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견(朴世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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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19년(광해군11)~1683년(숙종9) = 64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숙종(肅宗) 때에 활동한 문신. 자는 중고(仲固), 호는 단애(湍厓)· 고옹(痼翁)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서울 출신이다. 참찬(參贊)박동선(朴東善)의 손자이고, 서계(西溪)박세당(朴世堂)의 형이며, 문열공(文烈公)박태보(朴泰輔)의 백부(伯父)이다.

인조 시대 활동

1639년(인조17) 진사시(進士試)에 장원으로 합격한 뒤, 1643년(인조21) 건원릉(健元陵)참봉(參奉)에 보임되었으나 얼마 뒤에 사직했다. 1644년(인조22) 다시 사산감역(四山監役)에 임명되었으며, 1646년(인조24)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시직(侍直)에 임명되어, 3년 동안 위솔(衛率)· 익찬(翊贊)을 거쳐 사어(司禦)로 승진하였다. 1648년(인조26) 흡곡현령(歙谷縣令)에 임명되었다가 1649년(인조27) 파직(罷職)되었는데, 곧 모친상을 당하였다. 상기를 마치고 의빈부(儀賓府)도사(都事)에 임용되었고, 공조정랑으로 승진하였다가, 마전군수(麻田郡守)로 나갔다.

효종~현종 시대 활동

1654년(효종5) 춘당대(春塘臺)정시(庭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1655년(효종6) 성균관(成均館)직강(直講)을 거쳐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시강원(侍講院) 문학(文學)에 임명되었다. 1656년(효종7) 다시 사헌부장령이 되었다가, 시강원 필선(弼善)이 되었다. 1660년(현종1)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로 나갔다가, 1662년(현종3) 사헌부로 들어가서 헌납(獻納)·장령으로 차례로 승진하였다. 1664년(현종5) 통진현감(通津縣監)으로 나갔다가, 1667년(현종8) 시강원 보덕(輔德)을 거쳐 사간원사간(司諫)이 되었다. 1668년(현종9) 다시 시강원 보덕이 되었다가 사간원사간이 되었다. 1669년(현종 10) 다시 사간·보덕이 되었다가, 사헌부집의(執義)를 거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발탁되었다. 1670년(현종11) 병조참의가 되고, 1671년(현종12) 다시 승지(承旨)가 되었으며, 1672년(현종13) 공조참의를 거쳐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다. 1673년(현종 14) 다시 승지가 되었다가 형조참의로 전임되었다. 1674년(현종15)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다가, 1675년(숙종1)에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1683년(숙종9) 1월 13일 서울 남부(南部) 성명방(誠明坊)의 집에서 죽었는데, 향년 64세였다.

묘소와 성품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남쪽 20여리 수락산(水落山) 언덕에 있는데, 동생 박세당(朴世堂)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 뒤에 둘째 아들 박태상(朴泰尙)이 출세하여 이조판서로 추증(追贈)되었다.

박세견은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였으며, 자라서는 문사(文辭)에 능하였고 중년에 송(宋)나라 유현(儒賢)들의 글을 읽고 대의(大意)에 정통하였다고 한다. 고을을 다스릴 때에는 대범하여 민심을 얻었으나, 아전들이 좋아하지 않아서 중상모략을 많이 당하였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서계집(西溪集)』
  • 『약천집(藥川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명재유고(明齋遺稿)』
  • 『송자대전(宋子大典)』
  • 『포저집(浦渚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