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만춘(元萬春)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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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원만춘 |
한글표제 | 원만춘 |
한자표제 | 元萬春 |
분야 | 정치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인조~숙종 |
집필자 | 홍연주 |
자 | 군시(君始)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626년(인조 4) 9월 18일 |
사망 | 1697년(숙종 23) 12월 26일 |
본관 | 원주(原州) |
주거지 | 여주(驪州)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장암리 |
증조부 | 원호(元豪) |
조부 | 원유남(元裕男) |
부 | 원두표(元斗杓) |
모_외조 | 삭녕 최씨(朔寧崔氏) : 최동식(崔東式)의 딸 |
형제 | (형)원만석(元萬石), 원만리(元萬里) |
처_장인 | 함양 박씨(咸陽朴氏) : 박종부(朴宗阜)의 딸 →(자녀)2남 3녀 |
자녀 | (1자)원몽정(元夢鼎) (2자)원몽은(元夢殷) (1녀)권상유(權尙游)의 처 (2녀)이당(李簹)의 처 (3녀)이수번(李秀蕃)의 처 (서1녀)여필응(呂必應)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원만춘(元萬春) |
총론
[1626년(인조 7)∼1697년(숙종 23) = 72세]. 조선 후기 효종(孝宗)~숙종(肅宗) 때의 문신. 수원부사(水源府使)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등을 지냈다. 자는 군시(君始)이고, 본관은 원주(原州)이며, 거주지는 여주(驪州)이다. 아버지는 우의정을 지낸 원두표(元斗杓)이고, 어머니 삭녕 최씨(朔寧崔氏)는 사헌부(司憲府)사간(司諫)을 지낸 최동식(崔東式)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원유남(元裕男)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원호(元豪)이다.
인조~현종 시대 활동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청(淸)나라와 강화조약을 맺을 당시, 청나라에서는 왕세자를 비롯하여 대신들의 자제 등을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15년 1월 28일] 당시 17세이던 원만춘(元萬春)은 이때 두 형들이 있음에도 자청하여 인질이 되어 심양(瀋陽)으로 가서 2년 동안 머물다가 귀국하였다. 귀국 후 할머니 상(喪)을 당해 1년 동안 최질(衰絰)을 입고 밖에서 거처하였다. 그 후 연달아 향시(鄕試)에는 합격하였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원만춘은 인질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므로 마땅히 벼슬에 제수될 수 있었으나, 나이가 어렸던 관계로 오랜 후에야 빙고(氷庫)별검(別檢)이 되었다.[『수곡집(睡谷集)』 권12 「우윤원공묘갈명(右尹元公墓碣銘)」 이하 「원만춘묘갈명」으로 약칭]
1655년(효종 6) 사재감(司宰監)주부(主簿)와 장예원(掌隷院) 사평(司評)을 거쳐 평강현감(平康縣監)을 지냈다. 이어 1658년(효종 9)에는 홍천현감(洪川縣監)에 임명되었는데, 홍천은 백성의 수에 비하여 역(役)이 번잡하였으므로 원만춘이 다시 읍규(邑規)를 정하니, 백성들이 크게 의지하였다. 이에 어사(御史)가 치적을 포상할 것을 건의하여,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원만춘묘갈명」]
1661년(현종 2) 안성군수(安城郡守)에 제수되었는데, 기전(畿甸)을 검전(檢田)하였을 때 분등(分等)이 가장 공평하여 다른 지역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다가 얼마 후 숙부인 원두추(元斗樞)의 상을 당하자 상사(喪事)를 친히 검칙하기 위해 체직하고 돌아갔다. 1663년(현종 4) 배천군수(白川郡守)에 임명되었으며, 아버지의 3년상을 치룬 후 1666년(현종 7) 복(服)을 벗고 사재감 첨정(僉正)을 거쳐 금천군수(金川郡守)가 되었으나 사직하고 체직되었다. 이듬해 연안현감(延安縣監)이 되었는데 오래지 않아서 친병(親病)으로 돌아왔으며 풍덕부사(豊德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원만춘묘갈명」]
