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중(閔鼎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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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28년(인조6)∼1692년(숙종18) = 65세]. 조선 후기 효종∼숙종 때의 문신.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강원도 관찰사민광훈(閔光勳)이고, 어머니 연안이씨(延安李氏)는 이광정(李光庭)의 딸이다. 경주부윤(慶州府尹)민기(閔機)의 손자이고, 대사헌민시중(閔蓍重)의 동생이며, 숙종의 국구(國舅) 민유중(閔維重)의 형이다.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의 문인이다.

효종 시대 활동

1648년(인조2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49년(효종즉위) 정시(庭試)문과(文科)에 장원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2세였다. 이때 효종이 새로 즉위하여,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과 함께 ‘북벌(北伐)’을 계획할 때 그 실무를 맡아서 크게 활약하였다. 성균관 전적(典籍)에 보임되었다가, 예조 좌랑을 거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사서(司書)로 옮겼다. 1651년(효종2)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었고,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는데,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전라도를 안렴(按廉)하였다. 이때 날씨가 오래 가물었으므로, 그가 상서하여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강씨(姜氏)의 원통함을 풀어주도록 간청하였는데, 효종이 인견(引見)하여 <강빈(姜嬪)의 옥사(獄事)>를 용서할 수 없는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1652년(효종3)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가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충청도에 처음 시행된 대동법(大同法)이 민간에서도 편리한지를 탐문하여 보고하였다. 1655년(효종6) 추쇄도감(推刷都監)에서 북방 지역에 어사(御使)를 보내어 노비(奴婢)를 추쇄할 때 평안도어사로 나가서 전란 중에 도망한 노비를 색출하였다. 1657년(효종8) 홍문관 부응교(副應敎)에 임명되었고, 1658년(효종9)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집의(執義)로 옮겼으며, 동래부사(東萊府使)로 나갔다. 그가 동래부사로 있을 때 왜관(倭館)의 왜인들을 엄중히 단속하여 오랫동안 쌓인 폐단을 바로잡았으나 그는 병으로 해임당하게 되었다. 송시열이 그를 해임하면 왜인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고 효종에게 아뢰자 효종이 그를 예조 참의로 소환하였다.

현종 시대 활동

1659년 현종이 즉위하자, 인조 때에 억울하게 죽은 소현세자빈강씨의 신원(伸寃)을 강력히 호소하였다. 사람들은 그가 중벌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하였으나, 그는 죄를 받지 않았고, 오히려 현종에게 그의 충직함을 신임 받았다. 그리고 예조 참의에서 병조 참지로 옮겨서 임명되었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3년 상례를 끝마치고, 1661년(현종2)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 그때 전라도관찰사가 “땀을 내는 불상(佛像)이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자 모두 신기하게 여겼으나, 그는 그 불상을 부수어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폐단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662년(현종3)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가,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 이때 불당을 헐어서 그 재목과 기와로 성균관의 재사(齋舍)를 증축하여, 비천당(丕闡堂) · 일량재(一兩齋) · 벽입재(闢入齋) 등의 기숙사를 완성하였다. 1663년(현종4) 삼남(三南) 지방에 큰 기근이 들자 어공(御供)을 감하고 백관들의 녹봉도 각기 1섬씩 감하였으며, 진휼청(賑恤廳)을 설치하고 민정중을 그 당상관으로 임명하여 기민을 구휼(救恤)하게 하였다. 이조 참의로 옮기고 비변사와 승문원의 제조(提調)를 겸임하였다. 1664년(현종5) 이조 참판으로 승진하였다가 함경도관찰사로 나가서 1666년(현종7) 경원진(慶源鎭) · 회령진(會寧鎭)에 교양관(敎養官)을 두어 북도의 유생들을 가르치게 했다.

