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선(愼承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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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36년(세종 18)~1502년(연산군 8) = 67세]. 조선 중기 성종~연산군 때의 문신. 영의정을 지냈고, 봉작은 거창 부원군(居昌府院君)이고 시호는 충성(忠成), 또는 장성(章成)이다. 자(字)는 자계(子繼), 또는 원지(元之) · 계지(繼之)이고, 호는 사지당(仕止堂)이다. 본관은 거창(居昌)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황해도 관찰사신전(愼詮)이고, 어머니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안강(安剛)의 딸이다. 세종(世宗)의 아들 임영대군(臨瀛大君)의 사위이고, 황해도 관찰사신전(愼詮)의 조카이다. 연산군(燕山君) 왕비 신씨(愼氏)의 아버지이고, 중종의 진성대군(晉城大君) 때 부인 신씨(慎氏: 단경왕후)의 할아버지다.

세조~예종 시대 활동

1453년(단종 1) 사마시(司馬試)에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그 때 나이가 18세였다.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과거에 여러 번 실패하고, 음보(蔭補)로 돈녕부(敦寧府) 승(丞)이 되었다. 신승선은 젊었을 때에 용모가 잘 생겨서 세종의 넷째아들 임영대군의 사위로 간택되었다.[『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연산군 8년 5월 29일 「신승선 졸기」] 단종 시대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首陽大君)과 셋째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정권 다툼을 벌일 때 세종의 8왕자 중에서 유일하게 임영대군만이 수양대군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1453년(단종 1) 10월 <계유정난(癸酉靖難)> 이후에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은 동생 임영대군의 사위 신승선을 측근에 두고 매우 사랑하였다.

1455년(세조 1) 윤6월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신승선은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1461년(세조 7) 3월 형조 정랑(正郞)이 되었다가, 1463년(세조 9) 2월 한성부 소윤(漢城府少尹)이 되었다. 세조는 28세의 신승선을 대간(臺諫)에 임명하여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 출신의 서거정(徐居正) · 양성지(梁誠之) 등과 동료로서 사귀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1463년(세조 9) 4월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이 되었다가, 1464년(세조 10) 3월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이 되었다. 1466년(세조 12) 1월 세조는 신승선을 병조 참지(參知)에 임명하여 군사 실무를 맡게 하였는데, 당시 정변으로 집권한 세조는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병조 참지를 항상 곁에 두고, 착호갑사(捉虎甲士) 등을 이끌고 궁중을 호위하게 하였다.

1466년(세조 2) 2월 세조가 성균관에 행차하여 문묘(文廟)의 공자(孔子)를 배알(拜謁)한 다음에 알성시(謁聖試)문과(文科) 시험을 보여서 17명을 뽑았는데, 그때 세조가 특별히 병조 참지신승선에게 과거에 응시하도록 명하였다. 이것은 평소 신승선이 과거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승선은 생각지도 않게 갑자기 어명을 받고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신승선이 1등 장원을 차지하였다.[『방목』,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별집 권9] 그 뒤에 그의 반대파가 임영대군의 사위 신승선이 과거에 장원 급제한 것에 대하여, “남의 손을 빌어서 시권(試券)을 만들었다.”고 비난하였다. 그해 3월 세조는 문과에 장원한 신승선을 이조 참판(參判)에 임명하였다. 그해 세조가 갑자기 모든 문관들에게 발영시(拔英試)를 보였는데, 이조 참판신승선은 문과 중시(重試)에 3등으로 급제하여, 그의 실력을 증명하였다. 이리하여 1467년(세조 13) 4월 세조는 신승선에게 이조 참판으로서 예문관(藝文館)제학(提學)을 겸임하게 하였다.[『세조실록』세조 13년 4월 6일] 그해 8월 공조 참판이 되었다가, 1468년(세조 14) 6월 병조 참판으로 옮겨서, 1468년 9월 세조가 승하하고, 어린 예종이 즉위할 때 갑사(甲士)들로 하여금 궁중을 철저하게 호위하여 왕권을 안정시켰다.

