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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왕 계보 == | == 부여왕 계보 == |
2022년 10월 21일 (금) 16:50 판
서족(중국어: 畲族 Shezú[*], 중국조선어: 써족)
써족(서족)(여족)(畬族)=서족(徐族)=여족(餘族) 동이시조의 한집안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 혹은 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중국 본토에 거주하는 소수민족 중의 하나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공인한 56개의 소수민족 중 20번째로 많은 민족으로 중국의 2000년 통계에 의하면 709,592명이 살고 있고, 야오족과 먀오족과 관련이 깊다.
서족은 푸젠성에서 가장 많은 소수 민족이다. 또 저장성, 장시성, 광둥성, 안후이성 등에도 많은 서족들이 분포하고 있다. 푸젠 성 린장 현에는 소창 서족향이 있고, 저장 성에는 징닝 서족 자치현이 있다.
현재 서족의 대부분은 근처의 하카와 같이 중국어의 여러 어군 중의 하나인 하카어를 쓴다. 독자적인 언어인 서어중국어: 畲语는 몽몐어족에 속하며, 광둥성에 1,200여명 가량의 화자가 있다.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56개 민족의 하나로 동남부의 소수민족이다. 현재 주요 분포지역은 저장성(浙江省) 징닝쉐족자치현(景宁畲族自治县, 경녕사족자치현) 및 푸젠성(福建省), 장시성(江西省), 광둥성(广东省), 안후이성(安徽省) 등지의 산간지역에 산재해 있으며 대부분이 한족과 함께 거주한다. 2000년 통계조사에 따른 인구는 70.9만으로 55%가 푸젠성(福建省), 27.4%가 저장성(浙江省), 12.1%가 장시성(江西省), 4.2%가 광둥성(广东省)에 거주하고 있다. 서족(畲族, 사족)은 한족의 객가인(客家人)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여 언어와 풍습에 있어 상당히 유사하다.
써족의 주요 거주지는 중국 동남부의 구릉지대로서 평균 해발이 500-1,500m에 해당되는 지역이며 산들이 중첩되고 있다. 또한 해양과도 가까워서 습기가 많다.
써족 거주 지역은 대개 토양이 비옥하며 물산이 풍부하다. 주요 농산품으로는 쌀, 고구마, 보리류, 유채(油菜), 콩류, 담뱃잎 및 감자 등이다. 산지(山地)에서는 대나무 및 다양한 종류의 목재가 많이 생산된다. 써족 주요 거주지의 토산품은 찻잎, 순간(筍干), 땅콩, 유차(油茶), 마(麻), 향고(香菇)버섯, 장뇌(樟腦), 송유(松油)와 각종 약재가 있다. 복건성과 절강성의 찻잎은 명성이 높다. 써족 지역 산지에는 광산자원도 풍부한데 석탄, 철, 금, 구리, 석묵(石墨), 석고(石膏), 유황(硫黃), 운모(雲母) 및 도자기 흙 등과 각종 유색금속이 매장되어 있다.
써족의 민족 기원에 관해서는 견해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풍속 및 문화 등 연구 결과 일반적으로 써족은 요족(瑤族)의 한 갈래가 발전하여 독립된 민족 공동체를 형성한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써족은 고대 양자강 하류에 분포하였던 월인(越人)의 후예이며 특히 그중에서도 춘추전국 시대의 월왕(越王) 구천(句踐) 또는 범려(范蠡)의 자손으로서 진한(秦漢) 시대 백월(百越)의 후예 또는 한진(漢晋) 시대 월(越)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있다. 써족의 발원지에 관하여는 각지의 써족 지계(支系) 모두 광동성 조주부(潮州府)의 봉황산(鳳凰山)을 민족의 발상지로 인식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써족의 시조인 반호(盤瓠)가 봉황산에 묻혀 있다고 하며, 써족 여성의 머리장식이 봉황양식인 것도 봉황산에 묻힌 시조를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서기 7세기 초 수당(隋唐) 교체기에 써족은 이미 오늘날의 복건성, 광동성 및 강서성이 접경하는 산악지대에서 거주하였다. 송(宋)대에는 복건성의 중부와 북부 일대로 계속 이주하였으며 명청(明淸) 시대에 복건성 동부 및 절강성 남부의 산악지역에 대거 출현하였으며 이 시기에 한족이 이주해 오면서 기본적으로 오늘날의 분포상황을 형성하였다. 강주(江州) 동북부의 써족은 원래 광동성 조주부(潮州府)의 봉황산에 거주하였으나 후대에 복건성 정주부(汀洲府)의 영화현(寧化縣)으로 이주하였다가, 대략 송원(宋元) 시대부터 명대 중엽 이전까지 강서성의 동북지역으로 재차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안휘성의 써족은 약 1백여 년 전에 절강성의 난계(蘭溪), 동려(桐廬) 및 순안(淳安)현 등에서 이주하였다.
