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육사(三十六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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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대에 기존 불교 종파들을 선교양종으로 통합하면서 공인한 사찰.

개설

1424년(세종 6)에 세종은 불교의 여러 종파를 선교양종으로 통합하고, 선종과 교종에 각각 도회소(都會所)를 두어 승과(僧科)의 시행과 승려 인사 등을 관할하게 하였다. 이는 이후 『경국대전』을 통해 법제화되었다. 당시 선종과 교종에 각각 18개씩 모두 36개의 사찰이 공인되었으며, 사찰별로 전지와 소속 승려의 수가 정해졌다. 이후 연산군대에 이르러 양종의 도회소가 서울 밖으로 이전되고 승과가 중단되었으며, 중종대에는 『경국대전』의 불교 관련 항목이 삭제되고 양종 체제가 혁파되었다. 그 뒤 명종대에 선교양종이 일시적으로 재건되고 도승법과 승과가 다시 시행되면서 불교계의 인적 계승이 가능해졌지만, 이후 19세기까지 국가에 의해 종파가 공인되지는 않았다.

내용 및 특징

세종대인 1424년에는 앞서 1406년(태종 6)에 11개에서 7개로 축소, 공인된 기존의 종파, 즉 조계종(曹溪宗)·천태종(天台宗)·화엄종(華嚴宗)·자은종(慈恩宗)·중신종(中神宗)·총남종(摠南宗)·시흥종(始興宗)을 다시 선종과 교종의 양종으로 통폐합하였다. 이때 조계종·천태종·총남종은 선종으로, 화엄종·자은종·중신종·시흥종은 교종으로 통합되었다. 이와 함께 승려의 인사와 교단 관리 등을 담당하던 관청인 승록사(僧錄司)를 폐지하고, 대신 선종과 교종의 도회소를 서울흥천사(興天寺)흥덕사(興德寺)에 각각 설치하였으며 법랍과 덕행이 높은 승려를 양종 행수장무(行首掌務)로 삼게 하였다.

선교양종으로의 통폐합 명분은 많은 종파가 난립하여 선과 교의 근원에서 멀어졌고 서울과 지방의 각 종에 소속된 절들이 지나치게 많지만 승려가 살지 않고 퇴락한 절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이에 서울과 지방 각지에서 승려들이 살 만한 36개의 사찰을 선정해 양종에 나누어 소속시키고 토지를 넉넉히 급여하고 거주 승려의 수를 정해서 불도(佛道)를 닦는 데 전념하게 한다고 이유를 밝히고 있다. 당시 선종과 교종에 각각 18개씩, 총 36개의 사찰이 국가로부터 공인을 받았고 이들 사찰의 승려 수는 선종 1,950명, 교종 1,800명으로 총 3,750명이 허용되었다. 또한 36개 사찰에 소속된 사전(寺田)은 선종 4,250결, 교종 3,700결, 합쳐서 7,950결이 인정되었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36개 사찰별로 인정된 전지의 결수와 거주 승려 수는 다음과 같은데, 이는 평균적으로 토지 2결에 승려 1명이 배정된 것이었다.

먼저 선종 18개 사찰을 살펴보면, 선종도회소인 서울 흥천사는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전지인 원속전(元屬田) 160결에 90결이 추가로 지급되어 250결이 되었고 거주하는 항거승(恒居僧)은 120명이 허용되었다. 왕실과 관련이 깊은 경기도 소재 사찰의 경우는 개성의 숭효사(崇孝寺)가 원속전 100결에 100결이 더해져 200결이 되었고 거주승은 100명, 연복사(演福寺)도 원속전 100결에 100결이 추가되어 200결을 보유하게 되었고 거주 승려는 100명이 인정되었으며, 수륙재(水陸齋)로 유명한 개성 관음굴(觀音堀)은 원속전 45결에 105결과 수륙위전(水陸位田) 100결이 더해져 250결이 되었으며 항거승은 70명이었다. 양주승가사(僧伽寺)는 60결에 90결이 더해진 150결에 허용 승려는 70명이었고, 개경사(開慶寺)는 전지 400결, 항거승 200명이 용인되었으며, 나옹혜근(懶翁惠勤)과 무학자초(無學自超) 등이 주석한 회암사(檜巖寺)는 당시의 사격을 반영하여 원속전 500결, 거주승 250명이 인정되었다. 이어 왕실의 수륙재 거행 사찰이었던 진관사(津寬寺)는 원속전 60결에 90결과 수륙위전 100결이 추가되어 250결, 거주승은 70명이 되었고, 고양 대자암(大慈菴)은 원속전 약 153결에 97결이 더해져 250결이 충당되었으며 거주승은 120명으로 정해졌다.

충청도 공주 계룡사(鷄龍寺)는 원속전 100결에 50결이 추가되어 150결이 되었고 거주 승려는 70명이 되었다. 경상도의 경우 진주단속사(斷俗寺)는 100결에 100결이 더해져 200결이 되었고 거주승은 100명, 경주 기림사(祗林寺)는 100결에 50결이 추가된 150결이 되었고 거주승은 70명으로 한정되었다. 전라도는 구례화엄사(華嚴寺)에 100결에 50결이 더해진 150결이 용인되었고 거주승은 70명이 인정되었으며, 태인흥룡사(興龍寺)는 80결에 70결이 더해져 150결이 되고 승려는 70명이 되었다. 강원도는 고성유점사(楡岾寺)의 경우 원속전 205결에 95결이 더해져 300결이 허용되었고 거승은 150명, 원주각림사(覺林寺)는 전지 300결에 거승 150명으로 정해졌다. 황해도는 은율정곡사(亭谷寺)가 공인되면서 60결에 90결이 지급되어 150결이 되었고 승려는 70명으로 한정되었으며, 함경도는 조선 태조와 깊은 관련이 있는 안변석왕사(釋王寺)가 공인 사찰로 정해지면서 200결에 50결이 더해져 250결이 되었으며 거주 승려는 120명이 허용되었다.