1468년(예종 즉위) 10월 <남이(南怡)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추충정난(推忠靖難) 익대공신(翼戴功臣)’에 책봉되었다. 이때 33세의 신승선은 노사신(盧思愼)과 어세겸(魚世謙)과 함께 익대 공신 3등으로 책봉되었는데, 신승선은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병조 참판거창군(居昌君)으로, 노사신은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 호조 판서선성군(宣城君)으로, 어세겸은 종2품하 가선대부 행 승정원 우승지(右承旨)함종군(咸從君)으로 봉해졌다. 노사신 · 신승선 · 어세겸은 나중에 연산군 초기에 3의정(議政)에 임명되어서 연산군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려고 노력하였다.

성종 시대 활동

1469년 11월 세조의 둘째아들 예종이 20세의 나이로 승하하고, 맏아들 덕종(德宗)의 둘째아들 성종(成宗)이 15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세조의 왕비 자성대비(慈聖大妃: 정희왕후)가 원상(院相)신숙주(申叔舟) · 한명회(韓明澮) · 최항(崔恒) 등과 상의하여 성종을 세우고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1471년(성종 2) 3월 성종을 임금으로 세우는 데에 공이 많은 신하들이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책봉되었는데, 신승선은 노사신 · 강희맹(姜希孟) · 서거정 · 양성지 등과 함께 좌리공신 3등에 봉해졌다. 1472년(성종 3) 4월 신승선은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 거창군(居昌君)에 봉해졌고, 1473년(성종 4) 5월 충청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476년(성종 7) 성종이 20세가 되자, 자성대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성종이 친정(親政)을 하게 되었다. 그해 4월 신승선은 천추사(千秋使)에 임명되어 중국 북경(北京)에 가서 명(明)나라 헌종(憲宗)성화제(成化帝)의 황후(皇后)에게 탄일(誕日)을 축하하였다. 1478(성종 9) 4월 돈녕부(敦寧府)동지사(同知事)가 되었고, 1481년(성종 12) 3월 정2품하 자헌대부에 승품되어, 그해 4월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때 성절사(聖節使)에 임명되어 중국 북경에 가서 명나라의 헌종성화제에게 탄신(誕辰)을 축하하였다. 그해 9월 의금부(義禁府)지사(知事)와 세자 빈객(世子賓客)을 겸임하였다. 세자 빈객신승선은 겨우 7세의 어린 세자 연산군을 처음 만나서, 2년 반 동안 세자를 성실하게 가르쳤는데, 연산군을 크게 계도(啓導)하였으므로, 성종이 그를 매우 신임하였다. 1484년(성종 15) 3월 신승선이 병이 나서 사직하니, 성종이 의금부 지사와 세자 빈객의 겸직을 면제하여 주었다. 1486년(성종 17) 3월 정2품하 자헌대부로 승품되어,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때 신승선이 성종의 신임을 받아서 정부요직에 오르자, 사림파(士林派) 사관(史官)들이 실록의 사평(史評)에서 그를 비난하기를, “사람들이 많이 그를 가리키면서, ‘세조 시대 신승선이 남의 손을 빌려서 장원을 차지하였는데, 남이 지은 글을 빌려서 장원(壯元)하는 일이 어느 시대에나 없겠는가.’고 비웃었다.” 하였다.(『성종실록(成宗實錄)』 성종 17년 5월 20일) 왜냐하면, 그가 지은 글이 앞서 다른 사람의 글과 같았기 때문이다.

