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필(御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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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이나 황후, 왕비 등의 서화(書畵)를 이르는 말.

개설

어서(御書), 어화(御畵)로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제왕이 지은 시문(詩文)은 어제(御製)라 부른다. 어제·어필(御筆)은 역대로 제왕의 풍모를 전해주는 소중한 유물로 여겨져 왔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에서 이러한 열성(列聖)의 자취는 왕조의 위엄이 담긴 것으로 인식되어 국가 차원에서 귀중하게 보존하였다. 아울러 세자나 세자빈이 남긴 예필(睿筆) 또한 왕실의 소중한 유물로 전해졌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에는 왕이 승하하면 새로 즉위한 왕이 선왕(先王)의 존호(尊號)를 지어 올리고, 선왕대의 실록을 편찬하였으며, 그가 지은 어제를 편집·간행하고, 그가 남긴 어필을 수집·간행하는 등 일련의 사업을 진행하였다. 이와 함께 존각(尊閣)을 설치하여 어진을 봉안하고 제향을 올렸다. 이때 어제·어필 등을 엄숙한 의식에 따라 존각에 안치하여 선왕의 위업을 기리고 왕조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삼았다. 이러한 절차가 거듭되면서 열성의 어제와 어필 등을 수집하고 이를 안치하는 의례가 정착되었다. 17세기에는 이를 간추린 『열성어제(列聖御製)』·『열성어필(列聖御筆)』 등이 간행되었으며, 이러한 서적들은 반사(頒賜)를 통해 일반에게 널리 전파되었다.

조선시대의 어필은 국초부터 곳곳의 존각에 봉안하였으나, 오랜 세월과 대규모의 전란으로 인하여 많은 수가 소실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로는 이전의 어필 진적(眞蹟)이 매우 드물게 되었다. 왕실에서는 민간에 흩어진 어필을 진헌(進獻)을 통해 수집하였다. 그와 관련한 내용이 『조선왕조실록』 곳곳에 보인다. 왕은 어필을 바친 사람에게 제직(除職)·가자(加資)·사물(賜物) 등으로 치하했는데, 지나친 제직이나 가자에 대해 대신들이 정식(定式)이 없는 처사라면서 어필 진헌자에게 관직 수여를 중지하라고 건의할 정도로 열성의 어필에 대한 왕의 태도는 매우 적극적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선조 연간까지는 어필 진헌자에 대한 별도의 포상 예가 없으나, 인조 연간에 들어서 어필 진헌자에게 품계를 올려주는 예를 시작으로 현종·숙종 연간에는 여러 번의 사례가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전란으로 인해 많은 수의 어필이 분실·이동되었던 것과 관련되며, 17세기 들어 왕실을 중심으로 어필의 모간(摹刊)이 본격화되면서 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현상과도 관련이 있다.

조선후기인 1776년(정조 즉위) 3월에는 열성의 어제·어필·고명·유교(諭敎)·선원보(璿源譜) 등을 관리하는 곳으로 궐내에 규장각이 설치되면서 어필의 확실한 봉안처로 정착하였다. 정조는 선왕인 영조를 비롯한 열성의 어제·어필을 창덕궁 뒤뜰에 위치한 열무정(閱武亭)을 봉모당(奉謨堂)으로 삼아 안치하고, 규장각에는 당조(當朝)의 어진·어제·어필·보책(寶冊)·인장(印章) 등을 봉안하게 하였다.

봉모당 설치 초기의 기록인 『봉모당봉안어서총목(奉謨堂奉安御書總目)』을 살펴보면, 그곳에 봉안된 모훈(謨訓) 대부분이 영조의 어제·어필이며 열성의 어제·어필은상대적으로 적은데, 이는 봉모당의 초기 봉안이라는 점에서 대표적인 열성의 어제·어필만을 봉안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열성의 어필을 간행한 관서는 교서관(校書館) 또는 교서감(校書監)이었다가, 규장각이 설치된 뒤 1782년(정조 6)에 이르러 그 기능이 병합되었다. 이에 따라 봉모당·이문원(摛文院) 등이 규장각의 내각(內閣)을 이루었고, 교서관은 열성의 어제·어필 등의 서적을 보관하는 강화사고의 신축 별고와 함께 규장각의 외각(外閣)을 구성하였다. 규장각의 조직과 기능에 대해서는 『규장각지(奎章閣志)』에 보이는데, 모훈의 수집·봉안·관리·간행 및 서적의 장서(藏書), 편서(編書)·쇄서(曬書)의 업무 외에도 어제·어필의 간행·봉안·쇄서 등의 업무가 포함되었다. 한편 어필을 위시한 선왕의 모훈을 관리하는 방식과 절차에 대해서도 『규장각지』에 잘 나타나 있다. 규장각 설치 초부터 정조는 한 해에 2번씩 초봄·초가을에 날을 잡아 왕세자와 함께 참배하였고, 한 달에 2번씩 각신(閣臣) 2명에게 봉심(奉審)하게 했으며, 봉심하기 며칠 전에 미리 임금에게 아뢰고 봉심의 결과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또한 봉안된 모훈을 열람하고자 할 때는 마치 춘추관에서 실록을 열람할 때와 같이 반드시 각신 2명이 함께 행하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에 국왕의 글씨를 집성(集成)한 사례로는 『열성어필』이 대표적이다. 현존하는 『열성어필』의 여러 간본(刊本) 가운데 최초의 예는 1662년(현종 3)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양군(嶺陽君) 이현(李儇)을 비롯한 종실의 군(君)·정(正)·부정(副正) 등이 문종·세조·성종·인종·명종·선조·원종·인조·효종 등 9대의 어필을 간추려 이를 석판에 새겨 왕에게 진상하자, 현종이 이를 가상히 여기고 참가자에게 한 품계씩 가자했다(『현종실록』 3년 2월 14일). 이 책이 최초의 석각본 『열성어필』인데, 그 뒤 숙종·경종·영조 초년에 각각 선왕인 현종·숙종·경종의 어필을 새겨 이를 이전의 간본에 덧붙여 간행하였다. 석각본의 특징은 음각(陰刻)에 첩장(帖裝)이며, 특기할 사항은 영조 초년에 간행된 석각본에 태조의 어필이 앞쪽에 추가되었다는 점이다. 이 태조의 어필은 1746년(영조 22)에 알려진 것으로(『영조실록』 22년 7월 24일), 1401년(태종 1) 9월에 태상왕(太上王)으로 물러나 있던 태조 이성계가 후궁 소생인 며치[㫆致] 곧 숙신옹주(淑愼翁主)에게 가옥을 하사하면서 작성한 문서이다.