1667년(현종8)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으나, 병이라고 일컫고 사양하였다. 1668년(현종9) 경연 동지사가 되었다가, 세자시강원 좌부빈객(左副賓客) · 우빈객(右賓客)을 거쳐 호조 판서가 되었고, 1669년(현종10) 성균관 동지사를 겸임하였다. 이때 스승 송시열이 우의정(右議政)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자, 그도 거취를 함께 하고자 사직하였으나, 현종이 허락하지 않고 바로 공조 판서로 임명하였다. 동지사(冬至使)에 임명되어 부사(副使)권상구(權尙矩)와 서장관(書狀官)신경윤(愼景尹) 등과 함께 중국 청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1670년(현종11) 형조 판서가 되었다가,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으로 승진하였다. 1671년(현종12)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상소하여 면직을 간청하니, 현종이 허락하였다. 1672년(현종13) 그의 스승 동춘당(同春堂)송준길이 죽었다.

숙종 시대 활동

1675년(숙종1)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남인 윤휴(尹鑴) · 허적(許積) 등이 정권을 잡고, 좌의정송시열을 거제도(巨濟島)로 귀양 보내니, 그도 아우 민유중과 함께 송시열과 같은 죄를 받기를 자청하였다. 그리하여 관직을 삭탈(削奪)당하고 성문 밖으로 쫓겨났는데, 그 뒤에 고신(告身)마저 빼앗겼다. 이때 죽은 동춘당송준길의 관작(官爵)도 추탈(追奪)하였다. 민정중 · 민유중 형제는 충주(忠州)로 내려가서 가까운 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서로 왕래하면서 술을 마시고 강설(講說)하는 것을 지극한 즐거움으로 삼았는데, 그들에게 글을 배우려는 향리(鄕里)의 자제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1677년(숙종3) 숙종이 민정중 형제의 문외출송(門外出送)을 풀어주도록 명하여, 이듬해 봄에 사유(赦宥)를 입고 풀려나서 직첩(職牒)을 돌려받았다. 그러나 1679년(숙종5) 남인들은 민정중을 장흥(長興)에, 민유중을 흥해(興海)로 각각 귀양보냈다. 이들 형제는 6개월 만에 귀양에서 풀려나, 충주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1680년(숙종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서 남인 허적과 윤휴가 처형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하게 되자, 정1품상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동생 민유중의 딸이 숙종의 계비(繼妃)가 되었는데, 그녀가 바로 인현왕후(仁顯王后)이다. 이때 문충공(文忠公)김수항(金壽恒)이 영의정이었는데,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여 숙종의 정사를 보좌하였다. 그는 좌의정으로 승진하고, 총호사(摠護使)를 겸임하였는데,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의 손자 김익훈(金益勳)이 반역에 연루된 혐의를 적극 변호하고, 또 윤증(尹拯)이 스승 송시열을 배반한 죄를 맹렬히 비난하였으므로, 소론(少論)의 반감을 샀다. 1681년(숙종7) 그는 병을 핑계로 정고(呈告)한 것이 일곱 차례였으나, 숙종이 승지(承旨)를 보내어 정사(政事)를 보살피도록 유시(諭示)하였다. 1682년(숙종8) 문안사(問安使)가 되어 서장관윤세기(尹世紀)와 함께 심양(瀋陽)에 가서 만주에 왔던 청나라 강희제(康熙帝)를 만나 문안하고 돌아오니, 숙종이 그 곳의 소식을 물었다. 1687년(숙종13) 동생 민유중이 병으로 먼저 죽었다.

1688년(숙종14) 후궁 장씨(後宮張氏: 희빈장씨)가 왕자 이균(李畇: 경종)을 낳자, 숙종이 그를 세자로 봉하려고 하였다. 이때 노론 송시열 · 김수항 · 민정중 등이 아직 인현왕후가 나이가 젊으니, 소생을 기다려야 한다며 반대하였다. 1689년(숙종15) 숙종은 남인과 손을 잡고 왕자 이균을 세자로 봉하고, 후궁 장씨를 소의(昭儀)에서 희빈(禧嬪)으로 승격시켰다. 그러자 희빈장씨(禧嬪張氏)와 세자를 지지하던 남인 권대운(權大運) · 김덕원(金德遠) 등이 정권을 잡고 <기사환국(己巳換局)>을 일으켰다. 노론 송시열과 김수항은 모두 섬으로 귀양갔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이어 인현왕후는 폐위되고, 희빈장씨는 왕후가 되었다. 민정중도 평안도 벽동(碧潼)으로 귀양 가서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그는 평소에 풍비(風痺)를 앓아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였는데, 추운 극변에 끌려가는 바람에 병이 악화되어 1692년(숙종18) 6월 25일 안치된 집에서 죽으니, 향년이 65세였다. 1694년(숙종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인현왕후가 다시 복위되었다. 그의 관작도 회복되었고 그의 무덤도 비로소 양주(楊州)로 옮겨 장례를 치렀는데, 나중에 다시 여주(驪州)로 옮겼다.