교종 18사의 전지와 승려 수는 다음과 같다.

교종도회소인 서울 흥덕사는 원속전 250결, 거주승 120명으로 정해졌으며 개성광명사(廣明寺)는 100결에 100결이 더해진 200결의 전지가 용인되고 승려는 100명이 허용되었다. 경기도의 경우 신암사(神巖寺)는 60결에 90결이 추가된 150결이 되었고 거주승은 70명, 개성의 감로사(甘露寺)는 40결에 160결이 더해져 200결이 되고 거승은 100명이었다. 해풍연경사(衍慶寺)는 원속전 300결에 100결이 더해져 400결을 가지게 되었고 그에 맞게 거승도 200명이 인정되었다. 송림영통사(靈通寺)는 전지 200결, 거주승 100명이었으며, 양주장의사(藏義寺)는 200결에 50결이 더해져 250결이 되고 승려는 120명, 소요사(逍遙寺)는 전지 150결, 거주승 70명으로 정해졌다.

충청도의 경우 보은 속리사(俗離寺)는 원속전 60결에 140결이 추가되어 200결이 되고 거주승은 100명이 되었으며, 충주보련사(寶蓮寺)는 80결에 70결이 더해진 150결과 승려 70명이 인정되었다. 경상도는 거제 견암사(見巖寺)에 50결에서 100결이 더해진 150결이 허용되었고 승려는 70명이 거주하게 되었으며, 합천해인사(海印寺)는 80결에 120결이 더해져 200결이 되면서 거주승도 100명이 되었다. 전라도 창평 서봉사(瑞峯寺)는 60결에 90결이 더해져 150결이 되었고 거주승은 70명, 전주경복사(景福寺)는 100결에 50결이 추가된 200결의 전지와 항거승 70명으로 정해졌다. 강원도 회양의 표훈사(表訓寺)는 210결에 90결을 합친 300결이 허용되고 거주승은 150명이 되었다. 황해도 문화 월정사(月精寺)는 100결에 100결이 추가된 200결의 토지와 거주승 100명이 분속되었고, 해주 신광사(神光寺)는 200결에 50결이 더해진 250결에 승려 120명이 배정되었다. 평안도는 평양영명사(永明寺)가 교종의 공인 사찰이 되었는데 100결에 50결이 더해져 150결이 되었고 거주승려는 70명이었다.

변천

세종대에 공인된 선교양종의 36개 사찰은 대부분 지방 군현이 아니라 도 단위 이상에서 지정되었고, 그중 20개 이상이 왕실과 관련이 있는 사찰로서 지속적인 보호와 후원을 받았다. 다만 기존의 36개 공인 사찰 중 일부는 중요성이 부각된 다른 사찰로 교체되었는데, 선교양종이 세워지고 6개월 후인 10월에 경기도 개풍의 흥교사(興敎寺)와 전라도 순천송광사(松廣寺)를 선종 사찰로 새로 지정하였다. 흥교사와 송광사는 각각 정종의 능침사(陵寢寺)와 수륙사(水陸社)로서 그 중요성이 부각되어 기존의 화엄사와 정곡사를 대체하여 선종의 공인 사찰에 들어간 것이다(『세종실록』 6년 10월 25일). 앞서 화장사(華藏寺)를 혁파하면서 정종이 하사한 전지 200결을 이속하는 등 흥교사에는 총 250결의 토지가 지급되었고(『세종실록』 6년 9월 8일), 송광사에는 전지 130결이 허용되었다.

또한 다음 해인 1425년 5월에는 산수가 좋은 곳이 아니라는 이유로 기존 선종과 교종의 공인 사찰 1개씩을 제외하고 새로 2개 사찰을 지정하여 전지를 지급하였다(『세종실록』 7년 5월 12일). 선종에서는 태인의 흥룡사 대신 강원도 회양금강산에 위치한 장안사(長安寺)를 새로 지정하였고 기존에 허용된 흥룡사의 전지 150결을 장안사로 이속시켰다. 또한 장안사가 원래부터 규모가 큰 절이므로 이것으로는 부족하다고 하여 선종 소속 사찰 중 비교적 중요도가 떨어지는 사찰의 전지를 감해서 추가로 150결을 지급하게 하여 장안사에는 총 300결의 전지가 속하게 되었다. 교종에서는 창평 서봉사를 대신하여 금강산의 정양사(正陽寺)로 대체하면서 서봉사의 전지 150결을 장안사로 이속하였다. 새로 지정된 이들 사찰은 모두 능침사, 수륙사, 원찰(願刹) 등으로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었고 공인 36사 중 선종 3개, 교종 1개의 사찰이 바뀐 것이었다.

이후 성종대에 『경국대전』이 반포되면서 선교양종과 도승(度僧), 승과 등의 규정이 법제화되었지만, 1472년(성종 3) 승려 자격증인 도첩의 신규 발급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고 연산군대에는 양종 도회소가 경기도 광주의 청계사(淸溪寺)로 이전되고 승과가 중단되는 등 억불 정책의 기조가 유지되었다. 이어 중종 전반기에는 기묘사림이 공론을 주도하면서 기신재가 혁파되고 1512년(중종 7)에는 선교양종 및 양종 도회소가 폐지되었다. 또한 1516년 『경국대전』의 불교 관련 조항이 사문화되면서 명종대의 일시적인 양종 복립기를 제외하면 이후 법제적 폐불 상황이 지속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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