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운(尹明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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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42년(인조 20)∼1718년(숙종 44) = 77세]. 조선 후기 숙종(肅宗) 때의 문신. 광흥창(廣興倉)수(守)와 신녕현감(新寧縣監) 등을 지냈다. 자는 여회(汝會)이고,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호조 참판(參判)윤비경(尹飛卿)이고, 어머니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좌랑(佐郞)이구연(李九淵)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진사(進士)윤유건(尹惟健)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금성현령(金城縣令)윤홍립(尹弘立)이다. 이대(李垈)·한성보(韓聖輔)·윤이건(尹以健)과 절친한 사이였다.

숙종 시대 활동

매형이 송시열(宋時烈)의 조카 송기학(宋基學)이었으므로, 일찍이 형 윤명우(尹明遇)와 함께 송시열로부터 글을 배웠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1659년(현종 즉위년) 5월 효종(孝宗)이 돌아가고 현종(顯宗)이 즉위하자, 인조(仁祖)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를 둘러싸고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이 대립하였다. 이것이 <기해예송(己亥禮訟)>이라고 하는 제 1차 예송이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은 1년복인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하였고, 남인의 윤선도(尹善道)와 윤휴(尹鑴)는 3년복을 주장하였다. 이때 윤명운(尹明運)의 아버지 윤비경은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로서 송시열의 기년복을 적극 지지하고 윤선도를 공격하는 데에 앞장섰다. 윤비경은 “윤선도는 남을 반역죄로 모함하였으니, 반좌죄(反坐罪)를 적용하여야 마땅합니다”라고 윤선도를 탄핵하는 등 서인 가운데 가장 강력하게 남인과 논쟁을 벌였다.(『현종실록』 1년 4월 21일)

영의정정태화(鄭太和)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시왕지제(時王之制)에 따라서 서인의 기년복을 채택하자, 남인은 쫓겨나고 서인이 정권을 잡았다. 이에 아버지 윤비경은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와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역임하였는데, 1665년(현종 6) 어머니 상을 당하면서 벼슬을 그만두고 여묘살이를 하였다. 이때 마침 여막(廬幕)에 불이나자, 윤명운의 어머니 한산 이씨는 남편 윤비경이 움막을 탈출하지 못한 줄 알고 스스로 불속으로 뛰어들어서 죽었고, 나라에서는 한산 이씨의 정문(旌門)을 세우고 표창하였다.(『현종실록』 6년 1월 7일) 이후 아버지 윤비경은 경주부윤(慶州府尹)을 거쳐 회양부사(淮陽府使)를 역임하였으나, 윤명운 형제는 과거 공부를 계속하고 음직(蔭職)에 나아가지 않았다.

1674년(현종 15) 효종의 왕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세상을 떠나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의 복제를 둘러싸고 다시 서인과 남인 사이에 제 2차 예송인 <갑인예송(甲寅禮訟)>이 일어났다. 이때 척신(戚臣) 김석주(金錫冑)가 남인의 대공설(大功說)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남인이 승리하고 서인은 패배하였다. 그러면서 그 해에 숙종이 즉위하자, 진주 유생 곽세건(郭世楗)의 상소로 송시열은 함경도 덕원부(德源府)로 귀양을 갔다. 정권을 잡은 남인들은 송시열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처벌하였으므로, 윤명운과 아버지 윤비경도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송시열의 제자 송상민(宋尙敏)이 예송의 전말을 기록하고 남인의 주장을 비판하는 『논례(論禮)』라는 책자를 만들어서 숙종에게 바치고 스승 송시열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영의정허적(許積)의 탄핵으로 체포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다가 곤장을 맞고 마침내 죽었고, 윤명운은 금오문(金吾門)에 방치된 송상민의 시신을 거두어 몰래 염습하고 땅에 묻어 주었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허적이 몰락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자, 송시열의 특별 추천에 힘입어 윤명운은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러나 얼마 후 아버지 윤비경이 호조 참판이 되었다가 그해 12월 세상을 떠나자, 3년 동안 포천군(抱川郡) 고곡리(古谷里)의 부모님 묘소 아래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그 뒤에 음직으로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모두 네 번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남다른 언행으로 인하여 세 번이나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가 파직당할 때마다 그의 배후에 있던 송시열과 송준길이 다른 벼슬에 추천해 주곤 하였다.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후사를 낳지 못하고, 숙종의 후궁 장숙원(張淑媛)이 왕자를 낳자, 숙종은 이 왕자를 원자로 삼고 장숙원을 희빈(禧嬪)으로 책봉하려고 하였으나,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의 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런 가운데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면서, 서인은 조정에서 쫓겨나고, 다시 남인이 정권을 잡았다. 이때 숙종은 송시열을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가 사약을 내려서 죽이고, 인현왕후를 폐출(廢黜)시킨 후 장희빈(張禧嬪)을 왕비로 삼았다.

