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고려)"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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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3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가 되었다. | 1093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가 되었다. | ||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뒤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상주국에 올랐다. |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뒤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상주국에 올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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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균(고려)|서균]] 묘지명(六世 徐鈞 墓誌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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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所在 : 서울 國立中央博物館(No. 新 58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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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年代 : 仁宗10年(金 天會10年, 113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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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高麗國卒朝散大夫判將作監事致仕濮陽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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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徐鈞其先利川郡人大宋淳化3年成宗卽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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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之12年契丹伐我入北鄙上幸安北將割地以岊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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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嶺爲關公之曾祖中書令章威公㬢‘獨發憤揮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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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力排其議方一戰自決未幾虜折簡召元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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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 □□難之左右無可行者公慷慨義形於色因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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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 行奏曰臣往則彼必退矣無勞聖情乃以孑然一身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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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 冒賊百万圍中與虜帥抗衡不屈指陣人義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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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 爲之喪膽而遁國家至今全有西北千万里地賴其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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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 力也故家世皆以强蔭取卿相數矣而況公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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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 厚莊重而有守其中者猶泰山莫之能移也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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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 出宰于興礼中原大率寬平淸簡邑稱其理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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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自後國家數遣使沙汰淸濁凡經郡牧者陰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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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 投刺獨公自若也以如彼功力之後有如是德行之實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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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 位不過卿監世所惜也然猶桑楡之晩樂其退休未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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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 嘗有歉然之色而居常樂也內尤信大慈悲藏大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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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 天會10年壬子春秋73無疾而登假11月3日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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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 葬于白岳山之麓祖惟傑左僕射考靖平章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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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妣金氏平章事元鼎女也公娶李氏給事中唐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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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 之女也生男六人生女四人次序名位鏤之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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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 背矣銘曰 徐氏之世 于列有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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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 惟公之偉 大臣之方 言寡行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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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 動靜有常 陰功厚德 厥後必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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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 誌其髣髴 庶幾無疆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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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 長元成佛都監判官次穎觀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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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 化寺□紫大師恭景靈殿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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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7) 官次□□□□同正次□內侍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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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8) 