써족은 역사적으로 한족과 오랜 동안 함께 살거나 교류를 하여 왔기에, 사회발전 및 경제수준 등이 한족과 비슷한 단계에 있어 왔다.
써족이 자신을 부르는 명칭은 “산커”(山客), “산거”(山蛤), “산다”(山達) 등인데, 이 가운데 “거”(哈)와 “다”(達)는 ‘손님’(客人)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써족의 자칭은 ‘산에 사는 손님’ 또는 ‘산을 타고 찾아 온 사람들’이란 뜻이다. 이러한 명칭은 이 종족집단이 대대로 산간지대에서 거주하여 온 역사를 반영한 것이다. 한족이 부르는 명칭인 ‘畬族’(여족, 한어 발음으로는 “써”족)은 화전경작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남송(南宋) 말기의 사서(史書)에 ‘畬民’(여민) 이라는 기록에서 유래되었으며 당시 이들이 산간에 거주하며 화전(火田)을 경작했던 사실과 관계가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1954년부터 1960년까지 진행된 제2단계 민족조사 및 식별사업을 거쳐 1964년 중국의 제2차 전국 인사조사시에 새롭게 인정된 15개 소수민족에 포함되었으며, 동 민족 집단의 공식명칭을 ‘畬族’(여족, “써”족)이라고 정하였다.
써족의 언어는 시노 · 티베트 어계(漢藏語系)의 묘 · 요 어족(苗瑤語族)에 속한다. 실제 생활에서 써족 대부분은 한어(漢語)의 객가(客家) 방언에 매우 가까운 언어를 사용하나 발음상에 객가어(客家語)와는 다소 다르다. 광동성의 혜양(惠陽), 해풍(海豊), 증성(增城) 및 박라(博羅) 일대에 거주하는 써족은 묘어 갈래(苗語支)의 포노어(布努語)에 가까운 언어를 사용한다. 써족은 대개 거주지 한어 방언을 말할 수 있다.
써족은 역사적으로 고유한 민족문자가 없으며 한문(漢文)을 통용하여 왔다.
2000년 현재 써족의 6세 이상(6세 포함) 전체 인구의 최종학력 비율을 살펴보면, 미취학자가 9.44%이며, ‘문맹 퇴치반’ 과정 3.43%, 초등학교 과정 49.73%, 중학교 과정 28.59%, 고등학교 과정 4.54%, 중등전문학교 과정 2.34%, 초급대학 과정 1.11%, 대학 과정 0.64%, 대학원 과정 0.03%이다. 한족 및 중국 전체 인구 평균에 비하여 전반적으로 학력수준이 다소 낮다.
써족의 산가(山歌)는 민족적 특색이 잘 나타나며 써족 민간문학의 주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산가 가운데 써족의 민족기원과 이동과정을 나타내는 《고황가(高皇歌)》와 《인표왕가(麟豹王歌)》가 있고 또한 노동과 생활을 찬양하거나 애정을 표현하는 ‘잡가’(雜歌), 그리고 한족 소설이나 써족 신화전설 등에서 소재를 따온 《종경기(鍾景祺)》, 《난전옥(蘭佃玉)》 같은 ‘소설가’(小說歌)가 있다.
써족의 전통가요를 부르는 형식은 독창, 대창(對唱), 제창(齊唱) 등의 일반적인 방식 이외에 ‘쌍조락’(雙條落)이라고 부르는 두 목소리의 부분 이중창이 있는데 이는 한 사람이 2개 글자 또는 4개 글자를 선창하면 다른 사람이 이어서 다시 따라 부르는 방식이며, 이는 중국 내 민가(民歌) 부르는 방식 가운데 매우 드문 형식이다.