당시 윤명운은 여러 문하생들과 함께 대궐 앞에 엎드려 스승 송시열을 구명(求命)하려고 하였으나, 송시열이 결국 사약을 마시고 죽자, 벼슬을 사임하고 스승을 위하여 상복을 입었다. 이때 이조에서 왕명을 받고도 벼슬을 하지 않으려는 서인의 명단을 보고하였다. 그러자 숙종이 특별히 윤명운을 지칭하며 “벼슬하지 않겠다고 사직하였으니, 엄중히 다스려서 일벌백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고, 이에 그는 체포되어 심문을 당한 후 외방(外方)에 종편(從便)하게 되었다.(『숙종실록』 15년 6월 16일) 친구 이대가 일찍이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 충청도 해미(海美)에 있었는데, 윤명운에게 편지를 보내 해미로 오라고 하였으므로, 그는 충청도 해미로 가서 이대의 집에서 5년 동안 머물렀다.

그러다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면서, 장희빈은 왕비에서 쫓겨나고 인현왕후가 다시 왕비가 되었다. 숙종은 송시열의 관작을 다시 회복시켰으며, 그해 4월 경연관(經筵官)의 건의를 받아들여 송시열의 제자 중에서 제일 먼저 윤명운을 서용하여 선릉(宣陵)참봉(參奉)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윤명운은 1699년(숙종 25) 내자시(內資寺)주부(主簿)로 승진하면서, 비로소 참상관(參上官)으로 승륙(陞六)하였다. 그때 윤명운의 나이가 58세였는데, 상당히 늦게 벼슬길에 진출한 셈이었다.

1700년(숙종 26) 그는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를 거쳐 신령현감으로 나갔다가 1705년(숙종 31) 두 번의 임기를 채우고 돌아왔는데, 신령 고을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지을 만큼 지방 수령관으로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당시 그는 기민(饑民)의 구제, 환곡(還穀)의 상환 유예, 농경지 개척과 수리 사업, 관청에 필요한 물품 조달 방법의 개혁, 교활한 아전의 단속과 활용, 각종 빈민 구제사업, 학문과 무술의 장려 등을 실행하여, 다른 현령들의 모범이 되었다.

이후 그는 장례원(掌隷院) 사의(司議)를 거쳐, 강화도경력(江華島經歷)으로 나갔다가 임기를 채우고 돌아왔다. 나이 70이 넘으면 치사(致仕)하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그는 대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장원서(掌苑署)별제(別提)를 거쳐 상의원(尙衣院)첨정(僉正)이 되었다. 또 광흥창 수가 되어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사재시(司宰寺) 첨정을 지냈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던 그는 이렇듯 노령이 되어서도 미관말직을 사양하지 않고 대가족을 부양하다가, 1718년(숙종 44) 노병으로 서울의 본가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77세였다.