書郞同正次□春坊公子女四人長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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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適金□之西面判官□辛丑冬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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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 月先公而死次適王毅前試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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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 部郞中次適李淑晨前內侍試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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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 尙衣直長次適高陽堅書籍店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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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3) 事孫男九人孫女七人皆幼唯長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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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4) □□永□□爲春坊□使□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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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天會壬子冬十一月 日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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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參 考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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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海東金石苑』 補遺2, 713-7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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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朝鮮金石總覽』上, 334-33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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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國金石文追補』96(長元成佛都監 墓誌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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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國金石全文』 中世上, 603-6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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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張東翼, 「高麗墓誌 4例 檢討」(『大丘史學』19, 198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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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균(고려)|서균]] 묘지명(徐鈞墓誌銘) (번역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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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국의 조산대부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하고 돌아가신 복양공 [[서균(고려)|서균]]은 그의 선조가 이천군 사람이다. 송나라 순화3년(성종11, 서기 992년) 성종이 즉위한지 12년에 거란이 우리나라를 정벌하러 북쪽의 변방으로 침입하였다. 임금이 안북에 행차하여 땅을 떼어주어 절령으로 경계를 삼으려 하였다. 공의 증조 중서령 장위공 [[서희]](曦, 徐熙)가 홀로 분발하여 ᤝ힘써 그 논의를 배척하고 바야흐로 일전을 벌여 스스로 결정하고자 하였다. 얼마되지 않아 오랑캐가 사신을 보내오자 원수를 불렀으나 ᤝᤝ어렵게 여겨 좌우에서 가히 갈만한 자가 없었다. 공이 강개하여 의로운 빛을 얼굴에 드러내며 이에 갈 것을 청하면서 아뢰었다. “신이 간다면 저들은 반드시 물러날 것이니, 성정을 수고롭게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내 홀연히 혼자 몸을 무릅쓰고 적의 백만 포위속으로 들어가서 오랑캐의 장수와 더불어 대항하며 뜻을 굽히지 않고 대의(人義)를 펼치지, 오랑캐가 그로 인하여 용기를 잃고 물러났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북지방의 천만리 땅을 온전하게 한 것은 공이 힘쓴 덕분이다. 그러므로 가문이 대대로 강한 음덕으로 경상이 된이가 여러명이다. 하물며 공([[서균(고려)|서균]](徐鈞)은 관대하고 너그러우며 장중하니, 그 중심을 지키는 것이 태산을 능히 옮기기 어려운 것과 같은 사람에 있어서이겠는가? 일찍이 흥례(興禮)와 중원(中原)에 수령으로 나갔을 때 대개 관대하고 공평하며 청렴하니 고을에서 그 다스림을 칭송하였다. 그 뒤 나라에서 여러차례 안찰사를 보내어 청탁을 가리게 하였는데 무릇 군목을 지내는 자들이 몰래 서로 명암을 주며 만나자고 하였으나 공만은 태연자약하였다. 그와 같은 공력(功力)이 있는 뒤에야 이와 같은 덕행의 업적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직위가 경(卿)과 감(監)에 지나지 않으니 세상에서 아쉽게 여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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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오히려 만년에는 물러나 쉬는 것을 즐기고, 일찍 서운해하는 기색이 없이 항상 기쁘게 생활하며, 안으로는 불교[대자비장(大慈悲藏)]를 더욱 믿었다. 大金 天會 10년 임자년(인종10, 1132)에 춘추 73세로 벽이 없이 돌아가시니 11월 3일에 백악산(白岳山) 기슭에 안장하였다. 조부 [[서유걸]](徐維傑)은 좌복야(左僕射)이고, 아버지 [[서정]](徐靖)은 평장사(平章事)이며, 어머니 김씨는 평장사 김원정(金元鼎)의 딸이다. 공은 이씨와 결혼하였는데, 급사중(給事中) 이당감(李唐鑑)의 딸이다. 아들 여섯명과 딸 네 명을 두었으니, 그들의 순서와 이름은 뒷면에 새겼다. 명(銘)하여 이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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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씨]]의 세계는 대대로 빛났지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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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직 공이 뛰어나 대신의 방략이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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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이 적으나 행동이 민첩하고 기거 동작이 일정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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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적을 감추고 덕을 후하게 하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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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후손이 반드시 창성할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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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모습에 비슷하게 지(誌)를 지었으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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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궁하에 전해지기를 바라노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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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뒷면 큰아들 [[서원(고려)|서원]](徐元)은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이고, 차남 [[서영관]](徐潁觀)은 현화사(玄化寺) ᤝ자대사(ᤝ紫大師)이며, 3남 [[서공]](徐恭)은 경영전판관(景靈殿判官)이며, 4남 [[서순(고려)|서순]](徐諄)은 ᤝᤝᤝ同正이며, 5남 [[서성]](徐成)은 내시수서랑동정(內侍授書郞同正)이며, 6남 [[서염]](徐廉)은 춘방공자(春坊公子)이다. 딸은 네명인데, 장녀는 서면판관(西面判官) 金ᤝ之에게 시집갔으나 신축년(예종16, 1121) 겨울 10월에 공 보다 앞서 죽었다. 2녀는 전시병부랑중(前試兵部郞中) 왕의(王毅)에게 시집갔고, 3녀는 전(前) 내시시상의직장(內侍試尙衣直長) 이숙신(李淑晨)에게 시집갔고, 4녀는 서적점록사(書籍店錄事) 고양견(高陽堅)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9명, 손녀는 7명인데 모두 어리다. 