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평(尹熙平)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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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윤희평 |
한글표제 | 윤희평 |
한자표제 | 尹熙平 |
분야 | 인물 |
유형 | 정치·행정가/관료/무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연산군~중종 |
집필자 | 이기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윤희평(尹熙平)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중종실록』 1년 9월 8일, 『중종실록』 5년 6월 5일, 『중종실록』 6년 4월 4일, 『중종실록』 7년 5월 5일, 『중종실록』 7년 5월 19일, 『중종실록』 9년 1월 23일, 『중종실록』 11년 7월 13일, 『중종실록』 12년 5월 15일, 『중종실록』 13년 1월 19일, 『중종실록』 14년 6월 12일, 『중종실록』 14년 9월 2일, 『중종실록』 14년 9월 3일, 『중종실록』 18년 6월 14일, 『중종실록』 21년 8월 15일, 『중종실록』 23년 1월 29일, 『중종실록』 27년 8월 14일, 『중종실록』 28년 8월 4일, 『중종실록』 31년 8월 25일, 『중종실록』 33년 6월 2일, 『중종실록』 33년 2월 21일, 『중종실록』 33년 2월 22일, 『인종실록』 1년 윤1월 4일, 『중종실록』 21년 6월 19일, 『인종실록』 1년 윤1월 4일, 『중종실록』 33년 6월 2일, 『중종실록』 24년 5월 4일 |
총론
[1469년(예종 1)∼1545년(인종 1) = 77세]. 조선 중기 연산군(燕山君)~중종(中宗) 때의 무신. 공조 판서(判書)와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 등을 지냈다. 자는 사신(士愼)이고, 호는 수양세가(首陽世家), 황락거사(黃落居士), 또는 갈옹(鶡翁)이다. 봉작은 해양군(海陽君)이며, 시호는 양간(襄簡)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중추원 부사(副使)윤길생(尹吉生)이고, 어머니는 경주 김씨(慶州金氏)이다. 친할아버지는 중추원 지사를 지낸 윤중부(尹重富)이고, 양할아버지는 명(明)나라에서 선종(宣宗) 때 환관을 지낸 태감(太監)윤봉(尹鳳)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경창부윤(慶昌府尹)을 지낸 윤신(尹信)이다. 문무를 겸비한 9척 거구의 명장(名將)으로서 남왜북로(南倭北虜)를 막는 데 공을 세웠다. 우의정김극성(金克成), 병마사(兵馬使)김석철(金石哲)과 절친한 사이였다.
성종~연산군 시대 활동
윤희평(尹熙平)이 소년이었을 때 성종(成宗)이 오랑캐를 정벌하기 위하여 장차 원수(元帥)가 될 만한 소년들을 뽑아서 양성하였는데, 키가 크고 힘이 세었으므로 그 선발에 나가 뽑혔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권31 「尹熙平碑銘(윤희평비명)」 이하 「윤희평비명」으로 약칭] 1491년(성종 22) 정북(征北) 원수(元帥)허종(許琮)과 정북 부원수(副元帥)이계동(李季仝)이 여진족 우디케를 정벌할 때 23세의 윤희평을 불러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그때 허종이 그 용기와 지략을 시험해 보고 감탄하여 자신의 갑옷을 벗어 그에게 입혀주고 말하기를, “후일에 네가 당연히 원수가 될 것이다.” 하였다.
1495년(연산군 1) 27세가 되었는데, 무과(武科)에 제 2등으로 합격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다가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3년 동안 양주(楊州)황락산(黃落山)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때 그는 양주의 선산(先山) 아래 초막(草幕)에 있을 때에는 자신의 호를 ‘황락거사(黃落居士)’라고 불렀으나, 아버지가 계시는 고향 해주의 수양산(首陽山)의 본가에 가서 있을 때에는 사람들이 그의 집을 ‘수양세가(首陽世家)’라고 불렀다. ‘수양세가’란 해주수양산 기슭에 있는 명문 세도가라는 뜻인데, 그의 양할아버지 윤봉이 세종(世宗) 때 명나라의 칙사(勅使)로 조선에 와서 그의 친할아버지 윤중부의 집을 지어달라고 요구하였고, 이에 세종이 관리를 보내어 수양산 기슭에 터를 잡아 고대광실(高臺廣室) 큰 집을 지어주었다.
