 소멸될 때까지 큰 변동 없이 계승되었다.

이조의 정사는, 이조의 업무와 속사의 돌발사·중대사의 경우 판서·참판·참의가 속사를 지휘하면서 처리하였으나, 일상사는 속사에 편제된 정랑과 좌랑이 속사를 중심으로 처리하였다. 속아문을 각 조에 소속시켜 그 지휘를 받게 한 것은 국가의 모든 관아와 관원을 육조와 소수의 당상관을 매개로 왕에게 예속시키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따라서 속아문에서는 업무를 대부분 자율적으로 처리하였고, 중대사·돌발사의 경우 또는 기능이 중시된 일부 속아문에 한하여 겸관 및 조와 협의하여 업무를 수행하였다.

한편 이조는 의정이나 찬성 등이 판이조사(判吏曹事)를 겸하면서 인사에 간여하였기 때문에 인사권 행사에 침해를 받기도 하였지만, 판서 등은 비변사제조 등의 겸직을 통해 국정 전반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또 16세기~18세기에 왕과 사림이 대신의 권력행사 견제와 관련되어, 정랑과 좌랑이 후임자를 천거하는 전랑자대제(銓郞自代制)와, 삼사 등의 당하관 이하 관원을 선발하는 통청권(通淸權)을 지니게 됨에 따라 판서 이하 당상관의 인사권 행사가 제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판서를 비롯한 이조의 관원은 모두가 학식과 경륜이 있고 조상과 본인에게 허물이 없는 자가 제수되어 대개 승자·승직되는 등, 의정부 관직과 더불어 같은 품계의 관직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를 누렸다.

변천

이조는 1405년(태종 5)에 정2품 정책·서무 분장 관아로 정착된 육조의 다른 기관과 함께 그대로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고, 이후 후대로 계승되었다. 그러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에 수반된 근대적 관제 개혁에 따라 육조가 내무(內務)·외무(外務)·탁지(度支)·군무(軍務)·법무(法務)·학무(學務)·공무(公務)·농상(農商) 등의 8아문으로 개편될 때 그 업무를 내무아문으로 이관하고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반윤홍, 『조선시대 비변사 연구』, 경인문화사, 2003.
  • 최이돈, 『조선중기 사림정치구조연구』, 일조각, 1994.
  • 한충희, 『조선초기 육조와 통치체계』, 계명대학교출판부, 1998.
  • 한충희, 「조선초기 육조참의연구」, 『한국학논집』23, 1996.
  • 한충희, 「조선초기 의정부연구」상, 하 , 『한국사연구』31, 32, 1980, 1981.
  • 한충희, 「조선초기 판이·병조사연구」, 『한국학논집』11,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