다만 장녀 ᤝᤝ永ᤝᤝ春坊이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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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회임자년(天會壬子年)(仁宗10,1132)겨울 11월에 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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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공]]묘지석문(七世 徐恭墓誌石文)(神道碑文)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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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檢校太子太傅金紫光祿大夫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贈賹貞□公徐氏神道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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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公諱恭利川郡人五代祖徐弼太祖聖朝功臣三重大匡內史令四代祖諱熙太師內史(令) 曾祖諱維傑追封大□□□□□(左)(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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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射祖諱靖中書侍郞平章事考諱鈞儒林郞檢校戶部尙書判將作監事致仕妃昌化郡大夫人李氏檢校禮部侍(郞)(給)(事)中(李)(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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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鑑之女公卽判將作監事第三子稟性寬仁公正年十一以祖蔭登仕版三十二調爲景靈殿判官屬□仁廟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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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有中者獨扈□駕者莫能中之□上忤慮公被薦射中非伐左右嘆服□上乃厚賞歷官句覆院八關寶判官神虎(衞)□□□□□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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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 署令歲在庚申例受黃州牧判官兼勸農使閤門祗侯淸白勤政以公餘栗代□貢救衝路驛人馬或植栗十一万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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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 勞逸黃州人使之按察使以此馳□聞上嘉之命有司錄功登庸秩滿拜尙衣直長次拜閤門祗侯通事舍人試尙書□中員外郞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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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 兼三司判官賜緋魚袋被執柄者忌出爲羅州牧副使兼勸農使誧尙書戶部郞中賜紫金魚袋三載政理與黃州□□□期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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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 閤門副使明李復兼三司判官歷尙書戶刑部郞中司宰少卿知閤門事兼大子中舍人出督慶尙晉州道按察使時□□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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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 姓慅擾□下詔捕之承□命奇計捕二十五人而後其害息焉都兵馬使褒奏□獎擢之授少府監尙書刑部侍郞尋改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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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 兼三司副使踰年□授朝散大夫試禮賓卿自郞中少卿之卿凡帶知閤門事九度太子中舍人六度未久拜判閤門事□□司使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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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 試吏部尙書樞密院副使兼太子賓客改□授兵部尙書同知樞密院事加拜院知院使判三司事□上知有公輔材□□授知(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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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下省事戶部尙書轉參知政事加大中大夫尙書左僕射金紫光祿大夫大子大保遷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儀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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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 氣㮣不羣以疾預上章懸車歷任以淸儉節用許國先是□出爲東西北面兵馬元帥所過方鎭咸服奉己□奉公□或西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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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 叛公領奇兵備嘗險阻佐幕有功令歲在辛卯七月二十日遇疾卒于位春秋七十一□上聞之軫悼命尙食致祭于公三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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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 視朝焉夫人江陽裴氏明淑知禮左散騎常侍景誠之長女所欠無一兒可保家故幼養景誠長子刑部郞中知閤門事晉之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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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 爲猶子猶子允材職在內侍尙舍直長儂於猶子爲妹之夫及八月四日以□國制飾葬于德水縣吉地猶子托矛爲誌台不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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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 心哀而濡翰書銘于墓曰□嗚呼公乎季過縱心不謂之夭位兼將相不謂之少然未康吾民未盡吾道在公之心卽爲政□□□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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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咸道在而俗薄時矣夫心□而業季命矣夫嗚呼公乎己矣夫□文林郞試尙書吏部員外郞知制誥賜緋魚袋洪倫□□敍撰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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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위 글중 □□등은 석면의 마멸이나 결실로 인해 일부만 보이는 글자를 추정판독하였거나(□) 또는 보충한 것들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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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공]]묘지석문(신도비문)(七世 徐恭墓誌石文 神道碑文) (번역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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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돌아가신 검교태자태부(檢校太子太傅)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중서시랑(中書侍郞)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 추증시호 貞ᤝ公 서씨 신도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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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공의 이름은 서공(徐恭)이요 이천군 사람이다. 5대조는 [[서필]](徐弼)로 태조(太祖) 때 공신(功臣)이며 삼중대광내사령이었다. 4대조는 [[서희]](徐熙)로 (太)師內史(令)이었다. 증조 이름은 [[서유걸]](徐維傑)이며 대ᤝᤝᤝᤝᤝᤝ<좌복(左僕)>射로 추봉되었다. 할아버지 이름은 [[서정(고려)|서정]](徐靖)이며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냈고, 아버지 이름은 [[서균(고려)|서균]](徐鈞)으로 유림랑(儒林郞)·검교호부상서(檢校戶部尙書)·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를 역임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어머니 창화군(昌化郡) 대부인(大夫人) 이씨(李氏)는 검교예부시(檢校禮部侍) <낭급사(郎給事)> 中 <이당(李唐)> 감(鑑)의 따님이다. 公은 바로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의 셋째 아들이며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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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31세 때 조음(祖蔭)으로 사판(仕版)에 올랐다. 32세 때 경영전판관(景靈殿判官)으로 발탁되었다. 仁廟(仁宗)가 (平壤에 行次하였을 때 兩都관리들이 활쏘기를 하여) 가운데 맞히는 것을 (겨루었는데) 유독 왕을 호송하는 자들은 가운데 맞히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왕이 매우 언짢았는데 공이 천거를 받아 활을 쏘아 적중하니 좌우에 탄복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왕은 후한 상을 내렸다. 