『열성어필』의 간본 중에는 숙종 연간에 선조·인조·효종·현종 등 4대의 어필을 나무판에 새긴 목각본이 간행되어 『열성어필』의 또 다른 계통을 이루는데, 이 역시 경종·영조 초년에는 숙종·경종의 어필을 덧붙여 간행하였다. 목각본의 특징은 양각(陽刻)에 선장(線裝)이며, 특기할 사항은 선조의 어필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이는 선조가 명필로 유명한 이유도 있지만 『열성어필』의 간행에 앞서 1630년(인조 8)에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 등의 주관으로 선조만의 어필을 목판에 새긴 『선조어필』이 간행된 사실과 관계가 있다. 그 뒤 선왕의 어필이 간행되면서 열성의 어필을 함께 새기는 방식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정조 연간 이후로는 단일 국왕의 어필이 몇몇 간행되었으나 『열성어필』의 전통은 약화된 듯 더 이상 추가, 발간되지 못했다. 이는 17세기 이래 『열성어필』이 민간에 널리 전파되었으므로 간행의 효과가 크지 않았고, 특히 그간 구하지 못했던 태조의 어필이 보충되어 『열성어필』의 면모가 어느 정도 갖추어졌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열성어필』의 간행은 왕실의 위엄을 오래도록 전할 수 있는 효과적인 사업이었다. 『열성어필』은 종친부 등 왕실 관련 부서에서 업무를 주관했고, 기술 공정은 교서관에서 맡았으므로 당대 최고의 정성과 기술이 집약된 왕실의 대표 출판물이었다.

조선시대 어필의 서체를 살펴보면, 조선전기는 송설체(松雪體)의 영향이 짙었다. 대표적인 기록으로 김안로(金安老)의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서는 “성종은 아리땁고 단중(端重)하여 조용히 조송설(趙松雪: 조맹부)의 법도에 깊이 잠기었다. 문종은 조자앙(趙子昻: 조맹부)의 서법을 모방했는데, 그 정묘함이 입신(入神)의 경지였다.”고 평가하였다.

문종과 성종이 따랐다는 조맹부의 송설체는 고려말에 유입된 이래 조선초에 들어 널리 확산되면서 어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조맹부의 서풍은 이후 인종과 명종대까지 지속되었는데, 『열성어필』에서 그러한 양상을 여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선조대에 이르러서는 이전보다 단정한 짜임과 근엄한 획법으로 변화했는데, 그 특징은 당대의 명필 한호(韓濩)의 글씨에도 잘 나타나 있어 당시의 유행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선조의 어필은 이후 원종, 인조, 효종으로 계승되면서 17세기 내내 유행하였다. 그 뒤 현종에 이르러서는 효종의 어필을 계승한 한편, 송설체의 유려한 필치를 다시금 가미한 서풍이 나타났다. 특히 숙종은 현종의 송설체풍을 이어받아 더욱 유려하고 기품 있는 글씨를 구사하여 후대의 어필에 영향을 끼쳤다.

조선시대 왕 가운데 많은 어필을 남긴 이로는 영조를 들 수 있다. 현존하는 영조의 필적은 묵적과 모각으로 대별되는데, 그중 모각은 어필첩으로 제작된 것과 편액 및 시판(詩板)이 다수 전한다. 영조의 해서는 대부분 송설체 계통이고, 일부 왕희지체와 송설체를 합친 것도 있다. 영조의 행서는 글자의 짜임과 운필이 좀 더 부드럽고 자유로운데, 노년으로 갈수록 그러한 현상이 더욱 심하였다.

조선왕조의 어필 서풍은 사대부의 글씨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서풍과 달리, 고법(古法)의 준수와 함께 선대왕을 계승하려는 보수성이 강해 조선시대 서예에서 하나의 특색을 이룬다.

참고문헌

  •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대동야승(大東野乘)』
  • 신병주,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함께, 2007.
  • 이완우, 「영조의 어필」, 『영조대왕의 글·글씨』, 미술문화, 2001.
  • 이완우, 「조선시대의 어필」, 『조선의 왕, 어필로 보는 조선 500년』, 한솔종이박물관,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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