써족의 민간 공예예술에는 민족의 특색이 잘 나타나는데, 특히 복식의 자수와 두립(頭笠)의 편직(編織)방식이 대표적이다. 써족 부녀자들은 의상과 치마에 각종 꽃과 새 모양은 물론 기하문양을 자수(刺繡)한다. 써족의 두립(頭笠)과 합수건(合手巾)은 편직(編織)형식으로 만드는 특색 있는 민간공예로 명성이 있다.
써족은 복장에서 청색(靑色)과 남색(藍色)을 숭상한다. 남자들의 복장은 한족과 거의 차이가 없다. 여자들은 거주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는데 공통적인 특징은 상의에 자수를 많이 한다는 것이다. 특히 복건성 복정(福鼎)과 하포(霞蒲)지역의 써족 부녀자들은 상의의 옷깃, 우측 깃(右襟), 소매 끝 등 거의 모든 곳에 꽃과 새, 봉황 등의 문양을 자수로 장식하였다. 써족 여성들의 복장 가운데 가장 특색 있는 것은 봉황장(鳳凰裝)이다. 홍색의 머리끈으로 머리 정상부분을 꾸며 봉황의 머리를 나타내며, 상의와 치마 등에도 홍색, 황색 실 및 금실, 은실 등으로 테두리에 자수를 놓아 봉황의 목, 몸체 및 깃털을 나타낸다. 또한 허리 뒷부분에도 장식을 하여 봉황의 꼬리를 상징하고 전신에 부딪칠 때마다 소리가 나도록 은(銀)장식을 하여 봉황의 소리를 나타낸다.
최대 분포지인 복건성에는 중국 내 써족 전체 인구의 약 52.9%인 375,193명이 거주한다 (복건성 전체 인구인 34,097,947명의 약 2.1%임). 또한 절강성에도 중국 내 써족 전체 인구의 약 24.1%인 170,993명이 거주한다. 이외에 강서성(77,650명), 귀주성(44,926명)에 다수 거주하며 여타 각 성급 행정구역에는 각기 1천 명 미만의 극소수 써족이 산재한다.
2000년 현재 써족은 향촌지역 거주비율이 75.65%로 중국 내 전체 소수민족 평균치와 같지만 한족(61.83%) 및 중국 전체 인구 평균(63.08%)에 비하여 다소 높다. 반면 도시지역 거주비율 12.26%와 준도시화 지역인 진(鎭) 거주비율 11.18%는 중국 내 전체 소수민족의 도시 및 진(鎭) 거주비율인 11.87% 및 11.57%와 거의 같다.
써족의 산가(山歌)는 민족적 특색이 잘 나타나며 써족 민간문학의 주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산가 가운데 써족의 민족기원과 이동과정을 나타내는 《고황가(高皇歌)》와 《인표왕가(麟豹王歌)》가 있고 또한 노동과 생활을 찬양하거나 애정을 표현하는 ‘잡가’(雜歌), 그리고 한족 소설이나 써족 신화전설 등에서 소재를 따온 《종경기(鍾景祺)》, 《난전옥(蘭佃玉)》 같은 ‘소설가’(小說歌)가 있다.
써족의 전통가요를 부르는 형식은 독창, 대창(對唱), 제창(齊唱) 등의 일반적인 방식 이외에 ‘쌍조락’(雙條落)이라고 부르는 두 목소리의 부분 이중창이 있는데 이는 한 사람이 2개 글자 또는 4개 글자를 선창하면 다른 사람이 이어서 다시 따라 부르는 방식이며, 이는 중국 내 민가(民歌) 부르는 방식 가운데 매우 드문 형식이다.
써족의 민간 공예예술에는 민족의 특색이 잘 나타나는데, 특히 복식의 자수와 두립(頭笠)의 편직(編織)방식이 대표적이다. 써족 부녀자들은 의상과 치마에 각종 꽃과 새 모양은 물론 기하문양을 자수(刺繡)한다. 써족의 두립(頭笠)과 합수건(合手巾)은 편직(編織)형식으로 만드는 특색 있는 민간공예로 명성이 있다.