구복원(句覆院), 팔관보판관(八關寶判官), 신호(神虎)(衛)ᤝᤝᤝᤝᤝ署令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경신년(庚申年)(1140)에 황주목판관(黃州牧判官) 兼 권농사(勸農使)·합문지후(閤門祗侯)를 제수받았는데 청렴하고 정사(政事)에 부지런하였다. 公은 녹봉으로 지급받아) 남은 쌀로 (백성의) 공(貢)를 대납하거나 요충지역 도로 역참(驛站)의 인마(人馬)를 구제하였다. 또한 밤나무 11만여주를 심고 ᤝᤝᤝᤝᤝᤝ(백성들의 수고로움과 편암함을(보살피니) 황주사람들이 편하게 되었다. 안찰사(按察使)가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니 왕이 이를 듣고 가상히 여겨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공(功)을 기록하고 그에 알맞게 등용하도록 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어 상의직장(尙衣直長)에 임명하고 이어서 합문지후(閤門祗侯), 통사사인(通事舍人), 시상서(試尙書)ᤝ중원외랑(中員外郞) 兼 삼사판관(三司判官)에 이르렀고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았다. 집병자(執柄者, 권력자)의 시기를 받아 나주목부사(羅州牧副使) 兼 권농사(勸農使)인(외직으로) 나가 상서호부낭중(尙書戶部郎中)을 도와주게 되었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나주에 재임한지) 3년 동안의 다스림은 황주에서와 (다름이 없었다. ᤝᤝᤝ만기가 된 후) ᤝ합문부사(閤門副使)가 되고 이듬해 다시 삼사판관(三司判官)을 兼하고 상서호형부랑중(尙書戶刑部郞中), 사재소경(司宰少卿), 지합문사(知閤門事) 겸 大(太)子中舍人을 역임하였다. (이어서) 경상 진주도(慶尙 晉州道)를 감독하는 안찰사(按察使)가 되었다. 이때 ᤝᤝ(功) ᤝ(백)성들이 소요하였다. (왕이) 조서를 내려 체포하게 하였고, (공은) 왕명을 받들어 교묘한 계책을 25인을 사로잡아 이후 해로움이 그쳤다. 도병마사(都兵馬使)가 포상하기를 (왕에게) 아뢰니 (왕은 공을) 뽑아 소부감(小府監)·형부시랑(刑部侍郞)을 제수하고, 얼마 있지 않아 史ᤝᤝᤝ 겸 삼사부사(三司副使)로 고쳐 임명하였다. 이듬해에 조산대부(朝散大夫)·시례빈경(試禮賓卿)으로 임명하였다. 낭중소경(郎中少卿)의 경직(卿職)을 받고부터 무릇 지합문사(知閤門事) 9번, 태자중사인(太子中舍人)을 6번 겸임하였다. 오래지 않아 판합문사(判閤門事)ᤝᤝ司使, 시이부상서(試吏部尙書),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겸 大(太)子賓客을 고쳐 배수받았다. (그리고) 병부상서(兵部尙書),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고쳐 임명하였고, 더하여 추밀원지(樞密院知)(院事)와 (樞密院)院使, 판삼사사(判三司事)를 받았다. 왕이 공에게 재상의 재질과 ᤝᤝ이 있음을 알고 知(門)下省事,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임명하였다. (이후)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옮기고 大(太)中大夫,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금자광대부(金紫光大夫), 大(太)子大(太)保가 더해졌다. 그리고 중서시랑하평장사(中書侍郞下平章事)로 천직되었다. 공의 의표(儀表)는 ᤝᤝ하였고, 그 기개는 뭇사람들과 같지 않았다. 병 때문에 미리 치사 하고자 함을 왕에게 아뢰었다. (관직을) 역임할 때 청렴하고 검소함으로 나라 일을 돌보았다. 이전에 동서북면병마사원수(東西北面兵馬使元帥)로 나가 있을 때는 공이 가는 방진(方鎭)마다 감복하였다. (그리고 공은) 삿긴을 돌보는데는 ᤝ하고 공사를 돌보는데는 ᤝ하였다. 또는 서도(西都)(平壤)에서 ᤝᤝ叛했을 때 공은 날랜 병사를 거느리고 먼저 험한 요충지를 방비하여 막부(幕府)를 도와 공(功)이 아름답고 높았다. 신묘년(辛卯年)(1171) 7월 20일에 병을 얻어 자리에서 죽으니 춘추(春秋)가 71세였다. 왕이 부음을 듣고 몹시 슬퍼하고 상식국(尙食局)에 명(命)하여 公에 대한 제사를 드리게 하고, 3일(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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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부인은 강양배씨(江陽裵氏)로 총명하고 정숙하여 예의가 있으며,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裵)경성(景誠)의 맏딸이다. 흠되는 것은 집안을 보전할 자식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배경성의 맏아들인 형부낭중(刑部郞中) 지합문사(知閤門事) 진(晉)의 아들 ᤝ를 어려서부터 길러서 유자(猶子)로 삼았다. 유자의 이름은 윤재(允材)며 관직은 내시상사직장(內侍尙舍直長)이다. 나는 유자의 매부(妹夫)로서 8월 4일에 국제(國制)로서 덕수현(德水縣)의 길지(吉地)에 장례를 치르게 되자 유자(孺子)가 나에게 지(誌)를 지어줄 것을 부탁함에 사양할 수 없어 슬픔을 머금고 글을 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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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묘의 명(銘)은 다음과 같다. 아아! 공이여! 나이 70세를 지났으니 요절하였다고 할 수 없고 지위가 장상(將相)을 겸하였으니 적다고 할 수 없도다. 그러나 우리 백성들은 아직 편안하지 못하고 우리의 도(道)를 아직 다하지 못하였다. 공의 마음은 곧 위정(爲政)ᤝᤝᤝ하는데 있었다. 모든 도는 있지만 풍속은 박(薄)할 때이다. 마음은 ᤝ하나 (王)業은 (天)命을 다했도다. 아! 공이여! 여기서 그만 두는 구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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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 문림낭시상서이부원외랑(文林郎試尙書吏部員外郞) 지제고(知制誥) 사비어대(賜緋魚袋) 홍륜(洪倫)이 글을 지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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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의 신도비의 내용은 1 제명(題名), 2 [[서공]](徐恭)의 가계(家系), 3 [[서공]](徐恭)의 행적(行蹟), 4 [[서공]](徐恭)의 상주(喪主)와 장례(葬禮), 5 명문(銘文), 6 비문(碑文) 지은이 등 6부문으로 나눌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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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원(고려1)|서원]]묘표(徐遠墓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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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의 휘는 [[서원(고려1)|서원]](徐元)인데 후에 [[서원(고려1)|서원]](徐遠)으로 고치고 원조는 [[서신일]](徐神逸)인데 80에 태보내사령(종1품 국무총리) [[서필]](徐弼)을 낳고,[[서필]]은 [[서희]](徐熙)를 낳았는데 태보내사령(종1품 국무총리)으로 고려에 공이 있어 광종때 녹권이 내렸다. 내사령은 상서우복야(정2품 부총리)로 추증된 [[서유걸]](徐惟傑)을 낳고, 복야은 중서시랑평장사(정2품 부총리) [[서정(고려)|서정]](徐靖) 을 낳고,시랑은 검교상서우복야(정2품 부총리) [[서균(고려)|서균]](徐均)을 낳고, 상서는 검교 태자 태사 상서좌복야(정2품 부총리) [[서순(고려)|서순]](徐淳)을 낳고, 태사는 병부낭중 [[서저]](徐氐)를 낳고 ,낭중은 감찰어사 [[서의(고려)|서의]](徐義)를 낳고, 어사는 합문사 [[서온(고려)|서온]](徐溫)를 낳고,합문사는 태관서령 겸 직문한서(太官署令兼直文翰署) [[서염(고려1)|서염]](徐恬)을 낳고,직문한은 판내부사사(判內府寺事 정2품 부총리) [[서진(고려1)|서진]](徐璡)을 낳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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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公諱元。後改遠。利川縣人。遠祖神逸。年八十。生子太史內史令弼。太史生太史內史令煕。有功高麗。光王朝賜錄券。內史令生追封尙書右僕射惟傑。僕射生中書侍郞平章事上柱國靖。侍郞生檢校尙書右僕射勻。 從金傍。 尙書生檢校太子太師尙書左僕射淳。太師生兵部郞中氐。卽中生監察御史義。於公爲曾王父。御史生閤門事溫。閤門生太官署令兼直文翰署恬。直文翰生判內府寺事璡。內府娶有備倉注簿光陽金百鍊之女。以至正四年辛亥十二月戊寅。生公。公自幼。天性厚重廉謹。旣長。不營產業。不求聞達。日以琴酒自娛。常曰。人之富貴貧賤。自有天命。不可妄干。忠宣王四年。充寶馬陪行首。尋拜密直堂後。入近侍衛。擢左右衛保勝郞將。歲丙午。國家擇公正廉謹者差守令。以公守竹州。公至果有政績。父老至今稱慕焉。洪武五年壬子八月。以發背卒于家。年六十二。以禮葬于川寧西村品谷里象頭山北麓。公凡再娶。竹山林氏。生一女。適中顯大夫典客令崔深。無子。靈嵒崔氏。正尹洪義之女。密直司知申事宋璘。其外大父也。以至元丙子正月生。貞靜慈愛。動循禮法。擇配歸于公。事舅姑以誠。敎諸子有方。乙巳三月。年九十。病歿。祔于公塋。生六男三女。長繼年。二男三男六男皆先歿。四男曰選。資憲大夫判漢城府事。五男宗浚。中直大夫典農正。女長先歿。次適嘉善大夫戶曺典書崔賢進。次適奉翊大夫判司宰寺事朴林貴。判漢城娶司宰令崔湖之女。生一男四女。男達。中訓大夫喬桐等處管軍萬戶兼知喬桐縣事。女長適宣務郞司譯院注簿李士敏。先歿。次適奉直郞大興縣監盧皓。次適宣敎郞廣州判官李蓄。次適承議郞司憲監察許倫。典農娶判典醫監事朴齊之女。生一男曰耇。宣略將軍忠佐侍衛司中領攝護軍。典書生二男。長九龍。宣務郞洛河渡丞。次洽。充別侍衛。司宰生二男。長簡。宣務郞都染署令。次珍。承議郞司憲監察。喬桐娶左議政黃諱喜之女。生二男。遭,遇皆幼。司譯生二男二女。大興生三女。判官生一男一女。皆幼。洛河生三男一女。皆幼。都染生二男三女。長適東部錄事鄭䪫。餘幼。監察生一男二女。幼。判漢城公請銘甚勤。余惟虧盈損益。相因不窮。實天道久長之妙也。況於人事乎。徐之積善也遠矣。自太史令。至左僕射凡六世。累卿累公。自兵部郞中。至公又六世。卛皆位不滿德。其積善之慶。必自今大發於判漢城公。而垂諸後世也。詎可量哉。余之從漢城公遊非一二歲。銘其先塋。義不敢辭。是敍其世系歷官事顚末而爲之銘。銘曰。 | ||
+ | 利川之徐。其來久矣。卿相相承。門閥罕比。胡公之賢。天嗇其位。屈伸消長。天道乃爾。顯允漢城。克振家風。綿綿餘慶。洎于無窮。川寧西畔。象頭山顚。有峙其邱。崔氏祔焉。史筆不諛。垂千萬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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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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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9일 (토) 16:10 기준 최신판
정의
고려 중기의 문신. 평장사.판삼사사를 지냈다. 고려 재상.본관은 이천서씨.