1487년(성종 18) 3월 성종이 병조 판서신승선의 딸을 세자빈(世子嬪)으로 삼았다. 세자 연산군의 배필을 간택하는 데 성종과 인수대비(仁粹大妃: 소혜왕후)가 신승선의 딸을 뽑은 것은 임영대군의 외손녀로서 이씨 왕가의 혈통이라는 점을 고려하였기 때문이다. 성종이 승정원에 전교(傳敎)하기를, “병조 판서신승선의 딸로 세자빈을 삼도록 하라.” 하였다. 그때 신승선이 왕가와 혼인을 맺은 것이 커다란 가문의 영광이었으나, 그것이 장차 가문에 멸문(滅門)의 화를 가져올 줄은 아무도 몰랐다. 1487년(성종 18) 7월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품되어, 그해 9월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이 되었다. 1488년(성종 19) 2월 성종이 신승선에게 서대(犀帶) 1벌을 하사하였다. 그때 성종이 대내(大內)에서 서대 1벌을 가져다가 좌참찬신승선에게 주고 전교하기를, “세자가 회문례(回門禮)를 행하니, 경이 이것을 허리에 띠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회문례는 혼인 한 신랑 · 신부가 함께 신부집에 인사가는 예이다. 이처럼 성종이 신승선을 사랑하고 아꼈는데, 성종은 신승선보다 나이가 19세나 아래였다. 그해 2월 신승선은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승품되고, 그해 9월 행(行)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1489년(성종 19) 11월 행 예조 판서가 되었다가, 1491년(성종 22) 10월 중추부(中樞府) 동지사가 되었다. 그해 12월 이조 판서가 되었다가, 1492년(성종 23) 3월 중추부 지사(知事)가 되었다. 그해 11월 신승선이 병으로 이조 판서를 사직하니, 성종이 이를 허락하였다. 그해 12월 대사헌이세화(李世華)가 서계(書啓)하기를, “신승선의 집에서 어필(御筆)의 서화(書畵)를 보았습니다.” 하고, “옛사람이 이르기를, ‘언제나 한결같이 지나치게 좋아하면 성덕(聖德)에 누(累)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성종이 변명하기를, “글씨와 그림을 일찍이 돈녕부 영사(領使)에게 내려 주었는데, 반드시 그가 이것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나치게 서화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고 우연히 하였을 뿐이다.” 하였다. 성종은 서화에 매우 뛰어났는데, 이세화가 임금이 잡기를 좋아하는 것을 경계하였으나, 사실은 성종이 왕실과 가까운 신승선 · 윤은로(尹殷老) · 윤여림(尹汝霖)에게 서화를 내려주었기 때문에 그들의 집에서 그 서화를 본 사람들은 임금이 몇 사람을 지나치게 편애한다고 뒷말이 많았기 때문이다.

1494년(성종 25) 2월 종1품상 숭록대부(崇綠大夫)로 승품되고, 그해 11월 마침내 정1품상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綠大夫)로 승품되어,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 성종 말년에 영의정윤필상(尹弼商), 좌의정(左議政)노사신, 우의정신승선이 의정부의 3의정을 맡았다. 성종이 종기병을 앓다가, 그해 12월 25일 갑자기 승하하였는데, 향년이 겨우 39세였다. 성종은 세종대왕과 같은 우수한 자질을 가진 임금으로서 세종과 세조가 시작한 『오례의(五禮儀)』와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을 완성하여 나라의 기틀을 완성하였다. 성종은 성품이 부드러운 신승선을 좋아하여, 서로 혼인 관계를 맺고 세자 연산군의 계도를 맡겼다. 성종은 온유한 신승선과 며느리 신씨(慎氏)가 반항심이 많은 연산군을 잘 치유하여 계도할 것이라고 믿었다. 연산군은 장인 신승선을 정말 좋아하였고, 세자빈 신씨를 매우 사랑하였으나, 신승선 부녀가 성종의 뜻대로 포악한 연산군을 계도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연산군 시대 활동