양할아버지 윤봉은 어릴 때 명나라에 화자(火者)로 뽑혀 들어가서 명나라 궁중의 환관이 되었는데, 어린 선종을 업어 키운 공로로 환관의 우두머리인 태감(太監)으로 임명되었다. 또 칙사로서 윤봉을 자주 조선에 보냈다. 칙사 윤봉은 조선에 오면 반드시 동생 윤중부의 집을 방문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종에게 그의 동생 윤중부에게 벼슬을 주도록 요구하였으므로, 윤중부는 중추부 지사에 임명되었다. 한편 세종은 윤봉을 통하여 명나라 선종에게 세공(歲貢)에서 금은을 면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윤봉의 노력으로 마침내 금은의 면공(免貢)이 이루어졌다. 당시 해주 윤씨(海州尹氏)의 집안 친척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윤봉과 윤중부를 통하여 벼슬을 얻으려고 하는 자가 많았으나, 세종은 이를 묵인하여 주었다. 그러므로 윤중부의 집안은 벼슬을 청탁하는 사람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윤중부의 집을 ‘수양세가’라고 불렀다. 그리고 손자인 윤희평도 이를 자호(自號)로써 사용하였던 것이다.
1498년(연산군 3) 윤희평은 상복을 벗고 나서, 다시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다.[「윤희평비명」] 1502년(연산군 8) 회령판관(會寧判官)에 임명되었는데, 그는 이징옥(李澄玉)처럼 활을 잘 쏘고 말을 잘 탔기 때문에 번호(藩胡)의 오랑캐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복종하였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제주목사(濟州牧使)김율(金硉)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제주도로 갔다. 그런데 그때 제주도에 변고가 생겨 사람마다 조정에서 보낸 관리들에게 의구심을 가졌으나, 그가 김율을 도와서 제주도 사람들을 무마하고 사건 처리를 잘 하여 민심이 안정되었다. 얼마 후 목사김율이 갑자기 돌아가서, 그도 제주도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중종 시대 활동
1505년 박원종(朴元宗) 등 무신들이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일으킬 때 윤희평은 그의 친구 신윤무(辛允武) 형제의 권유에 따라 쿠데타에 참여하여, 마침내 연산군을 몰아냈다. 그리고 그 동생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왕으로 세웠는데, 그가 바로 종종이다. 반정 공신을 책봉할 때 윤희평은 그의 친구 김극성과 함께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책훈(策勳)되었고, 품계도 초자(超資)하여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된 후 경흥부사(慶興府使)에 임명되었다.(『중종실록』 1년 9월 8일),[「윤희평비명」]
1510년(중종 5) 4월 왜구가 <삼포왜란(三浦倭亂)>을 일으키자, 영의정유순정(柳順汀)이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그를 불러 종사관으로 삼았다. 3포(浦)의 왜구를 토벌하는 계책을 의논할 때 그가 수립한 계책에 따라 왜구의 소란을 진압하였다. 그 공으로 유순정의 추천을 받아 그는 병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다가, 1511년(중종 6)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중종실록』 5년 6월 5일),(『중종실록』 6년 4월 4일) 무관이 승지에 임명되기가 어려운데, 윤희평은 문무를 겸전하였다고 특별히 임명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중종이 갑자기 시종(侍從)의 신하들에게 시를 지으라고 명하였는데, 그가 즉석에서 지은 시가 많은 문관들을 제치고 2등을 차지하였으므로, 중종이 상으로 물품을 하사하였다.[「윤희평비명」]