서정(徐靖)은 고려의 문신이다. 본관은 이천(利川)이며, 내사령 서희의 손자이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상장군 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徐贊),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생애
1065년(문종 19) 전중소감(殿中少監)이 되어 거란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089년(선종 6)에 삼사사(三司使)에 임명되고, 병부상서(兵部尙書)를 거쳐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냈다.
1092년 4월에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겸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나갔다가 6월에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랐다.
1093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가 되었다.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뒤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상주국에 올랐다.
서균 묘지명(六世 徐鈞 墓誌銘)
所在 : 서울 國立中央博物館(No. 新 5813)
年代 : 仁宗10年(金 天會10年, 1132)
1) 高麗國卒朝散大夫判將作監事致仕濮陽公
2) 徐鈞其先利川郡人大宋淳化3年成宗卽位
3) 之12年契丹伐我入北鄙上幸安北將割地以岊
4) 嶺爲關公之曾祖中書令章威公㬢‘獨發憤揮
5) □力排其議方一戰自決未幾虜折簡召元帥
6) □□難之左右無可行者公慷慨義形於色因請
7) 行奏曰臣往則彼必退矣無勞聖情乃以孑然一身
8) 冒賊百万圍中與虜帥抗衡不屈指陣人義虜
9) 爲之喪膽而遁國家至今全有西北千万里地賴其
10) 力也故家世皆以强蔭取卿相數矣而況公寬
11) 厚莊重而有守其中者猶泰山莫之能移也嘗
12) 出宰于興礼中原大率寬平淸簡邑稱其理
13) 自後國家數遣使沙汰淸濁凡經郡牧者陰相
14) 投刺獨公自若也以如彼功力之後有如是德行之實
15) 位不過卿監世所惜也然猶桑楡之晩樂其退休未
16) 嘗有歉然之色而居常樂也內尤信大慈悲藏大金
17) 天會10年壬子春秋73無疾而登假11月3日安
18) 葬于白岳山之麓祖惟傑左僕射考靖平章事
19) 妣金氏平章事元鼎女也公娶李氏給事中唐鑑
20) 之女也生男六人生女四人次序名位鏤之于
21) 背矣銘曰 徐氏之世 于列有光
22) 惟公之偉 大臣之方 言寡行敏
23) 動靜有常 陰功厚德 厥後必昌
24) 誌其髣髴 庶幾無疆
25) 長元成佛都監判官次穎觀玄
26) 化寺□紫大師恭景靈殿判
27) 官次□□□□同正次□內侍授
28) 書郞同正次□春坊公子女四人長
29) 適金□之西面判官□辛丑冬十
30) 月先公而死次適王毅前試兵
31) 部郞中次適李淑晨前內侍試
32) 尙衣直長次適高陽堅書籍店錄
33) 事孫男九人孫女七人皆幼唯長女
34) □□永□□爲春坊□使□
天會壬子冬十一月 日書
■ 參 考 ■
『海東金石苑』 補遺2, 713-716
『朝鮮金石總覽』上, 334-335
『韓國金石文追補』96(長元成佛都監 墓誌銘)
『韓國金石全文』 中世上, 603-606
張東翼, 「高麗墓誌 4例 檢討」(『大丘史學』19, 1981)
서균 묘지명(徐鈞墓誌銘) (번역문)
고려국의 조산대부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하고 돌아가신 복양공 서균은 그의 선조가 이천군 사람이다. 송나라 순화3년(성종11, 서기 992년) 성종이 즉위한지 12년에 거란이 우리나라를 정벌하러 북쪽의 변방으로 침입하였다. 임금이 안북에 행차하여 땅을 떼어주어 절령으로 경계를 삼으려 하였다. 공의 증조 중서령 장위공 서희(曦, 徐熙)가 홀로 분발하여 ᤝ힘써 그 논의를 배척하고 바야흐로 일전을 벌여 스스로 결정하고자 하였다. 얼마되지 않아 오랑캐가 사신을 보내오자 원수를 불렀으나 ᤝᤝ어렵게 여겨 좌우에서 가히 갈만한 자가 없었다. 공이 강개하여 의로운 빛을 얼굴에 드러내며 이에 갈 것을 청하면서 아뢰었다. “신이 간다면 저들은 반드시 물러날 것이니, 성정을 수고롭게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내 홀연히 혼자 몸을 무릅쓰고 적의 백만 포위속으로 들어가서 오랑캐의 장수와 더불어 대항하며 뜻을 굽히지 않고 대의(人義)를 펼치지, 오랑캐가 그로 인하여 용기를 잃고 물러났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북지방의 천만리 땅을 온전하게 한 것은 공이 힘쓴 덕분이다. 그러므로 가문이 대대로 강한 음덕으로 경상이 된이가 여러명이다. 하물며 공(서균(徐鈞)은 관대하고 너그러우며 장중하니, 그 중심을 지키는 것이 태산을 능히 옮기기 어려운 것과 같은 사람에 있어서이겠는가? 일찍이 흥례(興禮)와 중원(中原)에 수령으로 나갔을 때 대개 관대하고 공평하며 청렴하니 고을에서 그 다스림을 칭송하였다. 그 뒤 나라에서 여러차례 안찰사를 보내어 청탁을 가리게 하였는데 무릇 군목을 지내는 자들이 몰래 서로 명암을 주며 만나자고 하였으나 공만은 태연자약하였다. 그와 같은 공력(功力)이 있는 뒤에야 이와 같은 덕행의 업적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직위가 경(卿)과 감(監)에 지나지 않으니 세상에서 아쉽게 여겼다.
그러나 오히려 만년에는 물러나 쉬는 것을 즐기고, 일찍 서운해하는 기색이 없이 항상 기쁘게 생활하며, 안으로는 불교[대자비장(大慈悲藏)]를 더욱 믿었다. 大金 天會 10년 임자년(인종10, 1132)에 춘추 73세로 벽이 없이 돌아가시니 11월 3일에 백악산(白岳山) 기슭에 안장하였다. 조부 서유걸(徐維傑)은 좌복야(左僕射)이고, 아버지 서정(徐靖)은 평장사(平章事)이며, 어머니 김씨는 평장사 김원정(金元鼎)의 딸이다. 공은 이씨와 결혼하였는데, 급사중(給事中) 이당감(李唐鑑)의 딸이다. 아들 여섯명과 딸 네 명을 두었으니, 그들의 순서와 이름은 뒷면에 새겼다. 명(銘)하여 이른다.
