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계선(尹繼善)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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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윤계선 |
한글표제 | 윤계선 |
한자표제 | 尹繼善 |
분야 | 인물 |
유형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 |
집필자 | 최양규 |
자 | 이술(而述) |
호 | 파담(坡潭), 파택(坡澤)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77년(선조 10) |
사망 | 1604년(선조 37) |
본관 | 파평(坡平) |
주거지 | 서울 |
증조부 | 윤안인(尹安仁) |
조부 | 윤춘년(尹春年) |
부 | (양부)윤희굉(尹希宏) (생부)윤희정(尹希定) |
모_외조 | (양모)전주 이씨(全州李氏) : 이심(李諶)의 딸 (생모)고성 이씨(固城李氏) : 이택(李澤)의 딸 |
처_장인 | 남원 윤씨(南原尹氏) : 윤엽(尹曄)의 딸 →(자녀)1녀 |
자녀 | (1녀)?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윤계선(尹繼善) |
총론
[1577년(선조 10)∼1604년(선조 37) = 28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의 문신. 이조 정랑(正郞)과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 등을 지냈다. 자 이술(而述)이고, 호는 파담(坡潭) 또는 파택(坡澤)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윤희굉(尹希宏)이고,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영천수(靈川守) 이심(李諶)의 딸이다. 생부는 윤희정(尹希定)이며, 생모 고성 이씨(固城李氏)는 이택(李澤)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예조 판서(判書)를 지낸 윤춘년(尹春年)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이조 참판(參判)을 지낸 윤안인(尹安仁)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97년(선조 30) 4월 알성(謁聖)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1세였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30년 4월 19일,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선조 30년 4월 1일, 『방목(榜目)』] 처음에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에 보임되었다가 이어 예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으며, 1598년(선조 31) 2월 병조 좌랑이 되었다.[『선조실록』선조 30년 4월 17일, 선조 30년 4월 28일, 선조 31년 2월 4일] 1599년(선조 32) 윤4월 병조 정랑으로 승진하였고, 1600년(선조 33) 2월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선조실록』선조 32년 윤4월 6일] 이때 암행어사가 되어서, 이경전(李慶全) 등과 함께 각도의 군(郡)과 현(顯)을 몰래 순행하면서 수령들의 정치와 민생의 질고를 살피고 돌아온 후 선조에게 자세히 보고하였다.[『선조실록』선조 33년 2월 23일] 사헌부(司憲府)헌납(獻納)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선조실록』선조 33년 4월 18일, 선조 33년 5월 11일] 이때에 이산해(李山海)를 중심으로 병조 판서홍여순(洪汝諄)의 삭탈관직을 주장하였는데, 윤계선(尹繼善) 역시 이 논의에 참여하여 홍여순의 삭탈관직을 주장하였다.[『선조실록』선조 33년 4월 17일, 선조 33년 4월 18일, 선조 33년 5월 5일. 『선조수정실록』선조 33년 4월 1일] 그러면서 우의정이헌국(李憲國)의 태도가 불분명하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옹진현령(甕津縣令)으로 좌천되었다.[『선조실록』선조 33년 5월 19일] 이후 그는 옹진현령으로서 정사를 잘 처리하고 민생의 폐단을 모두 없앴으므로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이를 표창할 것을 요청하자 선조가 상으로 표리(表裏) 한 벌을 하사하였다.[『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17 「사헌부지평지제교겸세자시강원사서윤군묘지명(司憲府持平知製敎兼世子侍講院司書尹君墓誌銘」 이하 「윤계선묘지명」으로 약칭]
그러나 1602년(선조 35) 3월 윤계선은은 중국조사(詔使)를 접대하기 위하여 개성부(開城府)에 도착하였다가, 휴가를 허락 받지 않았음에도 사사로이 상경(上京)하였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옹진현령에서 파직되었다.[『선조실록』선조 35년 3월 22일] 그때 윤계선은 풍비(風痹 : 팔 다리의 마비 증세)병에 걸려 서울의 본가(本家)로 돌아왔던 것인데, 옹진현령에서 파직되어 집에서 치료하면서 증세가 조금 나아졌다.[「윤계선묘지명」] 1603년(선조 36) 7월 다시 평안도사(平安都事)에 임명되어 평양으로 갔다가 결국 풍비병이 심해져서 체직되었다.[『선조실록』선조 36년 7월 4일, 선조 36년 9월 29일] 그리고 1604년(선조 37) 서울 본가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28세였다. [「윤계선묘지명」]
성품과 일화
윤계선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강직하고 과단성 있었으며, 능력이 탁월하고 큰 뜻이 있었다. 구차하게 남들과 영합하지 않고, 일을 과감하게 처리하였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항상 가슴 속의 생각을 그대로 털어놓고, 자신을 자랑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그와 교유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이러한 점들을 칭찬하였다. 특히 문장이 호한(浩澣)하여, 붓을 잡으면 즉석에서 일만 자가 넘는 문장을 써 내려갔다. 특히 사륙문(四六文 : 4자와 6자의 구(句)로 이루어진 문체)에 뛰어났는데, 문장이 맑고 넉넉하고 준일(俊逸)하였다.[「윤계선묘지명」]
묘소와 후손
윤계선의 묘소는 선영(先塋)에 있는데, 허균(許筠)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전한다.[「윤계선묘지명」]
부인 남원 윤씨(南原尹氏)는 윤엽(尹曄)의 딸로, 아들은 없고, 딸 하나가 있다.[「윤계선묘지명」]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동춘당집(同春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