써족은 복장에서 청색(靑色)과 남색(藍色)을 숭상한다. 남자들의 복장은 한족과 거의 차이가 없다. 여자들은 거주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는데 공통적인 특징은 상의에 자수를 많이 한다는 것이다. 특히 복건성 복정(福鼎)과 하포(霞蒲)지역의 써족 부녀자들은 상의의 옷깃, 우측 깃(右襟), 소매 끝 등 거의 모든 곳에 꽃과 새, 봉황 등의 문양을 자수로 장식하였다. 써족 여성들의 복장 가운데 가장 특색 있는 것은 봉황장(鳳凰裝)이다. 홍색의 머리끈으로 머리 정상부분을 꾸며 봉황의 머리를 나타내며, 상의와 치마 등에도 홍색, 황색 실 및 금실, 은실 등으로 테두리에 자수를 놓아 봉황의 목, 몸체 및 깃털을 나타낸다. 또한 허리 뒷부분에도 장식을 하여 봉황의 꼬리를 상징하고 전신에 부딪칠 때마다 소리가 나도록 은(銀)장식을 하여 봉황의 소리를 나타낸다.
써족은 산지에 주거함에 따라 과거에는 산지에서 재배가 잘 되는 고구마가 주식이었다. 그래서 써족 사회에는 “늙을 때까지 고구마 요리를 먹는다(番薯絲吃到老)”라는 말까지 있다. 오늘날 써족의 주식은 쌀이고 이외에 밀, 보리, 고구마류 및 콩류 등 다양한 잡곡을 보조식량으로 먹는다. 부식으로 육류와 사계절 채소를 먹는다.
써족 남성은 술을 매우 좋아하며 절강성 경녕(景寧)지역의 써족은 토속주인 녹곡주(綠曲酒)를 즐겨 마시며 복건성 복안(福安)지역의 써족은 고구마로 만든 번서주(番薯酒)를 즐겨 마신다.
써족의 전통적인 주택은 거주지에 따라 차이가 있다. 복건성 경녕(景寧)지역의 써족은 황토로 담벽의 토대를 만들고 허리 이상의 윗부분에는 나무를 가로질러 골격을 만든 후 대나무나 나뭇가지 등으로 밖을 덮은 후에 그 사이는 흙으로 채우는 방식으로 집을 짓는데 이를 진흙 집인 이간(泥間)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이 지역에는 흙과 나무를 이용하여 짓는 와방(瓦房)이 보편적이다.
또한 복건성 복안(福安)지역의 써족은 과거에 대나무로 건물 골격을 만들고 대나무 또는 갈대 줄기 등을 엮어 벽을 구성하고 지붕에는 풀이나 나무껍질 등으로 덮는 방식으로 집을 지었는데, 이를 현초료(懸草寮)라고 부른다. 오늘날 이 지역의 써족은 2층 또는 3층집을 지어 사는데, 위층에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거주하지 않고 식량이나 물건을 둔다.
써족은 분산하여 사는데 대개 몇 가구 또는 수십 가구가 모여 자연적으로 촌락을 형성하였다. 또한 주변에 한족 마을들이 많다. 써족 마을에는 동성동조(同姓同祖)로 공유되는 ‘사당’(祠堂)과 혈연적 유대로 구성되는 ‘방’(房)5)이라는 사회생활 단위조직이 있다.
써족은 일반적으로 같은 성(姓)과는 결혼하지 않으며 특히 반호(盤瓠) 전설에 등장하는 성(姓)끼리는 혼인이 규제되고 있다. 성이 같더라도 조상이 다르면 결혼을 할 수는 있지만 매우 드물다. 2000년 현재 써족의 다른 민족과 통혼율(通婚率)은 49.9%로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통혼율이 6번째로 높다.(2000년 중국 인구조사통계)
여자들이 시집을 갈 때는 일반적인 예물 이외에 농기구와 두립(頭笠), 사의(簑衣: 띠 또는 짚으로 만들어 비올 때 입는 옷)를 가져간다.
써족 사회는 역사적으로 화장(火葬)이 성행하였으나, 20세기 전반기에는 토장(土葬)이 보편적으로 행하여졌다. 장례의식 및 절차는 한족과 거의 같다.
역사적으로 써족은 장기간 한족과의 교류와 접촉을 통하여 한족의 문화와 관습 등을 많이 수용한 결과 전통명절과 절기에 있어서도 한족의 명절과 절기의 대부분을 지낸다. 즉 춘절(春節: 구정), 원소절(元宵節: 정월 대보름), 청명절(淸明節), 단오(端午), 중추절(中秋節: 추석), 중양절(重陽節), 동지절(冬至節) 및 제석(除夕) 등을 지낸다.