서씨의 세계는 대대로 빛났지만
오직 공이 뛰어나 대신의 방략이 있었다.
말이 적으나 행동이 민첩하고 기거 동작이 일정하였다.
공적을 감추고 덕을 후하게 하니
그 후손이 반드시 창성할 것이다.
그 모습에 비슷하게 지(誌)를 지었으니
무궁하에 전해지기를 바라노라.
뒷면 큰아들 서원(徐元)은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이고, 차남 서영관(徐潁觀)은 현화사(玄化寺) ᤝ자대사(ᤝ紫大師)이며, 3남 서공(徐恭)은 경영전판관(景靈殿判官)이며, 4남 서순(徐諄)은 ᤝᤝᤝ同正이며, 5남 서성(徐成)은 내시수서랑동정(內侍授書郞同正)이며, 6남 서염(徐廉)은 춘방공자(春坊公子)이다. 딸은 네명인데, 장녀는 서면판관(西面判官) 金ᤝ之에게 시집갔으나 신축년(예종16, 1121) 겨울 10월에 공 보다 앞서 죽었다. 2녀는 전시병부랑중(前試兵部郞中) 왕의(王毅)에게 시집갔고, 3녀는 전(前) 내시시상의직장(內侍試尙衣直長) 이숙신(李淑晨)에게 시집갔고, 4녀는 서적점록사(書籍店錄事) 고양견(高陽堅)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9명, 손녀는 7명인데 모두 어리다. 다만 장녀 ᤝᤝ永ᤝᤝ春坊이 된다.
천회임자년(天會壬子年)(仁宗10,1132)겨울 11월에 쓰다.
서공묘지석문(七世 徐恭墓誌石文)(神道碑文)
1. 檢校太子太傅金紫光祿大夫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贈賹貞□公徐氏神道碑
2. 公諱恭利川郡人五代祖徐弼太祖聖朝功臣三重大匡內史令四代祖諱熙太師內史(令) 曾祖諱維傑追封大□□□□□(左)(僕)
3. 射祖諱靖中書侍郞平章事考諱鈞儒林郞檢校戶部尙書判將作監事致仕妃昌化郡大夫人李氏檢校禮部侍(郞)(給)(事)中(李)(唐)
4. 鑑之女公卽判將作監事第三子稟性寬仁公正年十一以祖蔭登仕版三十二調爲景靈殿判官屬□仁廟幸□□□□□□□
5. 有中者獨扈□駕者莫能中之□上忤慮公被薦射中非伐左右嘆服□上乃厚賞歷官句覆院八關寶判官神虎(衞)□□□□□
6. 署令歲在庚申例受黃州牧判官兼勸農使閤門祗侯淸白勤政以公餘栗代□貢救衝路驛人馬或植栗十一万餘□□□□□
7. 勞逸黃州人使之按察使以此馳□聞上嘉之命有司錄功登庸秩滿拜尙衣直長次拜閤門祗侯通事舍人試尙書□中員外郞
8. 兼三司判官賜緋魚袋被執柄者忌出爲羅州牧副使兼勸農使誧尙書戶部郞中賜紫金魚袋三載政理與黃州□□□期爲□
9. 閤門副使明李復兼三司判官歷尙書戶刑部郞中司宰少卿知閤門事兼大子中舍人出督慶尙晉州道按察使時□□功□□
10. 姓慅擾□下詔捕之承□命奇計捕二十五人而後其害息焉都兵馬使褒奏□獎擢之授少府監尙書刑部侍郞尋改吏□□□
11. 兼三司副使踰年□授朝散大夫試禮賓卿自郞中少卿之卿凡帶知閤門事九度太子中舍人六度未久拜判閤門事□□司使
12. 試吏部尙書樞密院副使兼太子賓客改□授兵部尙書同知樞密院事加拜院知院使判三司事□上知有公輔材□□授知(門)
13. 下省事戶部尙書轉參知政事加大中大夫尙書左僕射金紫光祿大夫大子大保遷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儀表□□
14. 氣㮣不羣以疾預上章懸車歷任以淸儉節用許國先是□出爲東西北面兵馬元帥所過方鎭咸服奉己□奉公□或西都□□
15. 叛公領奇兵備嘗險阻佐幕有功令歲在辛卯七月二十日遇疾卒于位春秋七十一□上聞之軫悼命尙食致祭于公三日□□
16. 視朝焉夫人江陽裴氏明淑知禮左散騎常侍景誠之長女所欠無一兒可保家故幼養景誠長子刑部郞中知閤門事晉之子□
17. 爲猶子猶子允材職在內侍尙舍直長儂於猶子爲妹之夫及八月四日以□國制飾葬于德水縣吉地猶子托矛爲誌台不獲□
18. 心哀而濡翰書銘于墓曰□嗚呼公乎季過縱心不謂之夭位兼將相不謂之少然未康吾民未盡吾道在公之心卽爲政□□□
19. 咸道在而俗薄時矣夫心□而業季命矣夫嗚呼公乎己矣夫□文林郞試尙書吏部員外郞知制誥賜緋魚袋洪倫□□敍撰書
※ 위 글중 □□등은 석면의 마멸이나 결실로 인해 일부만 보이는 글자를 추정판독하였거나(□) 또는 보충한 것들이다.
서공묘지석문(신도비문)(七世 徐恭墓誌石文 神道碑文) (번역문)
1. 돌아가신 검교태자태부(檢校太子太傅)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중서시랑(中書侍郞)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 추증시호 貞ᤝ公 서씨 신도비
2. 공의 이름은 서공(徐恭)이요 이천군 사람이다. 5대조는 서필(徐弼)로 태조(太祖) 때 공신(功臣)이며 삼중대광내사령이었다. 4대조는 서희(徐熙)로 (太)師內史(令)이었다. 증조 이름은 서유걸(徐維傑)이며 대ᤝᤝᤝᤝᤝᤝ<좌복(左僕)>射로 추봉되었다. 할아버지 이름은 서정(徐靖)이며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냈고, 아버지 이름은 서균(徐鈞)으로 유림랑(儒林郞)·검교호부상서(檢校戶部尙書)·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를 역임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어머니 창화군(昌化郡) 대부인(大夫人) 이씨(李氏)는 검교예부시(檢校禮部侍) <낭급사(郎給事)> 中 <이당(李唐)> 감(鑑)의 따님이다. 公은 바로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의 셋째 아들이며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었다.
