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원릉(健元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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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능.

개설

오늘날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일대인 양주검암촌(儉巖村)에 건원릉이 조성된 뒤, 국상(國喪)이 생길 때마다 이 능의 경내는 언제나 왕릉 터의 물망에 올랐다. 이후 이곳에 현릉(顯陵), 목릉(穆陵), 휘릉(徽陵), 숭릉(崇陵), 혜릉(惠陵), 원릉(元陵), 수릉(綏陵), 경릉(敬陵) 등 8기의 능이 더 조성되면서 동구릉(東九陵)이라 불리게 되었다.

조성 경위

1408년(태종 8) 5월 24일, 태조이성계는 태상왕으로 물러난 지 10년 만에 창덕궁의 별전에서 승하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빈전·국장·조묘·재(齋)의 4도감(都監)을 설치하고 국장을 준비했는데, 산릉의 자리는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하륜(河崙) 등을 보내 살피도록 하였다. 산릉을 찾는 동안 빈전에서는 능엄법석(楞嚴法席), 법화삼매참법석(法華三昧懺法席) 등 불교 의례가 계속되었다(『태종실록』 8년 7월 8일). 아직 고려의 습속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해 6월 28일에 하륜 등이 양주검암촌에 길지가 있음을 아뢰자, 태종이 직접 가서 살펴보고 조묘도감(造墓都監) 제조(提調)박자청(朴子靑)으로 하여금 공장(工匠)을 거느리고 역사를 시작하도록 하였다. 7월 9일에는 서운관(書雲觀)에서 석실 만들기를 청하여 의정부에 논의하였으나, 『가례(家禮)』에 의거해 회격(灰隔)으로 하자는 의견도 있어 쉽게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러자 태종은 당시 세자였던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로 하여금 종묘에 나가 점을 치도록 했고, 점괘에 따라 석실로 정했다.

산릉의 재궁(齋宮)에는 개경사(開慶寺)라는 이름을 내리고 조계종에 속하게 하여 노비 150구(口)와 전지(田地) 300결(結)을 주었으며, 수호군 100명으로 하여금 능을 지키도록 했다. 태조가 승하한 지 100일째 되는 9월 5일에 흥덕사(興德寺)에서 백일재를 베풀고, 9월 7일에 발인하여 9월 9일 자시에 현궁(玄宮)에 시신을 봉안하였다. 이후 신주는 반우(返虞)하여 혼전인 문소전(文昭殿)에 모셨다.

조성 상황

건원릉의 현궁은 석실로 조성하였으며, 능상의 봉분은 병풍석과 상석으로 감쌌다. 봉분 바깥쪽에는 난간석을 두르고, 그 뒤로는 곡장(曲墻)을 설치했다. 봉분에는 북도(北道)의 청완(靑薍)으로 사초(莎草)하였다. 봉분의 사방에는 양석과 호석 각 4개씩을 놓고, 봉분 상계(上階)에 혼유석과 망주석 1쌍, 중계(中階)에는 장명등과 문인석, 마석 1쌍씩, 하계(下階)에는 무인석과 마석 1쌍씩을 배치했다. 정자각은 정전(正殿)이 3칸, 배위청(拜位廳)이 2칸이며,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표석을 보호하는 비각은 왕릉 중 규모가 가장 큰 정면 4칸에 측면 3칸이며,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변천

1409년(태종 9) 태종은 창덕궁과 더불어 건원릉 주변에 소나무를 심게 했으며, 같은 해 윤4월에는 13자 2치 크기의 신도비를 건립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비각은 세우지 않았다. 1415년(태종 15)에는 이양달(李陽達)이 풀과 나무가 무성해 들에 갑자기 불이 나면 끄기가 어렵다고 하자, 금화지(禁火地) 외의 땅에는 백성들이 경작하는 것을 허용하라고 명했다.

1588년(선조 21)에 헌관(獻官)이 다른 능에는 비각이 있으나 건원릉에만 없어 표석이 잡초 속에 묻혀 보기에 민망하다고 아뢰었으나, 갑자기 비각을 만들 수는 없다고 하여 미루어졌다(『선조실록』 21년 7월 8일). 이후 1690년(숙종 16) 비각이 건립되었지만 당시 조정에서는 건원릉에 본래부터 비각이 있었으나 전쟁으로 허물어졌다라는 생각을 했고 이에 비각을 건립하기에 이른 것이다(『숙종실록』 16년 10월 27일). 그러나 건원릉의 비각은 이때 처음 조영(造營)된 것이다.

1629년(인조 7)에는 봉분의 사초를 고치는 데 대한 논의가 있었다. 건원릉의 봉분에는 북도의 청완을 사초로 썼기 때문에 다른 능과 달리 사초가 매우 무성했다. 그런데 봉분 앞쪽의 잡목뿌리가 봉분으로 뻗자 주변 청완을 뽑아 버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으나 청완은 태조의 유교(遺敎)로 특별히 쓴 것이었으므로 사초는 두고 나무뿌리만 뽑아내게 하였다(『인조실록』 7년 3월 19일).

1708년(숙종 34)에는 정자각을 개수하려 했으나, 왜적의 병화가 미치지 않은 것은 신령의 도움이라 일컫고 있으니 쉽게 고칠 수 없다고 하여 그대로 두었다(『숙종실록』 34년 8월 9일). 1722년(경종 2)에도 정자각이 오래되어 기울어지고 허물어져서 수개하려 했으나, 숙종조의 전례에 따라 여름 장맛비를 보아 가며 살피라는 명이 내려져 다시 그 상태를 유지하게 되었다(『경종실록』 2년 3월 22일). 1764년(영조 40)에는 정자각에 틈이 생기는 등 훼손 정도가 심해 개수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마침내 중수청(重修廳)을 설치하고 공조(工曹), 호조(戶曹), 예조(禮曹)의 당상관들이 감독하여 공역을 진행했다(『영조실록』 40년 2월 12일). 영조가 직접 나가 이틀 동안 역사를 살피기도 했다. 이때의 공사 내용은 『건원릉정자각중수도감의궤(健元陵丁字閣重修都監儀軌)』에 잘 기록되어 있다.

대한제국 선포 후 1900년(광무 4)에 예에 따라 고종은 선대왕들을 황제로 추존하고 건원릉, 제릉(齊陵), 정릉(貞陵), 융릉(隆陵), 건릉(健陵), 인릉(仁陵), 수릉의 표석 고치는 일을 진행하면서 전면과 음기(陰記)를 직접 썼다.

관련 사항

건원릉의 터는 태조 승하 당시 하륜 등에 의해 정해졌지만, 태조가 승려 무학(無學)과 더불어 친히 고른 땅이다(『현종실록』 즉위년 7월 2일). 건원릉은 나라를 창업한 태조의 능이므로, 이후 왕들은 새로 조성하는 능을 건원릉의 제도에 넘치지 않게 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건원릉은 동구릉의 하나로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2009년에는 다른 조선 왕릉과 더불어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참고문헌

  • 『건원릉정자각중수도감의궤(健元陵丁字閣重修都監儀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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