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효손(尹孝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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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31년(세종 13)∼1503년(연산군 9) = 73세]. 조선 전기 세조~연산군 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이다. 자는 유경(有慶)이고, 호는 추계(楸溪)다.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주거지도 남원이다. 증조부는 보승 낭장(保勝郎將)을 지내고 호조 참의(參議)에 추증된 윤언재(尹彦材)이며, 조부는 장사 감무(長沙監務)를 지내고 병조 참판(參判)에 추증된 윤희(尹希)인데, 『방목』에는 윤희장(尹希長)이라고 적혀 있다. 아버지는 순창군(淳昌郡) 지사(知事)를 지내고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된 윤처관(尹處寬)이며 어머니 광산 정씨(光山鄭氏)는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정존(鄭存)의 딸이다. 영의정박원형(朴元亨)의 사위이다.

단종~예종 시대 활동

1450년(세종 32)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고, 1453년(단종 1)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3세였다.(『방목』) 바로 승문원(承文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1455년(세조 1) 집현전(集賢殿)저작(著作)을 거쳐, 성균관(成均館)박사(博士)가 되었고,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錄勳)되었다.(『이요정집(二樂亭集)』 권13 「의정부좌참찬 윤공효손 신도비명(議政府左參贊尹公孝孫神道碑銘)」참고, 이하 「신도비명」이라 약칭.) 1457년(세조 3) 중시(重試)문과(文科)의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을 거쳐 예조 정랑(正郞)이 되었으며, 성균관 사예(司藝)를 거쳐, 의정부 사인(舍人)이 되었다.

부모의 병 때문에 사직하기를 청하니, 고향 남원 부근의 장흥부사(長興府使)에 임명되었다. 1465년(세조 11)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면서 3년 상례를 끝마치고, 1467년(세조 13) 훈련원(訓練院)에 들어가서 부정(副正)이 되었다가, 훈련원 정(正)으로 승진하였다. 1469년(예종 1) 훈련원 부정으로 있을 때 상제(喪制)·공법(貢法)·사창(社倉)·정병(正兵) 등 시정(時政)의 폐단에 대하여 상소하였다가, 도리어 그 내용이 선왕(先王)을 비방하였다고 하여 하옥(下獄)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성종 시대 활동

1470년(성종 1) 통례원(通禮院) 좌통례(左通禮)로 승진되고, 좌리 원종공신(佐理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당시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오례의주(五禮儀註)』의 편찬에 참여하였다.(「신도비명」 참고.) 1471년(성종 2) 『세조실록(世祖實錄)』의 편수(編修)를 끝마치자, 성종이 향 표리(鄕表裏) 1벌을 하사하였다. 1472년(성종 3) 예문록(藝文錄)에 선발되었는데, 당시의 젊은 인재 30명 안에 포함되었다. 1473년(성종 4) 그는 고을에서 지내는 제사에 쓰이는 물건을 미리 준비하는 전사고(典祀庫)를 설치하자고 주장하였다.(『성종실록(成宗實錄)』 참고.)

1473년(성종 4) 호조 참의로 승진하였고, 예조 참의로 전임하였다.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기를 간청하니 특별히 전주부윤(全州府尹)에 임명되었다.(「신도비명」·『사가집(四佳集)』 권1 참고.) 전주부윤 재직 당시, 공법(貢法)의 연분법(年分法)에 있어서 토지 품질의 등급을 보다 치밀하게 나누는 고원 등제(庫員等第)의 실시를 건의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다.(『성종실록』 참고.) 그때 재해에 대한 진휼(賑恤)을 잘하였으므로, 전주의 백성들이 정부에 그의 포상을 요청하여, 성종이 당 표리(唐表裏) 1벌을 하사하였다.