3. 31세 때 조음(祖蔭)으로 사판(仕版)에 올랐다. 32세 때 경영전판관(景靈殿判官)으로 발탁되었다. 仁廟(仁宗)가 (平壤에 行次하였을 때 兩都관리들이 활쏘기를 하여) 가운데 맞히는 것을 (겨루었는데) 유독 왕을 호송하는 자들은 가운데 맞히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왕이 매우 언짢았는데 공이 천거를 받아 활을 쏘아 적중하니 좌우에 탄복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왕은 후한 상을 내렸다. 구복원(句覆院), 팔관보판관(八關寶判官), 신호(神虎)(衛)ᤝᤝᤝᤝᤝ署令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경신년(庚申年)(1140)에 황주목판관(黃州牧判官) 兼 권농사(勸農使)·합문지후(閤門祗侯)를 제수받았는데 청렴하고 정사(政事)에 부지런하였다. 公은 녹봉으로 지급받아) 남은 쌀로 (백성의) 공(貢)를 대납하거나 요충지역 도로 역참(驛站)의 인마(人馬)를 구제하였다. 또한 밤나무 11만여주를 심고 ᤝᤝᤝᤝᤝᤝ(백성들의 수고로움과 편암함을(보살피니) 황주사람들이 편하게 되었다. 안찰사(按察使)가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니 왕이 이를 듣고 가상히 여겨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공(功)을 기록하고 그에 알맞게 등용하도록 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어 상의직장(尙衣直長)에 임명하고 이어서 합문지후(閤門祗侯), 통사사인(通事舍人), 시상서(試尙書)ᤝ중원외랑(中員外郞) 兼 삼사판관(三司判官)에 이르렀고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았다. 집병자(執柄者, 권력자)의 시기를 받아 나주목부사(羅州牧副使) 兼 권농사(勸農使)인(외직으로) 나가 상서호부낭중(尙書戶部郎中)을 도와주게 되었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나주에 재임한지) 3년 동안의 다스림은 황주에서와 (다름이 없었다. ᤝᤝᤝ만기가 된 후) ᤝ합문부사(閤門副使)가 되고 이듬해 다시 삼사판관(三司判官)을 兼하고 상서호형부랑중(尙書戶刑部郞中), 사재소경(司宰少卿), 지합문사(知閤門事) 겸 大(太)子中舍人을 역임하였다. (이어서) 경상 진주도(慶尙 晉州道)를 감독하는 안찰사(按察使)가 되었다. 이때 ᤝᤝ(功) ᤝ(백)성들이 소요하였다. (왕이) 조서를 내려 체포하게 하였고, (공은) 왕명을 받들어 교묘한 계책을 25인을 사로잡아 이후 해로움이 그쳤다. 도병마사(都兵馬使)가 포상하기를 (왕에게) 아뢰니 (왕은 공을) 뽑아 소부감(小府監)·형부시랑(刑部侍郞)을 제수하고, 얼마 있지 않아 史ᤝᤝᤝ 겸 삼사부사(三司副使)로 고쳐 임명하였다. 이듬해에 조산대부(朝散大夫)·시례빈경(試禮賓卿)으로 임명하였다. 낭중소경(郎中少卿)의 경직(卿職)을 받고부터 무릇 지합문사(知閤門事) 9번, 태자중사인(太子中舍人)을 6번 겸임하였다. 오래지 않아 판합문사(判閤門事)ᤝᤝ司使, 시이부상서(試吏部尙書),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겸 大(太)子賓客을 고쳐 배수받았다. (그리고) 병부상서(兵部尙書),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고쳐 임명하였고, 더하여 추밀원지(樞密院知)(院事)와 (樞密院)院使, 판삼사사(判三司事)를 받았다. 왕이 공에게 재상의 재질과 ᤝᤝ이 있음을 알고 知(門)下省事,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임명하였다. (이후)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옮기고 大(太)中大夫,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금자광대부(金紫光大夫), 大(太)子大(太)保가 더해졌다. 그리고 중서시랑하평장사(中書侍郞下平章事)로 천직되었다. 공의 의표(儀表)는 ᤝᤝ하였고, 그 기개는 뭇사람들과 같지 않았다. 병 때문에 미리 치사 하고자 함을 왕에게 아뢰었다. (관직을) 역임할 때 청렴하고 검소함으로 나라 일을 돌보았다. 이전에 동서북면병마사원수(東西北面兵馬使元帥)로 나가 있을 때는 공이 가는 방진(方鎭)마다 감복하였다. (그리고 공은) 삿긴을 돌보는데는 ᤝ하고 공사를 돌보는데는 ᤝ하였다. 또는 서도(西都)(平壤)에서 ᤝᤝ叛했을 때 공은 날랜 병사를 거느리고 먼저 험한 요충지를 방비하여 막부(幕府)를 도와 공(功)이 아름답고 높았다. 신묘년(辛卯年)(1171) 7월 20일에 병을 얻어 자리에서 죽으니 춘추(春秋)가 71세였다. 왕이 부음을 듣고 몹시 슬퍼하고 상식국(尙食局)에 명(命)하여 公에 대한 제사를 드리게 하고, 3일(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다.
4. 부인은 강양배씨(江陽裵氏)로 총명하고 정숙하여 예의가 있으며,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裵)경성(景誠)의 맏딸이다. 흠되는 것은 집안을 보전할 자식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배경성의 맏아들인 형부낭중(刑部郞中) 지합문사(知閤門事) 진(晉)의 아들 ᤝ를 어려서부터 길러서 유자(猶子)로 삼았다. 유자의 이름은 윤재(允材)며 관직은 내시상사직장(內侍尙舍直長)이다. 나는 유자의 매부(妹夫)로서 8월 4일에 국제(國制)로서 덕수현(德水縣)의 길지(吉地)에 장례를 치르게 되자 유자(孺子)가 나에게 지(誌)를 지어줄 것을 부탁함에 사양할 수 없어 슬픔을 머금고 글을 썼다.
