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영(行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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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시대 지방관이나 장수가 임시로 거처하던 관청과 군영.

개설

‘행’은 임시라는 의미로 군영은 군대의 이동에 따라 행영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지방관이 한 지역에 장기로 거주하지 않고 특정 지역을 순회하면서 거주하는 지역도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순회 거주하는 북변 국경의 사군(四郡)·육진(六鎭) 같은 곳이다. 이런 지역의 관청을 행영이라고 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시대의 안찰사는 상주하는 관청이 없고 도를 순회하며 통치했고, 변방에 긴급상황이 발생하면 병마사를 파견하여 군사업무를 총괄하였다. 조선초기에도 감영 소재지가 정해지지 않고 관찰사가 순회하였다. 이때 안찰사, 병마사, 관찰사가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요속과 함께 거처할 공간이 있어야 했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 행영이 설치되고 운영되었다. 조선에서는 관찰사와 관련된 행영 이외에도 변방의 방어, 중앙의 군사지휘 등과 관련된 행영이 있었다.

관찰사가 머물던 행영은 도마다 감영 소재지가 정해지면서 행영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러나 군영과 관련된 행영은 조선후기까지 운영되었다. 북방 사군육진 지역에서는 관찰사와 병마절도사가 주요 지역을 순회하면서 머물던 행영이 있었다.

군사적 필요에 의해 군대를 나누어 주둔할 경우에도 각 군영을 행영이라고 했다. 함경도의 경우는 지역이 넓고 군사적 요충지가 많아 군영을 셋으로 나누고 함흥에 병마절도사의 본병영을 두고, 북청에 남병영, 경성에 북병영을 두었다. 이 중 남병영과 북병영을 행영이라고 했다(『정조실록』 21년 2월 25일).

한편 조선후기에는 중앙에 5군영 제도가 성립하고, 도성 방어 체제가 중시되면서 각 군영이 본부 이외에도 여러 곳에 행영을 나누어 배치했다. 이 군영들도 행영이라고 했다.

그 외에 전시를 대비해서 각 요충지와 산성에 방어 거점을 설정하고 군량을 비축해서 유사시에 지휘관과 군이 입보(入保)하도록 했는데, 이렇게 지정된 군사 거점도 행영이라고 했다.

참고문헌

  • 『만기요람(萬機要覽)』
  • 최정환, 『역주 『고려사』 백관지』, 경인문화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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