<송상민 옥사>와 송시열 학단

1674년(현종 15)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또 다시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의 복제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갑인예송이 일어났다. 제 1차 예송에서 승리한 송시열은 15년 동안 정권을 독차지하며 왕권을 압도하였다. 현종은 이를 싫어하여 척신 김우명(金佑明) 및 김석주와 손을 잡고 남인의 대공설을 지지하였으므로 제 2차 예송에서는 남인이 승리하고 서인은 패배하였다. 그해 8월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이 15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숙종은 진주 유생 곽세건의 상소를 받아들여, 송시열을 함경도 덕원부로 귀양 보냈다. 서인들은 송시열을 구원하려는 상소를 올렸으나, 정권을 잡은 남인들은 송시열을 옹호하는 서인들과 송시열의 제자들을 처벌하였다. 윤명운의 아버지 윤비경도 윤선도를 탄핵한 대간(臺諫)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서인 송시열의 제자 송상민이 제1, 2차 예송의 전말을 기록하고 남인 윤선도의 주장을 비판하는 『논례』라는 책자를 만들어 숙종에게 바치고 스승 송시열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남인 허적의 탄핵을 받고 하옥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다가 마침내 형장(刑杖)을 맞아 죽었는데, 윤명운도 그 책자를 만드는 데 참여하였다. 송상민의 시신은 금오문 앞에 3일 동안 버려져 있다가, 그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본 윤명운이 친구 윤이건(尹以健) 형제와 함께 몰래 거두어 산골짜기에 숨겨두었다가 염습하고 땅에 묻었다.

서인 정권은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때 비로소 탄생하였는데, 북벌을 추진하던 효종은 서인 송시열과 송준길을 등용하였다. 효종이 세상을 떠나고 현종이 즉위한 후, 자의대비의 복제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의 제 1, 2차 예송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서인 송시열은 『의례(儀禮)』의 체이부정설(體而不正說 : 서자는 3년복을 입지 않는다는 주장)을 고집하였으나, 송시열의 제자 가운데 윤증(尹拯) 등 소장파는 남인 윤휴의 ‘차장자설(次長子說 : 장자가 된 차자는 3년복을 입는다는 주장)’에 동조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송시열 학단은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장파와 윤증을 지지하는 신진소장파인 소론으로 나뉘어졌다.

당시 송시열 학단에는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 부자의 제자였던 민유중(閔維重)·민정중(閔鼎重) 형제도 참여하고 있었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민유중의 딸을 숙종의 계비로 강력히 추천하였고, 1681년(숙종 7) 마침내 인현왕후가 책봉되었다. 그러나 인현왕후는 후사를 낳지 못하고, 후궁인 장숙원이 왕자를 낳았다. 숙종이 장숙원 소생의 왕자를 원자로 삼고 장씨를 희빈으로 책봉하였는데,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은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그러나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서인은 조정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며, 당시 29세였던 숙종은 송시열을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가 사약을 내려 죽이고, 인현왕후를 폐출시킨 후 장희빈을 왕비로 삼았다. 이때 정권을 잡은 남인의 권대운(權大運)과 목래선(睦來善) 등은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서 축출하였다.

한편 남인들이 송시열을 모함하고 죄를 뒤집어 씌워 죽이려고 하자, 윤명운은 “지금이 어찌 벼슬할 때인가”라고 탄식하면서 급히 직장(直長)의 관직을 사직하고, 곧바로 동문(同門)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 스승 송시열을 변호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송시열에 대한 노여움이 풀리지 않았으므로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그를 다시 심문하려고 서울로 압송하던 도중 전라도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시켰다. 송시열의 문인 권상하(權尙夏) 등은 송시열을 곁에서 모시고 그 죽음을 지켜보았고, 윤명운은 여러 문하생들과 함께 대궐 앞에 엎드려 스승 송시열을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이것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성균관 유생 1천여 명이 중종에게 조광조(趙光祖)를 살려달라고 복합하던 고사(故事)에 따른 것이었다. 송시열이 사약을 마시고 죽자, 윤명운은 삼베로 만든 상복에 흰 띠를 매고 스승을 위하여 상례(喪禮)를 다하였다.

이때 숙종은 이조에 명하여 벼슬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조사하여 그 명단을 보고하도록 하였는데, 숙종이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일찍이 전부터 벼슬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비록 하나하나 추론할 수는 없으나, 윤명운으로 말하면 벼슬하지 않겠다고 사직하고, 그 다음날 곧바로 이기주(李箕疇)의 상소에 참여하였으니, 벼슬하지 않으려는 그의 뜻이 드러났다. 조정을 멸시하는 죄를 엄중히 다스려서 일벌백계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며 특별히 그를 거론하였다. 이에 의금부에서는 윤명운 등을 체포하여 혹독하게 문초하고, 외방에 종편하도록 하였다.