1512년(중종 7)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어, 함경북도절도사(咸鏡北道節度使)에 임명되고 해양군에 봉해졌다.(『중종실록』 7년 5월 5일) 그때 윤희평이 우림위(羽林衛)선육(宣陸)을 북도별군관(北道別軍官)으로 데리고 갔는데, 선육이 부방(赴防)하는 기간을 어겨 조정에서 그 죄를 이미 결정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윤희평이 데리고 갔다고 하여, 사헌부(司憲府)에서 윤희평을 탄핵하였다.(『중종실록』 7년 5월 19일) 그러자 중종이 장(杖) 80대를 속(贖)바치게 하고, 말하기를. “윤희평의 일은 재상들이 ‘북방의 직임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 없다.’ 하므로, 그 죄를 감해주는 것이다.” 하였다. 이후 윤희평은 선육과 함께 두만강 유역의 번호를 무육(撫育)하고, 5진(鎭)의 성보(城堡)를 다시 수축하였으므로, 여진족의 대소 추장들이 모두 귀순하였다.[「윤희평비명」] 1514년(중종 9) 경상우도병마사(慶尙右道兵馬使)에 임명되었는데, 삼포왜란의 상처가 회복되지 않았으므로, 그가 조정에 건의하여 3포에 5년 동안 세금을 감면해 주도록 하였다.(『중종실록』 9년 1월 23일) 이에 3포에 거주하는 백성들과 항거왜인(恒居倭人 : 항구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모두 기뻐하였다.[「윤희평비명」]
1516년(중종 11) 중추부 동지사(同知事)가 되었다가, 성절사(聖節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황제의 생일을 하례하고 돌아왔다.(『중종실록』 11년 7월 13일) 그때 명나라의 환관 태감이었던 양할아버지 윤봉의 유적을 찾아보았으나, 50여 년이나 지나서 아무 것도 없었다. 환관 태감윤봉은 살아 있을 때 양아들인 윤희평의 아버지 윤길생을 만나보고자 하였으므로, 1466년(세조 12) 4월 세조(世祖)가 중추부 동지사윤길생을 사은사(謝恩使)에 임명하여 명나라에 가서 윤봉을 만나도록 하였다. 윤봉은 세조가 왕위에 오를 때 명나라의 책봉을 얻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때 윤봉은 세조에게 해주를 서흥도호부(瑞興都護府)로 승격시키고, 해주 윤씨의 본관을 서흥으로 해 달라고 청하여 세조의 허락을 얻었다. 그러므로 해주 윤씨를 서흥 윤씨(瑞興尹氏)라고도 한다.
1517년(중종 12) 윤희평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공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고, 1518년(중종 13) 병조 참판(參判)으로 옮겼다가, 1519년(중종 14) 평안도절도사(平安道節度使)로 나갔다.(『중종실록』 12년 5월 15일),(『중종실록』 13년 1월 19일),(『중종실록』 14년 6월 12일),[「윤희평비명」] 그해 8월 성절사의 호송군(護送軍)이 요동(遼東)에서 돌아오다가 오랑캐 군사 1천여 명과 맞닥뜨려서, 우리 군사 10여 명과 말 30여 필이 여진족에게 사로잡혔다. 윤희평은 당초에 오랑캐 군사가 동팔참(東八站)에 머물고 있는지를 정탐하지 않았고, 또 오랑캐 군사를 추격하여 요격하지 않았다고 하여, 의주목사(義州牧使)권승(權勝)과 함께 탄핵을 받았으나, 영의정정광필(鄭光弼)이 변호하여 무사하였다.(『중종실록』 14년 9월 2일),(『중종실록』 14년 9월 3일) 그때 사림파(士林派)의 조광조(趙光祖)가 위훈(僞勳)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정국공신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76명의 공훈이 삭제되었는데, 윤희평도 이에 포함되었다. 그런 가운데 그해 11월 15일 훈구파 남곤(南袞)과 홍경주(洪景舟) 등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조광조・김구(金絿)・김식(金湜) 등의 사림파를 타도하면서 정국공신의 위호(位號)를 되찾았다.