1494년(연산군 즉위) 12월 연산군이 즉위하였는데, 그때 연산군의 나이가 19세였다. 인수대비는 나이 어린 연산군에게 장인 신승선의 보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1495년(연산군 1) 3월 신승선을 좌의정에 임명하였다. 그때 영의정노사신과 우의정정괄(鄭适)이 함께 의정부의 3의정을 맡았다. 그해 10월 신승선이 영의정이 되었는데, 영의정신승선, 좌의정정괄, 우의정어세겸이 3의정이 되었다. 처음에 어린 나이로 임금이 된 연산군을 처가의 장인 신승선과 처남 신수근(愼守勤) 3형제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였다. 원래 소심한 연산군은 정사를 볼 때마다 처남 호조 참의신수근에게 하나하나 물어보고 신수근의 의견에 따라서 결정하였으므로, 실록에서 초기 연산군의 정사를 기록하기를, “당시에 왕이 가부를 결재할 일이 있으면, 비밀리 사람을 보내어 신수근에게 물어보고 결정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말하기를, ‘왕의 명령은 모두 신수근에게서 나온다.’고 비난하였다.” 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군 1년 1월 7일) 1496년(연산군 2) 3월 연산군은 처남 신수근을 우승지에 임명하여, 최측근에서 임금을 돕게 하였다.

영의정신승선은 사위 연산군을 보필하여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려고 윤필상 · 노사신 · 어세겸 · 한치형(韓致亨) 등과 함께 무척 노력하였다. 그러나 초기에 연산군을 보필한 윤필상 · 노사신 · 어세겸 · 한치형 등은 나중에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모두 극형을 받아서 그 집안이 완전히 멸망하였다. 신승선의 딸 신씨도 왕비가 되어 지아비 연산군을 훌륭한 임금으로 만들려고 지극 정성으로 내조하였으나, 끝내 연산군의 난폭한 성격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에 신승선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몸이 병약하다고 핑계하고 영의정 자리를 사양하였다. 그가 자기 호를 스스로 ‘사지당(仕止堂)’이라고 지어 “벼슬살이를 그만두겠다”는 자기 뜻을 나타냈다. 1496년(연산군 2) 10월 신승선이 영의정을 사임하니, 연산군이 허락하지 않았다. 1497년(연산군 3) 2월 연산군은 처남 신수근을 좌승지(左承旨)에 임명하였다. 그때 영의정신승선이 병으로 일을 보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다고, 조정의 상하 관원들이 불평불만이 많았다. 영의정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자, 국사의 처리가 지연되었기 때문이다.

그해 3월 연산군은 마침내 영의정신승선의 사직을 허락하는 교지(敎旨)를 내렸다. 그때 영의정신승선이 글을 올려 사직하였는데, 연산군이 전교하기를, “신승선이 병으로 인하여 오래도록 정사를 못 보고, 또 본인도 간곡한 사연으로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애걸하므로 부득이 허락한다.” 하였다. 그해 4월 연산군은 신승선을 거창 부원군(居昌府院君)으로 봉하고 경연 영사를 겸임하게 하여, 가끔 경연(經筵)에 참석하여 임금을 계도하게 하였다. 그해 6월 연산군은 처남 신수근을 승정원 도승지(都承旨)에 임명하였다. 신승선이 비록 영의정에서 물러났으나 맏아들 신수근이 도승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해 12월 그의 막내딸 연산군의 왕비 신씨가 그토록 바라던 세자(世子)이황(李*)을 낳았으므로, 거창 신씨 가문의 영광은 더할 나위 없이 드높았다.(『연산군일기』 연산군 3년 12월 18일) 신승선은 부원군으로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으나, 중요한 국사(國事)가 있을 때 가끔씩 중신회의에 참여하였다. 다만 그가 영의정으로 있을 때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기 위한 실록청(實錄廳) 총재관(總裁官)을 맡았는데, 1497년 12월 『성종실록』이 완성되자, 총재관어세겸과 함께 안장을 갖춘 말 한 필과 표리(表裏) 한 벌과 비단 한 필을 하사 받았다.

