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포(道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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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가 남자들이 외출복이나 의례복으로 입었던 포(袍)의 하나.

개설

도포는 곧은 깃에 넓은 소매[廣袖]가 달렸으며 뒷자락이 겹으로 되어 있는 사대부의 웃옷[上服]이다.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남자 포(袍)라고 할 수 있다. 도포에는 갓이나 관을 쓰고 가는 띠를 띠었고 태사혜(太史鞋)를 신었다. 가는 띠는 자적색, 남색, 청색, 쑥색, 흰색 등의 색으로 만들었으며 흰색은 제사지낼 때 띠었다.

도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옷이 이미 고려 말 해인사 비로자나불 복장물 포 중에서 확인된바 있다. 조선시대의 도포는 16세기 후기부터 명칭과 그 존재가 확인된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석명(李碩明) 묘의 도포가 가장 오래되었다. 그리고 명칭은 김세렴(金世濂)이 찬한 곽월(郭越)의 묘비명 내용 중 1564년(명종 19)의 사건 기록에서 처음 보인다.

도포는 1884년(고종 21) 갑신의제개혁 때 소매 넓은 다른 포와 함께 폐지되었다가 1900년(광무 4)에 다시 예복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동안에는 간소화된 소매를 좁히고 뒤트임을 없앤 개량 도포를 관례, 혼례, 상례, 제례의 예복으로 착용하였다.

연원 및 변천

도포는 이른 시기 중국으로부터 기원한 것은 확실하나 정확하게 언제 전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도포의 기원에 대해서는 직령(直領) 기원설, 도복(道服) 기원설, 그리고 대구(大裘) 기원설 등이 다양하게 거론되고 있다.

중국의 경우, 도포와 유사한 형태가 도사의 옷으로 거론되고 있기 때문에 도복 기원설의 가능성도 있다. 성해응(成海應)의 『연경재전서(硏經齋全書)』에도 도포를 도사복(道士服)이라고도 하였다. 또한 『대한예전(大韓禮典)』에는 『삼재도회(三才圖會)』에 제시된 도의(道衣)의 도상을 그대로 모사하였다.

도포가 도사의 옷에서 유래되었으므로 도복 기원설이 가능하지만 우리나라에 전래 될 당시에는 중국 사대부의 웃옷인 상복(上服)이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대구 기원설도 가능성이 있다.

또한 형태로 볼 때는 직령 기원설도 설득력이 있다. 도포 옆선에 달린 무(武)의 주름을 비롯하여 무의 형태가 변화하는 과정은 직령에서 비롯된 옷이라고 보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도포의 기원은 도사의 옷으로 볼 수 있지만 이미 남자의 겉옷인 대구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그것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형태는 직령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겠다.

형태

도포는 두루마기와 같은 곧은 깃이 달렸으나 소매는 넓은 편이다. 그리고 뒤를 덮는 자락이 겹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자락을 『규합총서(閨閤叢書)』에서는 뒷자락이라고 하였으나 다른 문헌에는 수거(垂裾), 수폭(垂幅), 후수(後垂)의 명칭도 보인다.

도포 앞자락의 좌우 옆선에 달린 무가 뒷자락 안쪽으로 들어가 고정되었기에 그 위에 뒷자락이 다시 덮인 형태가 되며 그 안쪽에는 뒷중심의 허리 아래로 긴 트임이 만들어진다. 옆은 트인 구조이지만 앞자락의 무가 뒤로 들어가 달렸기에 속옷은 보이지 않는다. 뒷자락 안쪽에 무를 고정할 때는 무의 윗부분을 뒷길 안쪽에 직접 고정시키거나 어깨바대인 한판(汗版)에 부착하여 고정한다. 무의 겨드랑 부분에는 17세기 전기까지 주름이 잡혀 있는 것도 도포의 특징이다.

소매는 16세기 전기까지 진동 길이와 유사하거나 약간 넓은 형태였으나 임진왜란을 전후로 넓어지기 시작하여 흥선대원군이 광수포(廣袖袍) 폐지령을 내리고 두루마기를 착용하도록 할 때까지 소매통이 60㎝를 넘나드는 넓은 소매가 유행하였다.

