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반승(粥飯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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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과 밥만 많이 먹는 승려라는 뜻으로, 승려를 낮잡아 이르는 말.

개설

죽반승(粥飯僧)은 아침 죽과 낮 밥을 매일 차지하는 승려라는 의미로, 무능한 사람을 조소하는 말이기도 하다. 고려말기에서 조선초기의 유학자 관료들은 불교를 없애야 하는 중요한 근거로 무위도식(無爲徒食)을 지적하였다. 이 용어는 성리학의 이념에 기초해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도’인 불교를 비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내용 및 특징

고려말기와 조선초기에 대두된 불교 억압은 사찰과 승려의 무분별한 증가, 사찰의 막대한 토지 소유 등이 배경이 되었다. 그 당시 집권층과 유학자들은 승려들이 사찰의 엄청난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사치와 향락을 일삼고 있으며, 그 결과 사회 경제가 파탄에 이를 지경이라고 비판하였다.

사실 승려의 노동 문제는 유교의 교리와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정도전(鄭道傳)은 유교의 직분론(職分論)과 관련하여, 왕과 신하는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농부와 상인은 힘써 일하는 것을, 유학자는 안에서는 효도하고 밖에서는 도를 지켜 후학을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승려는 일하지 않고 손을 놀리는 백성이라는 의미라는 의미로 유수지민(遊手之民)이라 하여, 생산은 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대표적인 부류로 분류하였다. 실제로 성종 연간에 왕에게 경서를 강의했던 시강관(侍講官)이맹현(李孟賢)은, 군역을 피하여 앉아 놀고먹는 승려가 많아 군사의 수효가 날로 줄고 농민이 곤궁해진다며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할 것을 건의하였다(『성종실록』 5년 8월 23일).

한편 죽반승은 무능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일반적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말기의 대표적인 유학자 이색(李穡)은 한적한 자신의 삶을 죽반승에 비유하였다. 1495년(연산군 1)에 연산군은 신승선(愼承善)을 영의정으로 임명하였는데, 『연산군일기』의 사관(史官)은 그가 성질이 나약하여 일을 당하면 가부(可否)를 결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죽반승이라 불렀다고 기록하였다. 또 정종 때의 김종후(金宗厚)는 자신을 죽반승에 비유하고, 거주하는 서실(書室)을 죽반암(粥飯菴)이라 명명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목은집(牧隱集)』
  • 『본암집(本庵集)』
  • 『불씨잡변(佛氏雜辯)』
  • 김영태, 『한국불교사개설』, 경서원, 1986.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일조각, 1993.
  • 이상백, 「유불양교교대의 기연에 관한 일연구」, 『조선문화사연구논고』1, 을유문화사, 1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