1670년(현종 11)에는 장예원 사의(司議)를 거쳐 충주목사(忠州牧使)로 나갔다. 1671년(현종 12) 충주에 큰 흉년이 들었는데, 원만춘이 정성을 다해 구제하니, 살아난 자가 수만 명이었다. 아울러 그는 농사지을 소와 종자 양식을 마련하여 농민들을 도왔다. 그러나 상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진정(賑政)을 마치고서는 개인적으로 진곡(賑穀)을 마련하지 않은 것으로 상관에게 보고하였다. 1673년(현종 14)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과 익위사(翊衛司) 사어(司禦)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체직하였다.[「원만춘묘갈명」]
숙종 시대 활동
1680년(숙종 6) 충훈부(忠勳府)도사(都事)와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 해 가을에는 정사공신(靖社功臣)원두표의 아들 자격으로 회맹제(會盟祭)에 참석하였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6년 8월 30일] 이때 통정대부(通政大夫) 가자(加資)하라는 명이 내렸는데, 원만춘은 지자(支子)로서 은전(恩典)을 입는 것은 예(例)가 아니라 하여 받는 것을 꺼렸다. 이에 연신(筵臣) 가운데 임금께 아뢴 자가 있어 그 명(命)이 중지되었다. 이후 상주목사(尙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원만춘묘갈명」]
1683년(숙종 9)에 천거로 수원부사에 발탁되어 부임하자마자 곧 상소하여 군민(軍民)의 적폐(積弊)를 조목으로 진달하여 변통하였다.[『숙종실록』숙종 9년 7월 8일] 또 마별대(馬別隊)를 두어 급한 짐을 운반하여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하게 하고, 기계를 수선하여 융비(戎備)를 일신(一新)하였다. 총융사(摠戎使)가 이를 보고하자 숙종이 전지를 내려 말을 하사하고 포유(褒諭)하였다.[「원만춘묘갈명」] 1687년(숙종 13)에는 충청병사(忠淸兵使)와 판결사(判決事)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연신이 말하기를, “공이 점점 연로해지니 마땅히 빨리 탁용(擢用)해야 합니다.” 하자, 임금이 그의 나이를 묻고는 “내가 보기에 신채(神采)가 아직 왕성하다” 하고는 선부(選部)로 하여금 2품 망(望)으로 올리게 하였는데, 그때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는 바람에 중지되어 시행되지 않았다.[「원만춘묘갈명」]
1694년(숙종 20)에 양주목사(楊州牧使)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여 체직되었다.[「원만춘묘갈명」] 1696년 (숙종 22)에는 한성부우윤에 임명되었는데, 연달아 글을 올려 간절히 사직을 청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숙종실록』숙종 22년 6월 11일, 「원만춘묘갈명」] 숙명(肅命)하기 위해 서울로 와서 곧 휴가를 청하니, 특명으로 도로 돌려주고 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와 의금부 부총관(副摠管)을 겸하게 하였다. 이에 원만춘은 한동안 공직(供職)에 있다가 몇 달 후 휴가를 청해 돌아와 체직하였다.[「원만춘묘갈명」] 1697년(숙종 23)에 대신의 건의로 다시 한성부우윤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숙종실록』숙종 23년 5월 10일] 그리고 얼마 후 병에 걸리는 바람에 그해 12월 26일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2세였다.[「원만춘묘갈명」]
성품과 일화
원만춘의 성품과 자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도(氣度)가 침착하여 장자(長者)들이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10대 시절 심양에 2년 동안 인질로 머물면서 항상 가슴 깊이 슬퍼하여 오랑캐의 물건은 하나라도 취해서 행낭(行囊)을 더럽히지 않았으며, 아내 대신 따라간 여어(女御)도 끝내 한 번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에 관중이 놀라 소란을 떨면서 천병(天兵)이 크게 이르렀다고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 그러나 그는 홀로 그대로 드러누워서 코를 골았는데, 조금 후에 알고 보니 극한(可汗)이 죽었기 때문이지 군대가 쳐들어 온 것은 아니라고 하니 군중들이 모두 탄복하였다.[「원만춘묘갈명」]
