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연주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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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 연주암(冠岳山 戀主庵)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관악산 연주봉 남쪽 기슭에 있는 사찰.

소재지: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산12-1번지

관악산의 최고봉인 연주봉(629m) 절벽 위에 연주대(戀主帶:경기도 기념물 제20호)가 자리하고 있고, 그곳에서 남쪽으로 약 300m 떨어진 지점에 연주암이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며 나한도량(羅漢道場)으로서 알려져 있다.

연주암은 677년(문무왕 17)에 의상(義湘:652~702)이 창건한 절이다. 의상은 관악산 연주봉 절벽 위에 의상대를 세우고 그 아래 골짜기에 절을 짓고 관악사(冠岳寺)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 이후부터 고려 말까지는 거의 폐사되다시피 하다가 1392년(태조 1) 태조 이성계가 의상대와 관악사를 중수하고는 조선왕조의 번창을 기원하는 200일기도를 하였다.

연주대는 이성계가 무학대사의 권유로 의상대 자리에 석축을 쌓고 30㎡ 정도의 대를 구축하여 그 위에다 암자를 지은 것이다. 1411년(태종 11), 동생인 충녕에게 보위를 양보하고 전국을 떠돌던 양녕과 효령이 이곳에 머무르면서 관악사를 현위치로 옮기고 연주대의 이름을 따서 연주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위치를 바꾼 이유는 관악사의 원래 위치에서는 왕궁이 바로 내려다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관악사의 이름이 연주암으로 바뀐 유래에 대하여는 다른 견해가 있다. 고려의 충신이었던 강득룡(康得龍)과 서견(徐甄)·남을진(南乙珍) 등이 그 자리에서 고려의 수도였던 송도(松都)를 바라보며 통곡하였는데, 이 때문에 ‘주인을 그리워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이 절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중수를 하였는데, 1868년(고종 5) 중수작업 때에는 명성왕후의 하사금으로 극락전과 용화전(龍華殿)을 신축하였으며, 1918년에는 경산(慶山)의 주도 아래 중수 작업이 이루어졌고, 1928년에는 재운(在芸)에 의해, 1936년에는 교훈(敎訓)에 의해 새로 건물을 세우거나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본당인 대웅전과 그 뒤편에 금륜보전(金輪寶殿:삼성각)이 있고 연주대에 응진전(應眞殿)이 있다.

금륜보전은 현재의 건물 중 제일 오래된 건물로서 1929년에 신축한 것이고 대웅전 및 기타 건물은 1970년대 이후에 지은 것이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을 모신 천수관음전과 효령대군 영정(경기도 지방문화재 제81호)을 모신 효령각은 1996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대웅전 앞에 있는 높이 3.2m의 고려시대 양식의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4호)은 효령대군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탑은 전체적으로 균형감이 뛰어나며 단아한 느낌을 주고 있다. 16나한의 모습을 비단에 그린 탱화가 응진전에 봉안되어 있고, 약사여래 석상이 응진전 옆의 암벽에 마련된 감실에 봉안되어 있는데 고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상은 기복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서견(徐堅)

고려 문신. 장령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상장군 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徐贊),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후기의 문신. 초명은 반(頒),

본관은 이천 서씨(利川徐氏)

1세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부수상)

2세 서필(徐弼 내의령.종 1품. 수상)

3세 서희(徐熙 내사령. 종 1품. 수상)

4세 서유위(徐惟偉) (장야서령.정 3품.장관)

5세 서면(徐冕 주부.정 4품.차관보)

6세 서린(徐嶙) (판대부사.정 2품.부수상)

7세 서찬(徐瓚 (장령. 정 4품. 차관보)


호는 여와(麗窩) 또는 죽송오(竹松塢). 일찍이 안향(安珦:1243~1306)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1369년(공민왕18)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391년 사헌장령(司憲掌令)에 이르렀다. 조선왕조의 건국과 관련하여 정몽주(鄭夢周)․강회백(姜淮伯)․김진양(金震陽) 등과 함께 상소하여 혁명세력인 조준(趙浚)․윤소종(尹紹宗)․오사충(吳思忠) 등을 탄핵하다가 정몽주가 격살당하자 김진양․이숭인(李崇仁)․이종학(李種學)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함에 따라 금천(衿川)으로 은둔하였으며, 한 때는 이색(李穡)․원천석(元天錫)․길재(吉再) 등 고려의 절신(節臣)들과 함께 정선(旌善)에 모여 시와 술로 서로를 위로하며 고려를 사모하였다. 선조 때 대사간에 증직되고 충신묘에 봉해졌으며, 충현서원(忠賢書院)․삼현사(三賢祠)에 신주가 모셔지고 또 두문동서원과 경현사(景賢祠)에 제향되었다. 그는 일찍이 원천석․범세동(范世東)․탁신(卓愼) 등과 문답하여 ≪동방사문연원록 東方斯文淵源錄≫을 저술하고, ≪화해사전 華海師全≫을 편집하였으며, 현전하는 시문은 고려를 그리워한 한시와 자신을 고죽(孤竹)에 비긴 시조가 각 1수씩 남아 있을 뿐이다.