저서로는 『노봉집(老峯集)』 · 『노봉연중설화(老峯筵中說話)』 · 『임진유문(壬辰遺聞)』 등이 있다. 그는 글씨를 잘 썼는데, 「우상(右相) 이완(李浣) 비(碑)」 ·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민심언(閔審言) 묘표(墓表)」 · 「개심사(開心寺) 대웅전(大雄殿) 편액(扁額)」 등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민정중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엄격하고 밝았으며, 영특하고 강직하여 직언하기를 좋아하였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예법으로 사대부를 이끌었다. 그러므로 송시열 · 송준길 등이 가장 중시하는 차세대 인물이 되었다.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어 어진 인재를 길러내는 데에 큰 공을 세웠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수몽(守夢)정엽(鄭曄) 이후에 제일이라고 칭송하였다. 그는 『소학(小學)』을 읽고, 평소 그 가르침대로 행동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그의 아들과 조카들도 이러한 기풍(氣風)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칭찬하였다. 그는 고모부 낙정재(樂靜齋)조석윤(趙錫胤)을 본받아서 평생 청렴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벼슬하려고 힘썼다. 그는 벼슬길에 나가서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거치면서 한 번도 벼슬을 사양한 적이 없었지만, 1667년(현종8) 대사헌에 임명되자 그는 대사헌은 책임이 중한 자리이기 때문에 조석윤 같은 이라야만 감당할 수 있다고 하며 사양하였다.

1658년(효종9) 그가 동래부사로 있을 때, 법을 어기는 왜인들을 법대로 처벌하여 왜인들의 불평과 불만이 많았다. 하루는 왜관에서 왜인들에게 술자리를 마련하던 중, 어떤 왜인이 갑자기 칼을 그의 자리로 던져서 아주 위험할 뻔 했으나 그는 태연하였다. 그가 즉시 관문을 막고 범인을 찾아내어 처벌하자, 왜인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감히 법을 어기지 못하였다.

나이 37세 때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는데, 함흥(咸興)의 사인(士人)에게 작은 형벌을 준 일이 있었다. 이듬해 작별할 때 그 사인이 시를 지어, “당신의 기상은 가을겨울처럼 차갑고 봄여름처럼 따뜻한 맛은 모자랍니다.”라고 직언하니, 민정중이 술에 취하였으나,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고맙다고 절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아랫사람이 자기의 잘못을 지적하더라도 이것을 흔쾌히 받아들일 줄 아는 용기를 지녔다.

한편, 『숙종실록(肅宗實錄)』「보궐정오」에서는 그의 「졸기」에 “그는 성미가 편협하여 괴팍함에 가깝고 위엄을 제멋대로 부렸다.”라고 적기도 하였다.

묘소와 비문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묘소는 경기도 여주 대거(大居)의 언덕에 있으며, 동생 민유중의 외손자 이재(李縡)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충주의 누암서원(樓巖書院), 장흥의 연곡서원(淵谷書院), 함흥의 운전서원(雲田書院), 벽동의 구봉서원(九峯書院), 정평의 망덕서원(望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첫째 부인 신씨(申氏)는 세마(洗馬)신승(申昇)의 딸이고, 둘째 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는 관찰사홍처윤(洪處尹)의 딸인데,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민진장(閔鎭長)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우의정을 지냈고, 딸은 이인식(李寅烒)에게 출가하였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명재유고(明齋遺稿)』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호전서(白湖全書)』
  • 『사계전서(沙溪全書)』
  • 『서계집(西溪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수당집(修堂集)』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암집(燕巖集)』
  • 『우계집(牛溪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음집(淸陰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