한화(漢化)의 정도가 깊은 영향으로 민족의 역사가 오래되고 인구가 많은 다른 소수민족들과는 달리, 써족 단독의 고유한 명절과 절기는 없으며 다른 소수민족들과 공통으로 지키는 절기가 있다. 예를 들어, ‘삼월삼’(三月三)에는 잡곡밥을 만들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며 ‘사월팔’(四月八)에는 산에 올라 노래를 부르고(對歌) 찹쌀밥 또는 보리밥 등을 먹는다. 조상 숭배를 중시하여 3년에 1번씩 대제(大祭)를 열기도 한다. 절기 중에는 금기도 많은데, 예를 들어, 2월 19일의 관음(觀音) 탄신일에는 분뇨를 버리지 않아야 하며 3월 3일에는 밭에서 일하지 않는다.
써족의 전통적인 신앙은 조상숭배이다. 써족은 민족 시조신인 반호(盤瓠)와 역대 조상들에 대한 제사를 매우 경건하게 지내는데 씨족 토템신앙과 전설 그리고 관련된 노래와 화상(畵像)이 전해져 내려온다. 민간신앙 중에는 다신숭배도 많이 남아있다. 이외에도 일부 지역에는 불교, 도교, 천주교와 개신교를 신봉하기도 한다.
써족은 1개의 현급(縣級) 민족자치구역이 있는데 주요 거주지인 절강성에 경녕 써족 자치현(景寧畬族自治縣, 1984.12.24 설립)이 있다. 이외에 복건성, 절강성 및 강서성 등지의 써족 밀집 지역에 약 30여 개의 써족 민족향(民族鄕)이 있다.
서씨는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부여족(扶餘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서씨족(徐氏族)=부여족(扶餘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 고조선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 주나라 성왕은 四夷(동이)에 선린융화 정책을 실시하였고, 강왕 때 주(周)의 정책이 강성(强性)을 띠므로 숙신은 주(周)를 견제하기 위하여 서국(徐國)과 친선을 도모하여 동쪽(동이) 서언(徐偃)에게 왕을 호칭하게 하여 서언왕이라 하였다. 서언왕은 동이의 세력을 규합하고 주(周)에 대한 총력전을 실시하여 종주(장안과 낙양)까지 공략하여 주(周)의 세력을 쇠약하게 하고 주나라 소왕을 물에 빠져 죽이는 일이 발생했다. 주나라 목왕때 숙신은 서언왕을 회대 지역에서 이족(동이)의 대표로 하여 주(周)를 견제하고 주(周)에 대항하니 주나라 목왕은 동방의 동이 세력이 막강한 것을 두려워하여 서언왕에게 백(伯)의 직위를 주어 주(周)의 세력을 강화시키는 정책을 폈다. 주나라 목왕은 초나라를 이용하여 서언왕을 제압하고 중원의 패자가 된 후 견융을 정벌코자 하나 실패하고 제후국들 사이도 나빠졌다. BC.512년 서국(徐國)은 오나라에게 멸망하고 서자 후대에 서씨(徐氏)라 하여 명성있는 세가대족(世家大族)으로 산동 연주 동해에 거처하였다.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 혹은 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
▲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
목차
백제 부여씨의 분파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
부여 부여씨의 인물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
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
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
백제 부여씨의 인물
우복(優福)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부여고(夫餘古)
부여력(夫餘歷)
부여고(夫餘固)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
부여교기 - 30대 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
일본의 백제계 성씨
쿠다라(百濟くだら)), 오우치씨(大內おおうち), 토요타(豊田とよた), 후지와라(藤原ふじわら),마쓰다(松田まつだ), 이시노(石野いしの), 스가노(菅野すがの), 오오카(大丘おおか)), 오카야(岡屋おかや), 하루노(春野はるの), 오하라(大原おおはら), 나카노(中野なかの), 쿠니모토(國本くにもと), 나가다(長田ながた) 등의 복성과, 하야시(林はやし), 후미(文ふみ)씨 등의 단성이 있습니다.
부여왕 계보
- 동명왕(東明王)
백제왕 계보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숭렬전(崇烈殿)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삼충제(三忠祭)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