1523년(중종 18) 경상좌도절도사(慶尙左道節度使)로 나갔다가, 1526년(중종 21)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옮겼다.(『중종실록』 18년 6월 14일),(『중종실록』 21년 8월 15일) 1528년(중종 23) 함경남도병마사(咸鏡南道兵馬使)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오랑캐 군사가 변방을 침범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중종실록』 23년 1월 29일) 그리하여 그는 두만강 유역의 진보(鎭堡)를 점검하고, 5진을 중심으로 주변의 진보를 3군(軍)・5군 체제로 편입하여 오랑캐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번호의 오랑캐들이 이를 지켜보고 감히 내지(內地) 여진족을 끌어들여 침입하지 못하였다.[「윤희평비명」] 1532년(중종 27)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되었다가, 1533년(중종 28) 우변포도대장(右邊捕盜大將)에 임명되어 서울 도성의 서편 지역 치안을 담당하였다.(『중종실록』 27년 8월 14일),(『중종실록』 28년 8월 4일) 1536년(중종 31)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갔으나, 나이가 많다고 사양하고 돌아왔다.(『중종실록』 31년 8월 25일)
1537년(중종 32)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천하지도(天下地圖)』라는 세계지도를 전해주었는데, 훼손된 부분이 많았다. 중종이 해양군윤희평과 좌의정홍언필(洪彦弼)에게 명하여 이를 교정하여 보완하게 하였다. 윤희평이 이를 도맡아서 정밀하게 교정하고 보완하여, 『명일통지(大明一統志)』지리도(地理圖)와 함께 입계(入啓)하니, 중종이 가상히 여겼다.(『중종실록』 33년 6월 2일),[「윤희평비명」] 『천하지도』는 중국 중심의 세계 지도였는데, 만주의 오랑캐 마을이 표시되어 있어서 중요하였다. 당시 명나라는 만주에 건주위(建州衛) 3위를 두고 지배하였으므로, 여진족 마을의 위치는 조선의 군사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원래 지리서에 관심이 많았던 윤희평은 『천하지도』를 바탕으로 군사상 필요한 작전 지도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1538년(중종 33) 중종이 윤희평을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하여, 공조 판서에 특별히 임명하였다.(『중종실록』 33년 2월 21일),[「윤희평비명」] 이때 사간원(司諫院)에서 탄핵하기를, “공조 판서윤희평은 성격이 거칠고 물정에 어두운 무부(武夫)인데, 이번 특명은 반드시 장수를 중하게 여긴 것이지만, 이와 같은 사람이 외람되게 높은 벼슬에 오르면 조정의 위신이 추락될 것입니다.” 하니, 중종이 대답하기를, “윤희평은 무반(武班) 중에 으뜸인데다가 글을 잘 알고 있다. 육경(六卿)은 경중이 없다고 하나, 공조 판서는 제일 한가한 자리이므로 괜찮을 것이다.” 하였다.(『중종실록』 33년 2월 22일) 1540년(중종 35) 중추부 지사로 전직되자, 그는 병법(兵法)을 연구하여 진법(陳法)을 만들어 왕에게 바쳤다.[「윤희평비명」] 중종은 경회루(慶會樓) 아래로 나와서 여러 장수들이 윤희평의 진법(陳法)에 따라 군사를 배치하여 훈련하는 것을 사열하기도 하였다. 그때 그가 구군팔진(九軍八陣)과 육화육변(六花六變), 십이장진도(十二將陣圖)를 그려 왕에게 바치니, 중종이 술을 하사하고 그를 칭찬하였다.[「윤희평비명」]
1544년(인종 즉위년) 11월 중종이 승하하자, 윤희평은 너무 슬퍼하다가 병이 나서 석 달 뒤인 1545년(인종 1) 윤1월 4일 서울 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77세였다.(『인종실록』 1년 윤1월 4일),[「윤희평비명」]
성품과 일화
성품이 청렴하고 검소하며 도량이 넓고 컸으며, 뜻이 확고하고 행동이 관대하였다. 신장이 9척이고 활 쏘고 말 타는 힘이 늙도록 쇠약하지 않았다. 친족들과 항상 화목하고 친구들을 후하게 대하였다.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남의 뇌물을 받지 않았고, 권력자의 집을 찾아가지 않았다. 항상 문신(文臣)처럼 여러 서적들을 널리 보았는데, 특히 지리와 병법에 정통하였다. 역대 산천의 형세에 밝았는가 하면, 여러 나라의 연혁과 오랑캐 마을, 풍토, 습속에 이르기까지 훤히 꿰뚫지 않은 것이 없었다.
1526년(중종 21) 6월 승정원에서 중종에게 급히 아뢰기를, “오위(五衛)의 대장 윤희평이 큰 호랑이를 잡았다고 합니다.” 하니, 왕이 놀라워하면서 그의 이름을 호방(虎榜)에 새기도록 명하였다.(『중종실록』 21년 6월 19일) 그는 호랑이를 잡은 무사로서 길이 역사에 남을 만큼 용감한 무인이었으나, 학을 기르고 팔색조를 사랑하며 시를 쓰고 책을 읽는 문인의 기품도 가지고 있었다.
