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藩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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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두만강 북쪽 변경에 널리 퍼져 살면서 복속한 야인.

개설

조선은 개국 초기부터 여진(女眞) 대책에 관심을 쏟았다. 세종은 두만강 유역을 개척하고 육진을 설치하여 조선의 강역을 확대하였다. 육진 중에서 오진(五鎭)의 성 아래에 여진족들을 거주하도록 하고, 이들을 조선의 울타리, 즉 번리(藩籬)로 삼았다. 조선 조정은 번리의 경제적 요구를 충족시켜 주고 그들로부터 다른 부족의 정보를 입수하는 방어책을 수립하였다. 번리가 점차 늘어나자 중심 부락이 형성되면서 번호로 발전해 나갔다. 선조대에 이르면 여진 사회는 농경 발달과 정착 마을의 확대로 점차 성장해 조선의 회유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마침내 누르하치가 만주 전역의 여진족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번호는 건주여진에 정복·흡수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5세기의 여진 사회는 조선보다 발전 단계가 낮았다. 조선과 관계하였던 종족별로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농사와 유목을 겸하는 반농반목(半農半牧)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여진의 사회경제적 요구와 조선의 두만강 유역의 번리화 정책이 일치하면서, 육진 중에서 부령(富寧)을 제외한 오진의 성 아래에 야인들을 거주하도록 하였다. 이들이 이른바 성저야인(城底野人)이었다. 성저야인은 오진의 울타리가 되어 조선 조정에 다른 부족의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번리가 생겨난 것이었다. 이에 조선 조정은 그들의 경제적 요구에 따라 곡식·토지·생필품 외에도 성(姓)을 하사하고 관직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조선은 이들을 북방 방어의 1차 방어선으로 활용해 변경 대책을 수립해 나갔다.

조선중기가 되면서 여진 사회에도 농경이 발달해 정착 마을이 광범위하게 늘어나고 명종대부터 번호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번호는 조선에 복속한 번리가 부락을 이루어 내지의 강력한 올적합(兀狄哈)족의 침입을 막아 주는 울타리 역할을 하던 변경 여진족이었다. 두만강 일대는 점차 올량합(兀良哈)족을 중심으로 번호 부락이 모여들어 성장해 갔다.

조직 및 역할

조선은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 정책에 차별을 두었다. 압록강 유역은 명나라 및 건주여진과 인접해 있었으므로, 강외(江外)의 여진족에게까지 조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는 어려웠다. 두만강 유역은 상대적으로 명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으며, 건주여진에 비하여 분열되어 있었다. 조선은 변경을 방어할 울타리가 필요하였다. 압록강 유역은 변경의 울타리가 되는 번리 구축이 쉽지 않았다. 조선은 가까운 두만강 유역의 여진을 회유해 번리를 구축하였는데, 이들이 나중에 번호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변천

중종 이후, 번호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어 번호들의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 1583년(선조 16)에 일어난 니탕개(尼湯介)의 난은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조선은 반란을 일으키는 번호 부락을 토벌하여 이들의 이탈을 막고자 하였다.

두만강 일대의 조선 번호들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누르하치의 정복전쟁에 따라 건주여진으로 급속히 복속되어 갔다. 복속을 거부하는 번호들은 조선의 내지로 이주하기를 희망하였으나, 조선 조정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이 대거 내지 이주는 조선 사회의 불안과 건주여진과의 갈등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15세기에 두만강 중하류에서 조선의 동북 변경 방어체제의 일환으로 기능하였던 번호는 건주여진에 흡수되었다.

참고문헌

  • 『제승방략(制勝方略)』
  • 한성주, 『조선전기 수직여진인 연구』, 경인문화사, 2011.
  • 김순남, 「조선전기 5진 번호 동향의 추이」, 『역사와 실학』 46, 2011.
  • 서병국, 「조선전기 대여진관계사」, 『사총』 14, 1990.
  • 한성주, 「조선전기 두만강유역에 나타나는 두 개의 ‘조선’」, 『명청사연구』 37,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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