1498년(연산군 4) 7월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는데, 훈구파(勳舊派) 유자광(柳子光) · 이극돈(李克墩)이 김종직(金宗直)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서 중국 초(楚)나라 항우(項羽)가 초나라의 어린 황제 의제(義帝)를 죽인 것을 조문(弔問)하면서 세조가 어린 단종을 죽인 것을 풍자하였다고 무고하여, 「조의제문」을 사초(史草)에 넣은 사관(史官)김굉필(金宏弼) 등 김종직의 제자 사림파를 숙청하였다. 신승선은 <무오사화>에 관련된 중신회의를 할 때마다 병을 핑계되고 회의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연산군은 중신회의를 열고 세조의 왕위 계승을 부정한 사림파를 엄벌에 처하기로 결정하고, 이미 죽은 김종직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그 제자 김일손(金馹孫) 등 3인을 능지처참(陵遲處斬)에 처하고, 이목(李穆) 등 2인을 참형(斬刑)에 처하고, 나머지 강겸(姜謙) · 표연말(表沿沫) 등 20여 명을 유배하였다. 또 사초를 보고도 즉시 보고하지 않았다고 하여 어세겸 · 이극돈 등은 파직하고, 홍귀달(洪貴達) 등은 좌천(左遷)시켰다. 이때부터 신승선은 조정과 왕래를 일체 끊어버리고 두문불출하였다.

그가 마지막 중신회의에 참석한 것은 <무오사화>의 죄인을 한창 심문할 무렵, 1498년(연산군 4) 7월 6일(경자) 강도 높은 지진(地震)이 경상도 17고을에 4차례나 일어나자, 그 회의에 참석하여 임금이 옥사(獄事)를 잘 처리해서 억울하게 죽는 사람들의 원망이 천재지변(天災地變)을 가져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연산군을 깨우쳤다. 이때 연산군은 유서(諭書)를 내리기를, “천재지변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는 매우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바이다. 더욱 옥송(獄訟)에 힘을 써서 지체되는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다. 연산군은 즉위한 뒤에 <무오사화>가 일어나기까지 3~4년 동안은 착한 임금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장인 신승선이 살아 있으면서 연산군을 잘 보필하였기 때문이다. 연산군은 병중에 있는 장인 신승선을 위로하기 위하여 1499년(연산군 5) 9월 백면포(白綿布) 30필과 상면포(常綿布) 50필을 처갓집에 실어 보냈고, 또 1502년(연산군 7) 3월 쌀 50섬과 면포 1백 50필을 장인 집에 실어 보냈다. 그러나 병세가 점차 위독해져서, 1502년(연산군 7) 5월 29일(경자) 신승선은 부원군의 저택에서 돌아갔는데, 향년이 67세였다.