관악산 연주대(冠岳山 戀主臺)

연주대(戀主臺)는 원래 의상대(義湘臺)라고 불렸습니다. 신라 고승 의상조사가 관악산의 수려함에 끌려 산정에 암자 의상대를 세웠다고 합니다. 의상대(義湘臺)라는 이름이 연주대(戀主臺)로 바뀐 것은 고려의 충신들 때문이었습니다. 고려가 멸망하자 강득용(康得龍)과 서견(徐甄), 남을진(南乙珍), 조견(趙狷) 등 고려의 유신(遺臣)들은 관악산으로 은신을 했습니다.

관악산 연주암(冠岳山 戀主庵)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관악산 연주봉 남쪽 기슭에 있는 사찰.

도원가곡비의 7현

전오륜, 이색, 최문한, 서견, 원천석, 구홍, 길재

충현서원지(忠賢書院址)

경기도 광명시에 있는 조선후기 강감찬 등 3인의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교육시설. 시도기념물.내용충현서원은 원래 1658년에 강감찬(姜邯贊), 서견(徐堅), 이원익(李元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고려의 강감찬이 주향되어있고, 서견, 이원익이 배향되어 있다. 삼현사(三賢祠)라 불리었는데, 1676년에 충현서원(忠賢書院)고 사액이 내려지고 예조좌랑이던 박징(朴徵)이 치제하였다. 1868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원래 창건된 곳이 금천현 한천동인데 그 지명을 따서 한천사(寒泉祠)라 하기도 하였다. 이원익의 영당(影堂)인 관감당이 1694년에 건립되어 현존하고 있다. 1985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원 충현서원지가 현 위치가 아님이 밝혀져 지정 해제되었다. 현재 서원은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아 있다.

화순 성산사

1579년경 이천서씨 서의립(徐義立1547~1631)이 화순현 소곡마을에서 거주하다가 입향한 고촌이다.

1907년 건립했던 강당 충의당(忠義堂)과 독특한 형태의 사당 성산사(星山祠)가 외삼문, 충의당 뒤로하고 자리하고 있다. 핑게 없는 무덤 없듯이 사연없는 목조물은 없다.

이곳에는 고려말 절인이었던 여와(麗窩) 서견(徐甄)과 송담(松潭) 서강(徐岡)을 향사하고 있다. 규모는 정 3칸, 측1칸, 맞배, T자형으로 구성됐다. 충의사는 정면 4칸에 측면 2칸이다, 높이가 낮아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내부에는 대청형으로 위패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 배향된 여와(麗窩)또는 죽송오(竹松塢) 서견(徐甄)은 1391년(공양왕 3) 사헌부 장령으로 있으면서 간관이던 김진양 .이확 등과 함께 조준. 정도전. 남은을 탄핵했으나 그 해에 정몽주가 살해되고 이성계와 조준·정도전 등이 실권을 장악하자 간관(諫官) 김진양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가 조선개국 후 풀려나 은거했다. 은거하면서 지은시가 절인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암반(巖畔) 설중고죽(雪中 孤竹)이야 반갑기도 반가왜라. 묻노라 고죽군(孤竹君)이 네 어떠하던인다. 수양산(首陽山) 만고청풍(萬古淸風)에 이제(夷齊)를 본 듯 하여라.

즉 바위 언저리에, 쌓인 눈을 제치고 서 있는 외로운 대나무야 너를 보니 몹시도 반갑구나! 물어 보거니와, 백이 숙제의 부친인 고죽군을 네가 보기엔 어떠하더냐? 너로 인하여 그 옛날 수양산에 숨어서, 끝내 맑은 절개를 지킴으로 만고에 이름을 빛낸 백이와 숙제 형제를 새삼 보는 것 같도다.

그는 이들에 의해 고려가 멸망하자 그은 금천에 숨어 지내면서 앉을 적엔 북쪽을 향하지 않았고, 일생을 마칠 때까지 한양의 성곽을 대면하지 않으며 절의를 나타냈으며 이때 고려가 망한 일을 분개하며 지었다는 술회(述懷)라는 제목의 시가 널리 읽혀지고 있다.