외방 종편은 본인이 귀양 갈 곳을 결정하는 것이었으나, 의금부 판사(判事)민암(閔黯)이 “임금의 노여움이 심하기 때문에 경기 지방으로는 귀양 갈 수 없다”고 위협하였다. 윤명운은 본래 집안이 외롭고 또 가난하여 외방에 전장(田莊)이 없었으므로 의탁할 곳이 없었다. 마침 친구인 이대가 일찍이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 충청도 해미의 시골집에 돌아가 있었는데, 윤명운에게 편지를 보내 “나에게 와서 머무르는 것이 친구간의 의리다” 하였으므로, 그는 충청도 해미로 귀양 가서 이대의 집에 의탁하여 숙식을 해결하였다. 5년 동안 윤명운과 이대는 한 집에 함께 살면서 세상일을 개탄하고 술잔을 기울이면서 시름을 달랬다. 송시열 학단에는 남쪽 지방 사람이 많았는데, 기사환국 이후 거의 모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윤명운은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에 사는 서너 명의 뜻 맞는 친구들과 가끔 어울려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아가 자연과 인생을 노래하였으며, 가야산에 들어가 단구(丹丘)에 올라가거나 혹은 며칠씩 머물면서 그대로 종신(終身)하려고 생각하였다.

신녕현감 윤명운의 선정을 기리는 생사당과 송덕비

1700년(숙종 26) 윤명운이 경상도신녕현감으로 부임하였는데, 마침 고을이 큰 흉년을 당하고 전염병이 돌아서 마치 병란(兵亂)을 겪은 뒤처럼 인적이 드물어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마치 사람이 큰 병을 앓고 난 뒤와 같으니, 오직 백성들의 힘을 편안하게 길러주어야 소생할 수 있다” 하고, 정무를 간략하게 시행하고, 민생을 안정시켜 백성들의 소요가 없도록 하였다. 또한 “백성들은 진실로 친자식과 같은데, 교활한 아전들도 같은 사람이니, 수령관이 위엄과 밝은 지혜를 가지고 그들을 단속한다면, 백성들을 해치는 데 이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예전처럼 백성들을 학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한수재집(寒水齋集)』 권26 「광흥수윤공명운묘갈명(廣興守尹公明運墓碣銘)」 이하 「윤명운묘갈명」으로 약칭]

현감윤명운은 ‘정당한 부세(賦稅)를 감면하여 수령의 명예를 구하는 것도 옳지 않지만, 백성들의 원성을 많이 사고 있는 제도를 개혁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큰 흉년을 만난 뒤, 신녕 백성들 가운데에는 환곡을 갚지 못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그는 이것을 가까운 이웃 친족들에게 강제로 추징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자기 녹봉을 털어 갚지 못한 환곡 수백 석을 대신 보충하고, 환곡 문서를 가져다가 불태워버렸다.[「윤명운묘갈명」]

설날에는 쌀과 고기를 가져다 경내의 노인들에게 하사하였으며, 화창한 봄날에는 남녀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극진히 대접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혼인할 수 없는 고을 백성들은 현감이 직접 방문하여 혼수를 도와주어 처녀와 총각이 때를 놓치지 않고 혼인하게끔 하였다. 고을의 선비들과 무사들에게 각기 생업에 종사하면서 학업과 무예를 열심히 닦도록 격려하고, 월말이면 시험을 봐서 등급을 매겨 우수한 자에게는 상을 주어 그들의 학업과 무예를 권장하였다. 가물고 황폐하여 경작하지 못하고 버려져 있던 고을의 땅에는 제방을 쌓고 못을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를 지어 그 이익을 누리게 하였다.[「윤명운묘갈명」]

관청에서는 아전들에게 고을에 소용되는 여러 가지 물품을 교역해서 바치게 하였다. 그러나 아전들에게 그 물품 값의 절반도 주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이에 현감윤명운은 “현(縣)에서는 아전들에게 억지로 징수하는데 아전들이 백성들로 부터 취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디에서 물건이 나오겠는가. 이러한 폐단을 고치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끝내 곤란을 겪을 것이다”고 개탄하였다. 이에 그는 재목을 모아 물품을 보관할 청사(廳舍)를 짓고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미리 준비하도록 하여 예전의 잘못된 규정들을 혁파해버리자, 아전들과 백성들이 모두 그를 칭송하였다.