원만춘은 충후(忠厚)하고 질직(質直)하였으며 절조(節操)를 확연히 지켰다. 그의 집안은 가정 교육이 매우 엄하였는데, 상제(喪祭)는 더욱 삼가서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지켰으니 원만춘은 늘 그대로 따라 행하고 감히 실추시키지 않았다. 아버지를 옆에서 모실 때에는 날마다 반드시 관대를 하고 직접 쇄소(洒掃)를 하였다. 군읍(郡邑)에 있을 때에는 별도로 동헌 옆에다 주방을 설치해 아침저녁으로 몸소 음식 맛이 좋은가를 보고 올렸다. 아버지 상을 겪은 뒤로는 화려한 옷을 입지 않고 평소에는 추워도 비단 바지를 입지 않았으며 더워도 모시옷을 입지 않았다. 도포가 해어지면 항상 기워 입으면서 말하기를,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 집안 법도이다.” 하였다.[「원만춘묘갈명」]
항상 엄숙하게 단정히 앉아 행동거지에 일정한 법도가 있었다. 규문(閨門) 안에서는 서로 공경하고 대소(大小)가 화복(化服)하여 삼가 존경하지 않음이 없었다. 성품이 성색(聲色)과 분화(紛華)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일체 세속에서 좋아하는 바에 욕심이 없었으며, 세리(勢利)를 보면 혹시라도 더러워질까 멀리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에는 법도를 삼가 지켜서 고식적(姑息的)이고 구차스러운 뜻이 없었다. 항상 말하기를, “마음이 공정하면 비록 적중하지는 않더라도 멀지는 않으며, 조금이라도 훼예(毁譽)의 마음을 두면 일을 그르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하고는 일의 처단을 확실히 하고 청탁을 행하지 않았다. 더욱이 청렴결백함에 힘써서 공물(公物)은 털끝만큼이라도 가까이하지 않아서 언제나 돌아오는 행탁(行槖)이 텅 비어 쓸쓸하였다.[「원만춘묘갈명」]
문을 닫고 조용히 있으면서 교제를 간결히 하였으며, 일상 생활에서 실사(實事)가 아니면 마음에 두지 않았다. 성현의 경훈(經訓) 및 사전(史傳)을 취해서 잠심(潛心)하여 즐거움으로 삼았다. 만년에는 특히 『논어(論語)』읽기를 좋아하여 항상 “젊은 날에 병을 잘 앓아 학문할 시기를 놓쳤는데, 늙고 나니 비록 정신을 집중해 읽으려 해도 근력(筋力)이 미치지 못한다.” 하며 한탄하였다.[「원만춘묘갈명」]
항상 말하기를, “교목지신(喬木之臣)의 집안은 분의(分義)가 자별하다.” 하면서 국휼(國恤)을 만나면 반드시 5개월 동안 안에서 잠을 자지 않았다. 인조·효종·현종(顯宗) 삼조(三朝)의 기신일(忌辰日)이면 늙어서도 반드시 소식(素食)을 하였으며,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도 왕실에 마음을 써서 조정 정령(政令)의 잘잘못을 들으면 근심하고 기뻐하는 기색이 얼굴에 나타났다. 임종 때 탄식하기를, “나는 본디 재주가 없는데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어 한 번 죽음으로써 은혜를 갚고자 하였는데 이제 스스로 갚을 길이 없게 되었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 하였다.[「원만춘묘갈명」]
묘소와 후손
원만춘의 묘소는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장암리에 있고, 부인 함양 박씨(咸陽朴氏)와 합장하였다. 이여(李畬)가 쓴 묘갈명이 있다.
부인 함양 박씨는 교리(校理)박종부(朴宗阜)의 딸로, 자녀는 2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원몽정(元夢鼎)은 천거로 주부(主簿)에 제수되었고, 차남 원몽은(元夢殷)은 원만춘의 큰형 원만석(元萬石)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장녀는 권상유(權尙游), 차녀는 현감(縣監)이당(李簹), 삼녀는 이수번(李秀蕃)에게 각각 시집갔다. 또한 측실(側室)에서 낳은 딸은 진사(進士)여필응(呂必應)에게 시집갔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수곡집(睡谷集)』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한수재집(寒水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