성품과 일화

신승선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용모가 매우 아름답고, 성품이 온화(溫和)하며, 항상 올바른 몸가짐을 가졌다. 임금에 대한 충성과 아래 사람에 대한 사랑이 돈독하여 임금이 믿고 의지하고 백관들이 존경하여 본받으려고 하였다. 임금의 장인인 국구(國舅)의 존귀한 몸이 되었으나 사람들에게 더욱 겸손하고, 공훈이 매우 컸으나 남들에게 자랑하지 않았다. 그는 남에게 화를 내지 않았으나 사람들이 스스로 엄숙하였고, 그는 남에게 웃지 않았으나 사람들이 저절로 즐거워하였다.[『허백정집(虛白亭集)』 권33권 「신승선 제문(祭文)」] 그러므로 신승선은 시임(時任) 대신과 원임(原任) 대신으로 있으면서 국정(國政)을 논의할 때마다, 자기가 국구라는 것을 의식하여 일부러 다른 사람보다 목소리를 낮추고 자신의 의견을 잘 개진(開陳)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기를, “마치 죽이나 밥이나 한 그릇 얻어먹고 윗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자리를 떠는 스님과 같다”고 하여, ‘죽반승(粥飯僧)’이라고 비아냥거렸으나, 그는 이를 개의하지 않았다. 또 그는 자기 딸 왕비 신씨에게도 거듭 타일러서, 연산군의 나쁜 행동을 보고도 못 본 체하고, 궁중 안에서 무슨 말을 들어도 못들은 체 하면서, 절대로 연산군에게 함부로 말하지 말게 하였다. 그는 살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하면서 반벙어리처럼 살아가는 것만이 연산군과 같은 임금을 모시고 무사히 살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1497년(연산군 3) 2월 사간원 사간최부(崔溥)가 영의정신승선 · 좌의정어세겸 · 우의정한치형을 공격하기를, “지금 3공(公)의 우두머리가 되는 영의정신승선은 그 사람됨이 나약하기가 여자와 같아서 나라의 큰일을 당하여도 막연히 가타부타 하는 말 한 마디가 없으며, 게다가 질병에 걸렸다고 하여 자리를 비우고 집에 있은 지 수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므로 경륜(經綸)을 의논하고 음양(陰陽)을 다스리는 정승 자리가, 죽을 쑤어 중이나 먹이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 좌의정어세겸은 재주와 학문은 칭송할 만하더라도 선대 성종 때부터 관직에 출근하기를 대낮[午鼓]에 늦게 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서 ‘오고당상(午鼓堂上)’이라고 하였습니다. 날마다 술 마시는 일만을 일삼습니다. 또 그 다음 우의정한치형은 자질이 아름답지만 배우지 못한 자입니다. 정승이 된 후 의정부에서 건의한 것은 내원(內苑)에 담을 쌓는 것과 새 묘소에 사대석(沙臺石) 설치하는 것을 정지시킨 두 가지의 일뿐이었습니다.” 하고, 3정승을 교체하도록 청하였다. 최부는 그 뒤에 제주도에 경차관(敬差官)으로 갔다가 돌아오다가 풍랑을 만나서 14일 간 동중국해를 8천 리나 표류한 기행문 『표해록(漂海錄)』을 쓴 유명한 인물이다. 이에 연산군이 변명하기를, “상소한 말은 옳은 말이다. 영의정은 오래도록 병을 앓아 기력이 쇠약해졌으므로, 부녀자와 같다는 말은 이상할 것이 없다. 좌의정은 집에 있으면서 술이나 마신다는 것은 내가 잘 모르지만, 평상시에 대궐에 나오면 내가 술을 대접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 과음하기까지 했겠는가. 털을 불어서 흠집을 찾아내어 재상의 실수를 따지는 것은 바로 나의 죄를 헤아리는 것이다.” 하였다.[『연산군일기』연산군 3년 2월 14일]

『연산군일기』의 「신승선 졸기」를 보면, “사람됨이 연약하기가 부녀자와 같아서 나라에 아무런 건의한 일이 없고 직무에 게으르고, 오직 녹만 타먹으면서 그 자리에 있으나 마나 하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죽반승’이라고 하였다.” 하였다.[『연산군일기』연산군 8년 5월 29일 「신승선 졸기」] 이것은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일기』를 편찬한 사림파 사관들이 연산군 시대 정치에서 물러가려고 하던 신승선을 일부러 깎아내린 악평(惡評)이다. 『신보가전(愼譜家傳)』을 보면, “연산군 때에 신승선은 병이라고 핑계하고 집 밖을 잘 나가지 않았고, 여러 번 관직을 사임하고 체직되기를 간청하였다. 그는 크고 작은 모든 기밀의 정무를 동료 재상들에게 맡기고 일절 묻는 바가 없었다. 그러므로 신승선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혹은 신승선이 유약하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하였다. 신승선은 전후로 여러 번 공신(功臣)에 책봉되어 나라에서 내려 준 논밭이 1백 결(結)이나 되었으나 모두 받지 아니하였다.” 하였다.

『임하필기(林下筆記)』에 의하면, 영의정신승선과 좌의정신수근은 조선 시대 부자가 정승이 된 18사례의 하나였고, 영의정신승선과 처남 영의정귀성군(龜城君)이준(李浚)은 조선 시대 처남과 매부가 정승이 된 7사례의 하나였고, 연산군의 장인 영의정신승선은 조선 시대 국구로서 정승의 된 9사례의 하나였고, 영의정신승선과 좌의정권람(權擥)은 사돈끼리 정승이 된 13사례의 하나였다. 신승선의 맏아들 신수근의 첫번째 부인이 권람의 딸이다.