신녕현감윤명운의 이웃 고을로 벼슬살이 하러 나가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 네가 윤명운을 찾아가서 매사를 그와 상의하면 자연히 잘못이 적어질 것이다” 하였다. 이 사실로 미루어 윤명운이 평소 사람들에게 유능한 수령관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윤명운묘갈명」]

1705년(숙종 31) 윤명운이 1700년 8월부터 1705년 2월까지 4년 6개월 동안 신녕현감으로서 두 번의 임기를 채우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자, 고을 백성들이 노소를 가리지 않고 멀리까지 전송하며 “훌륭한 태수(太守)가 떠나간다” 하고, 모두 한숨을 쉬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가 떠난 후, 고을 백성들은 생사당을 세우고 ‘상덕사(尙德祠)’라고 불렀는데, 그의 생일날 아침에 아전과 백성들이 모두 사당의 뜰에 모여서 쇠고기와 술을 영정에 올렸다. 1707년(숙종 33) 조정에서 고을 수령관의 생사당을 세우지 못하도록 금지하자, 1713년(숙종 39) 12월 상덕사를 허물어버리고, 그 마당에 ‘타루각(墮淚閣)’이라는 작은 비각(碑閣)을 지은 후 그 안에 공적을 찬양하는 ‘영세(永世) 불망비(不忘碑)’를 세웠다. ‘영세 불망비’의 글은 ‘화산(花山)이 높디높고 장수(長水)가 길디길다고 하는데[花山崒崒長水泱泱], 우리 원님의 덕이 화산처럼 높고 장수처럼 길도다[我侯之德山高水長]’라 새겨 그의 은덕을 칭송하였다.

한편 노론(老論) 인사들은 신녕현감윤명운이 이룩한 훌륭한 업적을 자세히 기록하여 만세(萬世)에 전하기 위하여, 생사당을 세운 지 38년이 지난 뒤인 1742년(영조 18) ‘만세 불망비’를 다시 세우고 비음기(碑陰記)를 기록하여, 그 업적을 후세에 길이 전하였다. 비음기는 그해 6월에 노론의 중진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민우수(閔遇洙)가 760여 자의 글을 지었고, 참찬(參贊)김진상(金鎭商)이 글씨를 썼다. 민우수는 영의정민유중의 손자이고 인현왕후의 조카이므로, 정통 노론 집안 출신이었다. 김진상은 영의정김익훈(金益勳)의 손자인데, 사헌부 대사헌으로 있을 때 강경한 노론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만세 불망비’의 글씨는 당대의 명필가로서 유명한 김진상이 예서로써 정교하게 쓴 작품의 하나이다. 아마도 이 비는 노론의 젊은 인사가 신녕현감에 임명되어 고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중앙의 노론의 중진들에게 글과 글씨를 부탁하여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민우수는 권상하의 제자였으므로, ‘만세 불망비’의 비음기를 지을 때 권상하가 지은 윤명운의 「묘갈명(墓碣銘)」을 참고하였을 뿐만 아니라, 스승의 글을 그대로 옮긴 부문이 많지만, 「묘갈명」에서 이해하기 힘든 문장을 보충한 부문도 있고, 또 「묘갈명」에서 빠진 내용을 보충한 부문이 많다. 그리고 1742년(영조 18) 9월 1일에 ‘만세 불망비’를 다시 세워서 고을의 다른 송덕비와 같이 세웠는데, 옛날 생사당 상덕사 자리에 세운 타루각 밖에 ‘영세 불망비’를 ‘만세 불망비’로 고쳐 세운 사실을 고지하기 위하여 다시 불망비를 하나 더 세웠던 것이다.