5. 묘의 명(銘)은 다음과 같다. 아아! 공이여! 나이 70세를 지났으니 요절하였다고 할 수 없고 지위가 장상(將相)을 겸하였으니 적다고 할 수 없도다. 그러나 우리 백성들은 아직 편안하지 못하고 우리의 도(道)를 아직 다하지 못하였다. 공의 마음은 곧 위정(爲政)ᤝᤝᤝ하는데 있었다. 모든 도는 있지만 풍속은 박(薄)할 때이다. 마음은 ᤝ하나 (王)業은 (天)命을 다했도다. 아! 공이여! 여기서 그만 두는 구나!
6. 문림낭시상서이부원외랑(文林郎試尙書吏部員外郞) 지제고(知制誥) 사비어대(賜緋魚袋) 홍륜(洪倫)이 글을 지었다.
이상의 신도비의 내용은 1 제명(題名), 2 서공(徐恭)의 가계(家系), 3 서공(徐恭)의 행적(行蹟), 4 서공(徐恭)의 상주(喪主)와 장례(葬禮), 5 명문(銘文), 6 비문(碑文) 지은이 등 6부문으로 나눌 수 있다.
서원묘표(徐遠墓表)
공의 휘는 서원(徐元)인데 후에 서원(徐遠)으로 고치고 원조는 서신일(徐神逸)인데 80에 태보내사령(종1품 국무총리) 서필(徐弼)을 낳고,서필은 서희(徐熙)를 낳았는데 태보내사령(종1품 국무총리)으로 고려에 공이 있어 광종때 녹권이 내렸다. 내사령은 상서우복야(정2품 부총리)로 추증된 서유걸(徐惟傑)을 낳고, 복야은 중서시랑평장사(정2품 부총리) 서정(徐靖) 을 낳고,시랑은 검교상서우복야(정2품 부총리) 서균(徐均)을 낳고, 상서는 검교 태자 태사 상서좌복야(정2품 부총리) 서순(徐淳)을 낳고, 태사는 병부낭중 서저(徐氐)를 낳고 ,낭중은 감찰어사 서의(徐義)를 낳고, 어사는 합문사 서온(徐溫)를 낳고,합문사는 태관서령 겸 직문한서(太官署令兼直文翰署) 서염(徐恬)을 낳고,직문한은 판내부사사(判內府寺事 정2품 부총리) 서진(徐璡)을 낳았다.
公諱元。後改遠。利川縣人。遠祖神逸。年八十。生子太史內史令弼。太史生太史內史令煕。有功高麗。光王朝賜錄券。內史令生追封尙書右僕射惟傑。僕射生中書侍郞平章事上柱國靖。侍郞生檢校尙書右僕射勻。 從金傍。 尙書生檢校太子太師尙書左僕射淳。太師生兵部郞中氐。卽中生監察御史義。於公爲曾王父。御史生閤門事溫。閤門生太官署令兼直文翰署恬。直文翰生判內府寺事璡。內府娶有備倉注簿光陽金百鍊之女。以至正四年辛亥十二月戊寅。生公。公自幼。天性厚重廉謹。旣長。不營產業。不求聞達。日以琴酒自娛。常曰。人之富貴貧賤。自有天命。不可妄干。忠宣王四年。充寶馬陪行首。尋拜密直堂後。入近侍衛。擢左右衛保勝郞將。歲丙午。國家擇公正廉謹者差守令。以公守竹州。公至果有政績。父老至今稱慕焉。洪武五年壬子八月。以發背卒于家。年六十二。以禮葬于川寧西村品谷里象頭山北麓。公凡再娶。竹山林氏。生一女。適中顯大夫典客令崔深。無子。靈嵒崔氏。正尹洪義之女。密直司知申事宋璘。其外大父也。以至元丙子正月生。貞靜慈愛。動循禮法。擇配歸于公。事舅姑以誠。敎諸子有方。乙巳三月。年九十。病歿。祔于公塋。生六男三女。長繼年。二男三男六男皆先歿。四男曰選。資憲大夫判漢城府事。五男宗浚。中直大夫典農正。女長先歿。次適嘉善大夫戶曺典書崔賢進。次適奉翊大夫判司宰寺事朴林貴。判漢城娶司宰令崔湖之女。生一男四女。男達。中訓大夫喬桐等處管軍萬戶兼知喬桐縣事。女長適宣務郞司譯院注簿李士敏。先歿。次適奉直郞大興縣監盧皓。次適宣敎郞廣州判官李蓄。次適承議郞司憲監察許倫。典農娶判典醫監事朴齊之女。生一男曰耇。宣略將軍忠佐侍衛司中領攝護軍。典書生二男。長九龍。宣務郞洛河渡丞。次洽。充別侍衛。司宰生二男。長簡。宣務郞都染署令。次珍。承議郞司憲監察。喬桐娶左議政黃諱喜之女。生二男。遭,遇皆幼。司譯生二男二女。大興生三女。判官生一男一女。皆幼。洛河生三男一女。皆幼。都染生二男三女。長適東部錄事鄭䪫。餘幼。監察生一男二女。幼。判漢城公請銘甚勤。余惟虧盈損益。相因不窮。實天道久長之妙也。況於人事乎。徐之積善也遠矣。自太史令。至左僕射凡六世。累卿累公。自兵部郞中。至公又六世。卛皆位不滿德。其積善之慶。必自今大發於判漢城公。而垂諸後世也。詎可量哉。余之從漢城公遊非一二歲。銘其先塋。義不敢辭。是敍其世系歷官事顚末而爲之銘。銘曰。 利川之徐。其來久矣。卿相相承。門閥罕比。胡公之賢。天嗇其位。屈伸消長。天道乃爾。顯允漢城。克振家風。綿綿餘慶。洎于無窮。川寧西畔。象頭山顚。有峙其邱。崔氏祔焉。史筆不諛。垂千萬年。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 큰아버지: 서눌(徐訥) 종1품 문하시중門下侍中)
- 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본인: 서정(徐靖) (정2품 평장사.종1품 판삼사사)
- 동생: 서존(徐存) (정3품 병부상서 태원군)
- 작은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사촌동생: 서린(徐嶙) (종2품 판대부사)
- 작은아버지 :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사촌동생: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