16세기의 도포 형태는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이석명 묘에서 출토된 도포를 통해 볼 수 있다. 이석명 묘의 도포를 비롯하여 임진왜란 직후의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의 강대호(姜大虎) 묘 출토 도포나 안동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김약(金瀹) 묘 출토 도포에서는 무의 겨드랑이 부분에 주름 잡은 것이 발견되며 이후 서서히 주름이 없어지면서 후기의 도포 형태가 정착되었다. 특히 소매너비가 넓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홑으로 만든 도포 외에 겹으로 만든 도포도 흔하게 착용하였으며 색상도 현재보다는 훨씬 다양한 색상이 사용되었다. 기록상으로는 다홍색, 남색, 초록색, 자적색 등이 확인되며 출토 복식 중에는 아청색 도포가 흔히 확인된다. 그러나 점차 흰색과 청색(옥색) 도포가 즐겨 사용되었다.

19세기 후기에는 예복으로 착용되면서 홑 도포만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20세기 전기에는 개량도포(改良道袍)라고 하여 소매너비를 줄이고 뒷자락 안쪽의 갈라진 앞무를 붙여서 트임을 없앤 것이 착용되었으며 현재는 소매너비만 다시 넓어진 형태가 사용되고 있다.

용도

도포는 왕 이하 사대부들이 다양한 용도로 착용하였다. 임진왜란 전에는 연거복(燕居服)으로 입었으나 17세기 이후에는 연거복 기능 외에 의례복으로의 기능이 강화되었으며 유생들의 관복으로도 착용되었다. 19세기 말기 이후 지금까지는 의례복으로만 착용됨으로써 그 기능이 시대와 함께 변화되었다.

16세기 후기 『학봉집(鶴峯集)』에는 도포를 심의(深衣)와 직령(直領), 철릭[貼裏], 방의(方衣)와 함께 연거복의 하나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의하면 도포는 귀천의 구별이 있어 천한 자는 이를 입지 못하였으며 조관(朝官)이나 선비, 평민이 웃옷으로 도포를 입었다고 한다. 도포의 색상은 청색과 백색이 있는데 청색 도포는 길복으로 사용하고 백색 도포는 평상시 사용하였다. 정약용(丁若鏞)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당시 백정과 같은 천인도 모두 도포 큰 소매에 자락을 길게 늘어뜨려 조정의 벼슬아치처럼 하여 기강이 퇴폐해진다고 개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천민도 도포를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왕실에서도 왕이나 왕세자 역시 도포를 착용하였는데 파계사(把溪寺)에는 1740년(영조 16)에 영조가 시주한 영조의 청사(靑紗) 도포 유물(중요민속자료 제220호)이 남아 있다. 국왕도 사대부와 마찬가지로 친영 후 관복벗김을 도포로 하였는데 1847년(헌종 13) 헌종과 경빈김씨의 가례를 기록한 『헌종비경빈김씨순화궁가례시절차(憲宗妃慶嬪金氏順和宮嘉禮時節次)』에 동뢰연 후 방 친영하고 예를 마친 후 헌종이 두면[갓]에 도포를 착용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또한 『순조실록』에는 효명세자가 관례를 치를 때 초출복(初出服)으로 도포를 입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요즈음도 향사나 문중의 불천위제사 등과 같은 전통문화가 유지되고 있는 안동과 같은 지역에서는 도포를 입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주로 모시나 삼베 등으로 만든 홑 도포를 입는다. 이런 지역에서는 며느리가 시집올 때 시아버지와 남편의 도포를 해가지고 오는 경우가 많은데 생시에는 의례복으로 입다가 저승 가는 길에는 수의(壽衣)로 사용하곤 한다.

참고문헌

  • 『[문효세자]예장도감청의궤([文孝世子]禮葬都監廳儀軌)』
  • 『규장총서(閨閤叢書)』
  • 『목민심서(牧民心書)』
  • 『사례편람(四禮便覽)』
  • 『어우야담(於于野談)』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학봉선생문집(鶴峯先生文集)』
  • 안동대학교박물관 편, 『安東地域 傳統服飾』, 안동대학교박물관, 1996.
  • 곽망우당기념사업회 편, 『忘憂堂全書』, 곽망우당기념사업회, 1987.
  • 단국대학교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 편, 『한국복식』23, 단국대학교석주선기념박물관, 2005.
  • 단국대학교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 편,『한국복식』26, 단국대학교석주선기념박물관, 2008.
  • 이순원·유효선·조우현, 『이석명(李碩明) 묘 출토복식 조사보고서』, 서울대학교 박물관, 2000.
  • 이은주, 「道袍 양식의 발전에 대한 갈등·기능론적 분석」, 서울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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