1523년(중종 18) 경상좌도병마사로 나갔을 때 적체된 폐단을 모두 없애자, 병사와 백성이 안정되었다. 윤희평은 군영(軍營)에서 항상 학을 기르면서 이를 완상하였고, 책을 읽으면서 즐기니, 마치 담담한 일개 서생(書生)과 같았다. 윤희평은 벼슬하면서도 고향 해주의 수양산 자락에 있는 본가에도 자주 들렸고, 또 부모가 묻힌 양주의 황락산(黃落山) 아래 초려(草廬)에도 가끔 머물면서 영조(靈鳥)인 팔색조(八色鳥)를 몹시 사랑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호를 수양세가·황락거사, 또는 팔색조 같은 늙은이라는 뜻이 갈옹이라고 불렀던 것이다.[「윤희평비명」]
그의 졸기(卒記)에서 사평(史評)을 보면, “윤희평은 무인(武人)이지만 글 읽기와 시 짓기를 좋아하였고, 만년에는 늙었다고 핑계대고 직무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읽기만을 즐겼다.”고 한다.(『인종실록』 1년 윤1월 4일) 1511년(중종 6) 윤희평이 승정원 동부승지로 있을 때 어느 날 중종이 시종(侍從)하는 모든 관원들에게 시를 지으라고 명하였는데, 그의 작품이 제 2등을 차지하였으므로, 중종이 물품을 상으로 주었다.[「윤희평비명」] 그때 지은 시를 사람들이 잘 지었다며 애송(愛誦)하였다.[『청강선생후청쇄어(淸江先生鯸鯖瑣語)』]
1538년(중종 33) 6월 윤희평이 『천하지도』를 가지고『대명일통지』지리도와 함께 입계하기를, “변경 밖의 오랑캐 마을이 모두 본 천하지도에 실려 있으나, 신이 아직 상세히 보지를 못하였습니다. 주상께서 보시더라도 자세히 알지 못할 것 같으므로, 대강만을 채록하여 서계(書啓)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조선 지도를 대략 바다 모퉁이 안에 넣은 것은 중국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신이 조선 8도의 대강을 차례로 기록했습니다. 거기에 영파부(寧波府) 정해현(定海縣)이란 곧 예전의 명주(明州)인데, 남송(南宋) 때 우리나라에서 조공을 바치러 가는 자가 바닷길로 가면 반드시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본문 밑에 아울러 기록한 명나라의 13포정사(布政司)는 명나라의 지방 제도입니다. 본 지도에서는 포정사에 예속된 명나라 군현(郡縣)의 숫자만을 쓰고 그 군현의 이름은 쓰지 아니하여 불명확하므로, 신이 그 군현의 이름을 다 써 넣었습니다. 그리고 신의 집에 소장하고 있는 지도는 조금 자세하나 이 지도는 잘못된 곳이 많으므로, 신이 좌의정홍언필과 같이 의논하여 넣을 것은 넣고 뺄 것은 빼어서 서계하는 바입니다.” 하니, 중종이 대답하기를, “알았다”고 하였다.(『중종실록』 33년 6월 2일)
묘소와 후손
시호는 양간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황락산의 선영에 있고, 성세창(成世昌)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윤희평비명」] 좌의정성세창은 성현(成俔)의 아들로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되었을 때 함경남도병마사윤희평과 함께 5월에 밀림이 우거진 마천령 고개를 넘어서 행영(行營)을 옮겨 설치할 곳을 같이 순심(巡審)하였다.(『중종실록』 24년 5월 4일)
첫째 부인 고령 박씨(高靈朴氏)는 후사 없이 일찍 죽었고, 둘째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문숙공(文肅公)윤관(尹瓘)의 후손으로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 1자는 청풍군수(淸風郡守)를 지냈고, 1녀는 사헌부 감찰(監察)신호(申灝)에게 시집갔다.[「윤희평비명」] 손자 윤의로(尹毅老)는 통례원(通禮院) 좌통례(左通禮)를 지냈다. 서출 자식으로는 2남 1녀가 있는데, 1자는 윤추(尹貙)이고, 2자는 윤석(尹澤豸)이며, 1녀는 종실(宗室) 벽계수(碧溪守)이종숙(李終叔)의 처이다.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청강선생후청쇄어(淸江先生鯸鯖瑣語)』
- 『우정집(憂亭集)』
- 『충재집(冲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