성품과 일화

윤명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품성이 온화하고 순수하며, 마음가짐이 편안하고 조용하였으며, 행동 양식이 간소하고 근신(勤愼)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을 대할 때에 말수가 적었고, 일을 할 때에는 계교(計較)가 적었으며, 쓸데없이 자랑하는 부랑(浮浪)한 습관이나 성질을 내는 잔학한 모습이 전혀 없었다. 태도와 행실은 그렇게 각고(刻苦)하게 하지 않았으나, 편안히 있을 때에도 태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막역한 친구 사이에도 농담을 하지 않았다. 집이 가난하여 여러 번 끼니가 떨어졌으나, 구걸하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고, 벼슬길이 매우 험난하였으나 마음에 원망하는 생각을 조금도 품지 않았다. 그가 가정에 있을 때와 벼슬에 있을 때에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가 특이하다고 여기지 않았다가,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느끼고 성심으로 기뻐하여 복종하였다.

윤명운은 동생 윤명원(尹明遠)과 형 윤명우의 아들인 큰조카 윤봉의(尹鳳儀)와 더불어 평생토록 함께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는데, 추위와 더위, 굶주림과 배고픔, 근심과 기쁨을 조금도 피차의 차이가 없이 함께 하였다. 또한 질병이 있으면 반드시 서로 돌보았고 조그마한 물건이라도 얻으면 반드시 나누어 주었으며, 서로 흡족해 하는 즐거움을 늙을 때까지도 더욱 돈독하게 누렸으므로, 사람들이 아무도 그들을 흠잡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화목하고 순수한 인정이 온 집안에 넘쳐서, 부인들까지도 동복 자매처럼 서로 사랑하고 아꼈으며, 노비들까지도 친척처럼 서로 화락하였으므로, 집안에서 시끄럽게 다투는 말이 바깥에 들리지 않았다.[「윤명운묘갈명」]

그러나 윤명운이 한탄하기를, “내 나이가 늙었는데도 벼슬을 그만두지 못하고 아직도 낮은 관리의 자리에 얽매여 있는 것은, 집안이 가난하여 녹봉으로 몇 말의 쌀이라도 받기 위해서이다. 백수(白首)의 나이에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이 어찌 나의 뜻이겠는가” 하였다. 1718년(숙종 44) 그가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무렵에 그의 넷째아들 윤봉구(尹鳳九)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고을의 원님 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는 병중이었으나 얼굴에 희색이 가득하여 좋아하기를, “내가 이제 벼슬에서 물러나 편안히 쉴 수 있게 되었다” 하였다. 그 뒤에 며칠 지나지 않아 그가 세상을 떠났는데, 평소에 대가족 집안을 부양하는 막중한 책임감 때문에 그가 힘들게 벼슬살이를 하였다는 것을 이 사실로 미루어 알 수 있다.[「윤명운묘갈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교하(交河) 동쪽 지석촌(支石村)에 있는데, 권상하가 지은 묘갈명이 남아있다.[「윤명운묘갈명」] 경상도 영천(永川) 신녕의 구천서원(龜泉書院)에 제향되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권4]

첫째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사헌부 지평(持平)이시함(李時馠)의 딸인데 1남을 낳았고, 둘째 부인 화순 최씨(和順崔氏)는 학생(學生) 최이헌(崔爾巘)의 딸인데 2남을 낳았으며, 셋째 부인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이경창(李慶昌)의 딸인데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윤봉휘는 직장을 지냈고, 차남 윤봉위(尹鳳威)은 진사(進士)로서 참봉을 지냈으며, 3남 윤봉기(尹鳳蘷)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4남 윤봉구는 유일(遺逸)로서 천거되어 공조 판서(判書)를 지냈고, 5남 윤봉오(尹鳳五)는 문과에 급제하여 돈녕부(敦寧府) 판사를 지냈으며, 딸은 신경(申暻)에게 시집갔다.[「윤명운묘갈명」]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송자대전(宋子大全)』
  • 『한수재집(寒水齋集)』
  • 『정암집(貞庵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명곡집(明谷集)』
  • 『병계집(屛溪集)』
  • 『퇴어당유고(退漁堂遺稿)』
  • 『포암집(圃巖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