1476년(성종 7) 공조 참판으로 승진하였고, 이듬해에 형조 참판(刑曹參判)이 되었다. 1478년(성종 9)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나갔다가,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그가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밀양부사(密陽府使)박시형(朴時衡)이 창고에 불이 나서 창고 곡식 7백여 섬을 태웠는데도 이를 알지 못하였는데, 대사헌이 되고 나서 이 일이 밝혀져, 관찰사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관품이 종2품상 가정대부(嘉靖大夫)에서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한 자급(資級) 강등되었고, 관직도 대사헌에서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로 좌천되었다. 그 뒤에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귀양(歸養)하기를 간청하자, 1482년(성종 13) 순창군수(淳昌郡守)에 임명되었고, 1486년(성종 17) 나주목사(羅州牧使)가 되었다. 1489년(성종 20) 어머니의 상(喪)를 당하여, 3년 동안 상례를 끝마치고, 중추부 동지사에 임명되어 세자시강원 우부빈객(右副賓客)을 겸임하였다.

1489년(성종 20) 하정조사(賀正朝使)로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오면서 『활민대략(活民大略)』·『속 자치통감강목(續資治通鑑綱目)』과 원나라 조맹부(趙孟頫)가 쓴 서족(書簇)을 가지고 왔다. 또 중국의 예제(禮制)를 참작하여 문묘(文廟)의 제례에서 모두 찬탁(饌卓)을 사용할 것과, 세자의 관(冠)과 백관의 도포(道袍)를 중국식으로 개정할 것을 건의하니, 성종이 모두 그대로 따라서 시행하였다. 1491년(성종 22) 비로소 종2품상 가정대부로 승진하여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한성부좌윤을 거쳐, 1493년(성종 24) 형조 판서로 승진하였고,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었다. 1494년(성종 25) 성종이 승하하자, 빈전도감(殯殿都監)제조(提調)가 되어 국상(國喪)을 치렀고, 의금부 지사에 임명되어, 춘추관 지사와 실록청(實錄廳)당상관(堂上官)을 겸임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의 수찬에 참여하였다.

연산군 시대 활동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김일손(金馹孫)의 사초(史草)에 관련되어 파직되었다가, 1499년(연산군 5)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대고 사직하였다. 1500년(연산군 6)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管)에 임명되었다가, 1501년(연산군 7) 좌참찬이 되었고, 이듬해에 우참찬이 되었다. 1503년(연산군 9)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오르고 다시 좌참찬이 되었다. 1503년 5월 24일 노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73세였다.

성품과 일화

윤효손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용모가 늠름하여 믿을 만하고, 성품이 조심성이 있고 정성스러웠으며, 말과 웃음이 적었다. 어릴 때부터 영특한 자질이 있어서, 『소학(小學)』을 읽으면서, 그 가르침대로 집안을 청소하고,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예를 곧잘 행하니, 그 할아버지 윤희장(尹希長)이 감탄하여, “이 아이가 아직 어리지만 예절을 잘 알고 있으니, 이름을 ‘효손(孝孫)’이라고 지어야 하겠다.” 하고, 그 이름을 바꾸었다. 그가 장성하자, 힘써 학업을 닦아 지조가 단정하고 용모가 믿을 만하니, 문헌공(文憲公)박원형이 그 소문을 듣고 친히 찾아가서 그를 만나보고 마음에 들어 마침내 자기 딸을 그에게 출가시켰다.(「신도비명」·『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6 참고.)

1465년(세조 11)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너무나 애통해 하여 상례(喪禮)조차 치르지 못할 정도였고, 여묘살이할 때에는 반혼당(返魂堂)을 묘막(墓幕) 안에 설치하고 조석(朝夕)으로 배알하고 하루 세끼 전(奠)을 올리기를 3년 동안 게을리 하지 않았다. 묘소에서 집까지 거리가 10여 리인데, 매일 아침마다 아버지 혼전(魂殿)에 제사를 지내고, 바로 집으로 걸어서 돌아가서 어머니를 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살아 있는 어머니를 섬기는 효도가 한결같이 순수한 정성에서 나왔다.(「신도비명」 참고.) 1473년(성종 4)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자청하여 전주부윤으로 부임하고, 남원의 어머니를 관사로 모셔 와서 봉양하였다. 관사 안에 작은 부엌을 만들어 놓고 부인과 함께 어머니가 좋아하는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 어머니에게 드렸다.9『연려실기술』 권6 참고.) 때때로 자신이 직접 강가에 나가서 물고기를 낚고 말을 타고 산속으로 들어가서 짐승을 사냥하여 고기반찬을 장만하였다.