의친 신승선이 정계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세조가 그를 특별히 발탁하고, 임영대군이 그를 밀어주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당대의 이름난 문장가 서거정 · 양성지 등과 교유할 수 있었다. 서거정의 『사가시집(四佳詩集)』을 보면, 서거정이 「국화를 옮기면서[移菊]」라는 시를 지어서, 거창군신승선에게 보냈다. 그 시에 “3월 3일 삼진날 오솔길에 첫 국화를 옮겨 심으면[三三小徑初移菊] 9월 9일 중양절에 국화주를 마실 수 있다고 하니[九九良辰可擧杯], 내가 오늘 아침 비 온 때를 틈타서 심고자 하는데[我欲今朝因雨種] 그대는 마땅히 중양절에 거문고를 안고 와야 하네.[君宜當日抱琴來]”하였다. 서거정은 봄철 3월 3일 삼짇날 아침에 비가 온 때를 틈타서 국화를 심고, 거창군신승선에게 가을철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에 국화주를 마시러 오라고 초청하면서, 거문고를 반드시 가지고 와서 술을 마시면서 한 가락 튕기고 시를 지어 서로 주고받자는 내용이다. 당대의 풍류(風流)를 엿볼 수 있는 품격이 높은 시이고, 두 사람이 아주 가까웠던 사이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신승선의 시호 충성(忠成)과 장성(章成)

1502년(연산군 7) 5월 거창부원군신승선이 죽었을 때 자손들이 시장(諡狀)을 만들어 봉상시(奉常寺)에 바쳤다. 봉상시의 관원들이 시장에 의거하여 그 성품과 업적을 면밀히 평가하여 시호법(諡號法)에 따라서 시호를 정하였다. 봉상시에서 처음에 신승선의 시호를 ‘장성(章成)’이라고 정하였는데, 성품이 “온화(溫和)하여 올바른 몸가짐을 가진 것[溫克令儀]”을 장(章)이라고 하고, 업적이 “임금을 보필하여 끝맺음을 잘한 것[佐相克終]”을 성(成)이라고 하였다.[『연산군일기』연산군 8년 5월 29일 「신승선 졸기」] 시호법은 중국 주(周)나라 때 정해진 것인데, 죽은 다음에 일반적으로 일컫는 이름이 시호다. 첫글자는 그 성품을 나타내고 끝글자는 그 업적을 나타내는데, 각각 그 좋고 나쁜 글자를 수 백자씩 미리 정해두고 그 사람의 성품과 업적에 따라서 결정하였던 것이다. 가장 좋은 글자는 ‘충성 충(忠)’자 · ‘글할 문(文)’자 · ‘곧을 정(貞)’자 · ‘엄숙할 숙(肅)’자 등이다.

1502년(연산군 7) 10월 봉상시에서 신승선의 시호를 의논하여 ‘장성’이라고 아뢰자, 연산군이 전교하기를, “‘글 장(章)’자를 ‘충성 충(忠)’자로 고치는 것이 어떻겠는가? 정승들과 의논하라.” 하였다. 윤필상이 찬성하기를, “신승선은 그 공로가 훈맹(勳盟)에 기록되어 있으니, ‘충(忠)’자를 내려주는 것이 진실로 마땅합니다.” 하고, 성준(成俊)이 반대하기를, “신승선의 시호는 이름과 실상이 서로 맞습니다. 만약 시호를 위에서 다시 고친다면, 관사(官司)를 설치하여 시호를 의논하여 정하는 본뜻에도 어긋남이 있으며, 또 이런 전례(前例)도 없습니다.” 하고, 이극균이 찬성하기를, “옛날에 유사(有司)에서 시호를 의논하여 아뢰면, 군주가 간혹 이것을 고친 일이 있었습니다. 신승선은 비록 뚜렷하게 드러난 공훈은 없지만, 여러 조정을 내리 몇 대를 섬겼으며 공로가 맹부(盟府)에 기재되어 있으므로, ‘충(忠)’자가 적당한 것 같습니다.” 하니, 연산군이 시호를 ‘충성(忠成)’으로 고치도록 명하였다. 이리하여 연산군 때 신승선의 시호를 ‘충성’이라고 불렀다.