천년이나 되는 성스러운 도업지를 바라볼수 없네/충성되고 어진이들 밝은 임금을 도왔건만 삼국을 통일하신 왕건 태조의 공은 어디 가고/전 왕조(고려)의 역사 길지 못한 것이 한스럽네. 千載神都隔漢江 忠良濟濟佐明王 統三爲一功安在 却恨前朝業不長

고려의 신하로서 망해 버린 왕조를 그리워 하는 시인의 정서가 잘나타난 이 시는 새 왕조의 조선 태종에게는 반역에 해당되어 조정에서 중신들이 벌하기를 청하였으나 태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서견은 고려의 신하로서 자신이 섬기던 임금을 잊지 않으니 또한 백이·숙제와 같은 인물이다”라고 하고 그를 국문하지 말고 관리로 임명라고 명했다.

이후 청백리(淸白吏)로 뽑고 벼슬을 내렸으나 끝내 오르지 않고 관악산 최고봉으로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절벽이 솟아 있는데,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약간의 석축을 쌓아 올린 곳에 연주대에서 고려의 충신인 강득룡(康得龍)·남을진(南乙珍) 등의 유신(遺臣)들과 이곳에서 멀리 송경(松京:개경) 쪽을 바라보며 두문동(杜門洞)에서 순국한 72인의 충신열사와 망국 고려를 연모하며 생을 마감한다.

그는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선조 때 대사간에 추증되었다. 원천석(元天錫)․범세동(范世東)․탁신(卓愼) 등과 문답하여 동방사문연원록(東方斯文淵源錄)을 저술하고, 화해사전(華海師全)을 편집했다.

충의당 건너에는 1896년 류인석과 함께 충북 제천, 충주에서 일군(日軍)과 전투하여 승리, 원주 장산에서 패한후 중국으로 망명 순국한 서상룡(徐相龍, 1862生~1944)을 위한 정자 삼산정(三山亭)이 1946년에 지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해 자리하고 있다.

협곡으로 된 일대에는 호계(虎溪)가 흐르고 있으며 이곳의 경치와 마을 입구에 지석강이 흐르고 있어 이에 '호계(虎溪)에 성한 수풀'이라는 시가 전하고 있다.

높은산 깊은 골짜기에 붉은안개 엉킨 마을이요/옛나무 긴숲에 푸른빛이 잠긴 물가로다 좋은새 날로 찾아와 자주 벗을 부르고/깊은 그늘은 세월과 더불어 함께 옮기구나 高山深壑蒼烟里 古樹長林綠水涯 好鳥日來能喚友 繁陰歲月與之偕 ​

​삼산정(三山亭) ​

신성리 호동마을에 있다. 단층 팔작지붕 골기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다. 구한말 의병 나은 서상룡(蘿隱 徐相龍)의 듯을 기리기위해 마을 안쪽 그의 묘지 앞 개울가에 세워진 정자다.

그는 우국지사 기우만(奇宇萬)의 제자로서 1896년에 은마 은암 류인석(毅菴 柳麟錫)의 의병대에 가담하여 춘천에서 항일운동을 활동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하여 정자를 짓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이루지 못하였다.


그의 아들 서내준(徐內駿)이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1946년에 지었다가 훼손되고 다시 최근에 재건했다. 정자 앞에는 성산사가 자리하고 있다. 그는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스승인 기우만과 서상룡선생을 기리는 시가 정자내 현판에 거액되어 있다.

三山으로 이름하여 덕봉뒤에 세었으니/ 竹栢이 서로 엉켜 열길이나 높았도다

두곳에 齋와 亭은 함께 義를 지켰고/ 松沙 柳翁 兩先生께 전심을 받았도다. 기특한 飛鳳은 하늘높이 솟구쳤고/ 활발한 寒泉은 머름밖에 깊도다 오랜 사업 이제 모두 이뤘으니/ 어진 소문 맑은 소리 백세토록 전하니

두문동(杜門洞) 72현(杜門洞七十二賢)

이성계(李成桂)의 조선건국(朝鮮建國)에 반대한 고려의 유신 서중보(徐仲輔-직제학 본관;이천서씨(利川徐氏) 서보(徐輔-공조전서 본관; 이천서씨(利川徐氏)  서광준(徐光俊 본관;이천서씨(利川徐氏), 장령 서견(徐甄 본관;이천서씨(利川徐氏), 신규(申珪)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 맹호성(孟好誠) 고천상(高天祥) 성사제(成思齊) 이경(李瓊)  등 72인은 개성 남동쪽에 있는 이른바 ‘부조현(不朝峴)’에서 조복(朝服)을 벗어 던지고 이곳에 들어가 끝까지 신왕조(新王朝)에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이에 이성계는 이곳을 포위하고 72명의 고려 충신들을 몰살하였다고 전해진다. 태종 때 설과(設科)를 했는데, 이곳 사람들이 과거에 응하지 않았으며 사회와 단절하고 은거하였으므로 두문동(杜門洞)이라 하였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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