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저야인(城底野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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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육진을 개척한 다음 오진의 성(城) 아래에 거주시키고 조선의 울타리로 삼은 야인.

개설

1449년(세종 31)에 조선은 동북방 두만강 유역에 회령·온성·종성·경원·경흥의 오진(五鎭)을 설치하고 내륙의 부령(富寧)에도 진을 설치해 육진 체제를 갖추었다. 육진의 설치는 야인의 침입에 대비한 적극적인 방어책이었다.

육진의 설치로 야인 대책이 갖추어졌다고 하더라도, 야인과 충돌을 피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이에 조선은 부령을 제외한 오진의 성 아래에 야인들을 거주하게 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물품을 제공해 주는 대신에 다른 야인들의 정보를 얻었다. 이들을 성저야인이라고 불렀다. 번리(藩籬)라고도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세종은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조선의 강역을 개척하고 사대교린정책을 완성하였다. 1433년(세종 15)에 들어 건주위여진 내부에 세력 변화가 일어났다. 부족 내부의 충돌로 오도리족의 근거지가 불타고, 오도리족의 다수가 우디거에게 사로잡히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세종은 이 시기를 동북면 개척의 기회라고 판단해, 1448년(세종 30)까지 김종서(金宗瑞)·이징옥(李澄玉) 등을 파견해 동북면 일대를 개척하고 육진을 설치하였다. 나아가 조선 조정은 두만강 유역의 번리화 정책을 통하여 야인족들을 조선의 변방 방어 울타리인 번병(藩屛) 삼았다.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육진 개척은 국토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여진족의 입장에서는 거주지의 상실이었다. 조선으로서는 그들의 불만을 달래 주어야만 하였다. 이에 조선은 그들의 요청에 따라 필요한 물자를 공급해 주는 대신, 그들은 성 아래 거주하면서 북방의 다른 야인 종족들의 동향을 탐지해 조선에 보고하도록 했다.

조직 및 역할

조선은 이들 성저야인들의 보고를 통하여 나머지 야인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침략에 대한 대비책을 세울 수 있었다. 성저야인들은 한양으로 올라와 숙배(肅拜)하고 물자와 더불어 관직을 받기도 하였다. 나아가 조선 왕은 그들에게 성(姓)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세조 집권 시기 이후 성저야인들은 점차 조선의 번리가 되어갔다. 동시에 성저야인 사회가 발전하면서, 조선에 대한 요구도 증가하였다. 그들의 요구는 점차 조선이 수용할 수 없는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변천

세종 시기까지 성저야인은 조선의 의도대로 번병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세조 시기에 들어오면 커진 세력을 기반으로 배반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성저야인들의 이러한 움직임에 조선은 강경 조치로 응징하였다. 1459년(세조 5) 모련위(毛憐衛)의 번호인 낭발아한(浪孛兒罕)이 조선에 반기를 들자, 군대를 보내 그들 부자를 참수한 사건이 한 예이다. 1460년(세조 6)에 단행된 모련위의 낭발아한 정벌에 일부 성저야인들이 조선군을 따라 종군하기도 하였다.

성종대에 들어와서도 성저야인들의 동요는 지속되었고, 조선 역시 강경책으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중종 시기 이후로는 성저야인 사회에 인구가 증가하고 사회경제적 기반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반란도 서슴지 않았다.

참고문헌

  • 한성주, 『조선전기 수직여진인 연구』, 경인문화사, 2011.
  • 김순남, 「조선전기 5진 번호 동향의 추이」, 『역사와 실학』 46, 2011.
  • 류봉영, 「왕조실록에 나타난 이조전기의 야인」, 『백산학보』 14, 1973.
  • 서병국, 「조선전기 대여진관계사」, 『사총』 14, 1990.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