1486년(성종 17)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어머니를 전주의 관사에 모시고 봉양하기를 전주 부윤 때와 똑같이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어머니가 남원 본가에서 별세하자, 묘막을 지키면서 정성을 다하기를, 앞서 아버지의 상례 때와 똑같이 하였다. 그때 3년 동안 한번도 집에 내왕한 적이 없었고,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그는 초상 때에는 너무나 애통해 하여 숨이 거의 끊어질 지경이었고, 여묘살이 할 때에는 슬픔이 지나쳐서 몸이 파리하고 야위어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신도비명」 참고.)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자, 아침저녁으로 사당에 배알(拜謁)하고,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사당에 고하며, 초하루 보름에도 반드시 제사를 지냈다. 새로 난 음식을 얻으면, 사당에 올리지 않고 감히 먼저 맛보지 않았다. 아버지가 정해년(丁亥年)에 출생하였다고 하여, 종신토록 ‘돼지고기[亥]’를 먹지 않았는데, 그의 정성과 효도는 그 이름을 ‘효손’이라고 일컬을 만큼 다른 사람이 따르기 어려운 것이 많았다.(『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연산군 9년 5월 24일 「윤효손 졸기」 참고.)

다만 그는 비루하고 인색하여 재물을 상당히 많이 모았으므로, 수령(守令)으로 있을 때 청렴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만년에 연산군의 아들인 창녕대군(昌寧大君)이 그의 서울 집에 나가서 거처하였는데, 그는 이것을 이용하여 궁인(宮人)들에게 후하게 뇌물을 주어서, 높은 반열의 벼슬에 올라가고, 또 그 아들도 벼슬을 시켰기 때문에 사람들이 비루하게 여겼다.(『연산군일기』「윤효손 졸기」 참고.) 이것은 연산군이 폐위된 다음에 쓰여 진 졸기에서 그를 비난하는 글이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묘소는 전라도 남원 산동리(山洞里)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송계(松溪)신용개(申用漑)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이요정집(二樂亭集)』 권13 「의정부좌참찬 윤공효손 신도비명(議政府左參贊尹公孝孫神道碑銘)」) 남원의 방산서원(方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부인 죽산 박씨(竹山朴氏)는 영의정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박원형의 딸인데, 자녀는 7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윤계형(尹繼衡)은 풍덕군수(豐德郡守)이고, 2남 윤승형(尹承衡)은 순천교수(順天敎授)이며, 3남 윤복형(尹復衡)은 의영고(義盈庫)봉사(奉事)이고, 4남 윤세형(尹世衡)은 진사(進士)이며, 5남 윤함형(尹函衡)은 종사랑(從仕郞)이고, 6남 윤지형(尹止衡)은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이며, 7남 윤완형(尹完衡)은 장사랑(將仕郞)이다. 딸은 후릉참봉(厚陵參奉)허형(許衡)에게 출가하였다.(「신도비명」 참고.)

참고문헌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이요정집(二樂亭集)』
  • 『사가집(四佳集)』
  • 『성호사설(星湖僿說)』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점필재집(佔畢齋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해동야언(海東野言)』
  • 『해동잡록(海東雜錄)』
  • 『삼탄집(三灘集)』
  • 『사숙재집(私淑齋集)』
  • 『소총유고(篠䕺遺稿)』
  • 『허백정집(虛白亭集)』
  • 『남계집(藍溪集)』
  • 『일두집(一蠹集)』
  • 『월헌집(月軒集)』
  • 『재사당일집(再思堂逸集)』
  • 『목계일고(木溪逸稿)』
  • 『수헌집(睡軒集)』
  • 『망헌유고(忘軒遺稿)』
  • 『허암유집(虛庵遺集)』
  • 『이평사집(李評事集)』
  • 『양곡집(陽谷集)』
  • 『용주유고(龍洲遺稿)』
  • 『월주집(月洲集)』
  • 『물재집(勿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