1505년 5월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중종이 신승선의 시호를 개정하도록 명하였다. 사헌부 장령김천령(金千齡)·사간원 정언권달수(權達手)가 아뢰기를, “시호는 임금의 사은(私恩)으로써 경솔히 고칠 수 없습니다. 신승선의 시호를 개정하라는 명령은 도로 거두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중종이 이르기를, “신승선이 국가에 공로가 있기 때문에 처음에 ‘충(忠)’자로 시호를 내려주려고 했으나, 연산군이 사은으로써 특별히 이를 고쳤던 것을 다시 생각해 보니, 시호의 법은 특별한 은혜를 내리는 예와는 달라서 고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처음에 해당 관사에서 의논하여 정한 것에 따라서 ‘장성(章成)’이라고 하도록 하라.” 하였다.[『연려실기술』 별집 권10]

중종은 왕으로 추대되기 전에 진성대군으로서 잠저(潛邸)에 있을 때 신승선의 장남 신수근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임금으로 추대된 다음에 박원종(朴元宗)이 중종의 추대에 반대하던 신수근 3형제를 죽이고, 중종과 신수근의 딸을 강제로 이혼시켜서 두 사람을 헤어지게 만들었다. <중종반정>에 의하여, 역사상 연산군의 왕비 신씨와 중종의 첫째 부인 신씨는 모두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때 중종이 처조부 신승선에게 그 시호를 야박하게 깎아내리라고 명령한 것은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추측된다. 시호가 고쳐지는 과정을 보면, 신승선은 자기가 살았을 때에는 그 명예와 가족을 지킬 수가 있었으나, 그가 죽은 다음에 그 명예를 잃고, 아들 3형제가 모두 죽음을 당하고 딸과 손녀가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서쪽 장흥면(長興) 일영(日迎)에 있는데, 홍귀달(洪貴達)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있다고 하나,[『연려실기술』 권6] 지금 남아 있는 홍귀달의 『허백정집(虛白亭集)』을 찾아보면, 그 제문(祭文)만 있고 그 묘지명은 없다. 아마도 연산군의 몰락 이후에 문집에서 묘지명을 삭제해버린 것 같다.

부인은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세종의 넷째아들 임영대군이구(李璆)의 딸인데, 자녀는 3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신수근은 좌의정을 지냈고, 차남 신수겸(愼守謙)은 개성 유수(開城留守)를 지냈고, 3남 신수영(愼守英)은 형조 판서를 지냈는데, <중종반정> 때 박원종이 자객을 그 집으로 보내어 모두 그 집 밖으로 불러내어 척살(擲殺)하였다. 장녀는 승평부(昇平府) 부정(副正)이동(李洞)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선산 부사(善山府使)남경(南憬)의 처가 되었고, 3녀는 연산군(燕山君)의 왕비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신씨(慎氏)인데, <중종반정> 이후에 궁중에서 쫓겨나서 신승선 · 신수근의 친정 본가를 지키면서 조카 중종의 폐비(廢妃)신씨(慎氏)와 함께 30여 년 동안 살았다.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허백정집(虛白亭集)』
  • 『신보가전(愼譜家傳)』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사가시집(四佳詩集)』
  • 『견한잡록(遣閑雜錄)』
  • 『계곡집(谿谷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금남집(錦南集)』
  • 『남계집(南溪集)』
  • 『도곡집(陶谷集)』
  • 『모재집(慕齋集)』
  • 『보한재집(保閑齋集)』
  • 『삼탄집(三灘集)』
  • 『성소복부고(惺所覆瓿藁)』
  • 『성호전집(星湖全集)』
  • 『소문쇄록(謏聞瑣錄)』
  • 『용재총화(慵齋叢話)』
  • 『임하필기(林下筆記)』
  • 『점필재집(佔畢齋集)』
  • 『지호집(芝湖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해동야언(海東野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