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가사(僧伽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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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 국가에서 공인한 36사(寺) 가운데 하나로, 서울북한산에 위치한 절.

개설

서울특별시 종로구 비봉4길 북한산에 위치해 있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으며, 이미 신라시대부터 국가적으로 그 영험함에 주목하여 정기적으로 재를 올리던 곳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왕실에서 중시한 사찰이며, 굴에 봉안된 승가대사상에 대한 신앙과 약사신앙으로 이름이 높았다. 세종대 선종 18사 중 하나로 공인되었으며, 정조대에는 청에서 선물한 옥불(玉佛)을 봉안하였다.

연원 및 특징

승가사의 연원은 고려시대 이예(李預)가 인용한 최치원 문집에서 처음 확인된다. 이에 의하면 신라 때 삼각산에 있었던 낭적사(狼迹寺)의 승려 수태(秀台)가 승가 대사의 행적을 듣고는 삼각산(三角山) 남쪽에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승가 대사의 모습을 조각했는데, 국가에 물난리나 가뭄 등의 천재지변이 있을 때 기도하면 그 자리에서 응답이 있어 봄·가을로 3일씩 재를 지내고 연말에는 임금이 옷을 바치는 것을 상례로 했다고 한다.

승가 대사에 대한 숭배는 고려시대에도 계속되어 1024년(현종 15) 승가대사상의 광배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특히 선종~예종에 이르는 시기 고려 왕실은 승가굴의 중수를 후원하며 여러 차례 왕이 행차하는 등 이 곳을 중시하고 있어 주목된다. 1106년(고려 예종 1) 이예가 찬술한 「삼각산중수승가굴기(三角山重修僧伽崛記)」에 의하면 고려의 역대 왕들이 직접 승가굴에 와서 예를 올렸다고 한다. 특히 고려중기 왕의 행차가 빈번하였는데, 1090년(고려 선종 7) 승가굴에 행차한 선종이 절이 퇴락한 것을 보고 개성송악산의 귀산사(龜山寺) 주지 선사(禪師)영현(領賢)에게 절을 수리할 것을 명하였고, 1099년(고려 숙종 4) 숙종이 왕비와 태자, 우세(祐世) 승통(僧統) 의천(義天), 여러 관료들을 거느리고 행차하여 많은 시주를 하기도 하였다. 한편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든 데서 연원한 관계로 고려시대까지는 승가굴(僧伽崛)로 불렸으나, 조선 건국 이전 어느 시기엔가 승가사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변천

(1) 조선전기

조선전기 승가사는 왕실의 구병을 비는 약사신앙(藥師信仰) 도량이자 왕의 탄신축수재(誕辰祝壽齋)를 주로 설행하는 사찰로 자리잡았다. 특히 조선초기에는 왕실에서 약사신앙과 수륙재가 성행했는데, 승가사는 이 시기 왕실의 약사정근 설행의 중심 사찰 중 하나였다.

1422년(세종 4) 5월 태종의 병이 위독해지자 세종은 곡산부원군(谷山府院君)연사종(延嗣宗)을 승가사로 보내어 태종의 쾌차를 기원하는 약사정근을 개설하였고(『세종실록』 4년 5월 4일), 왕비가 병에 걸리자 1422년(세종 4) 8월 찬성사(贊成事)맹사성(孟思誠)을 승가사에 보내 재를 올리도록 하였다(『세종실록』 4년 8월 8일). 또한 1423년(세종 5) 4월에는 태종의 원종공신들이 승가사에서 세종의 장수를 기원하는 축수재를 설행하고자 청하였으나 세종이 축수재 설행을 허가하지 않았다(『세종실록』 5년 4월 10일). 이처럼 조선초 왕실의 평안을 기원하는 사찰로서 승가사가 가지고 있던 위상은 세종대 선·교 양종으로 교단을 정리하고 36개의 사원만을 공인할 때 승가사가 공인 사찰로 존속할 수 있게 한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즉 1424년(세종 6) 4월 세종이 선·교 양종을 36사로 공인·정리할 때 승가사는 선종 사찰로 공인되었다. 당시 원래 사원이 가지고 있던 전지 60결에 추가로 90결을 더 주어 도합 150결의 전지를 공인하였고, 승려는 70명이 거주할 수 있도록 하였다(『세종실록』 6년 5월 5일). 1443년(세종 25) 7월 가뭄이 심하자 승가사에서 국가 차원의 기우제를 지냈는데(『세종실록』 25년 7월 6일), 왕실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는 불사를 설행하는 사찰로 왕실에서 승가사를 주목하면서 이러한 불사를 기회로 하여 종친(宗親)의 가비(家婢)가 연등(燃燈)이나 원장(願狀)을 핑계로 승가사에 자주 왕래하는 것을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30년 7월 21일). 국왕 축수도량으로서의 승가사의 기능은 세조대에도 계속되어 1455년(세조 1) 9월에는 충훈부(忠勳府)에서 탄신축수재를 설행하였다(『세조실록』 1년 9월 23일). 조선전기 고승인 함허득통(涵虛得通)이 수도하기도 했다.

(2) 조선후기

승가사는 도성 밖 10리 이내의 가까운 곳에 위치한(『광해군일기(중초본)』 7년 2월 25일) 오랜 역사를 가진 사찰이면서, 고려시대 역대 국왕들이 직접 행차하여 재를 올린 곳이다. 또한 고려시대부터 승가사의 승가대사상은 원하는 바를 들어주는 영험함으로 유명하였다. 승가사의 이러한 점이 조선초 왕실의 관심을 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도성에 가까운 곳이라는 입지로 사대부들이 독서하는 사찰로 이용되기도 하여 허목(許穆)이 젊은 시절 승가사에 머물며 독서하기도 하였다. 한편 양란을 거치면서 도성 방어를 위해 북한산성이 중시되자 승가사도 이에 관련되어 총융청(摠戎廳)에서 관리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국역(國役)에 동원되기도 해서 1786년(정조 10)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묘인 효창묘(孝昌墓) 조성을 위한 묘소도감(墓所都監)이 만들어지자 5월에 승가사 승려 42명이 부역하기도 했다. 승가사는 팔도도승통(八道都僧統)을 역임한 성월(城月)이 주석하기도 하는 등 조선후기에도 유지되기는 했으나 사세는 많이 기울었던 것으로 보인다.

1784년(정조 8) 11월 청나라에서 사신편에 보낸 선물 중 옥불(玉佛)이 있었다(『정조실록』 8년 11월 20일). 세자궁(世子宮) 선물로 보낸 이 장수옥불(長壽玉佛) 봉안처를 놓고 조정에서 논란이 있었고, 이에 봉안 사찰로 승가사가 지목되었다. 그러나 당시 승가사는 기와가 헐리고 벽이 넘어진 상태로 5~6명의 승려만이 거주하고 있을 정도로 퇴락하여, 옥불을 봉안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찰을 중수하게 되었다. 고종 때에는 명성황후(明成皇后)와 상궁 엄(嚴)씨의 시주로 중건하였다.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던 절을 1957년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동문선(東文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기언(記言)』
  • 『일성록(日省錄)』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이정, 『한국불교사찰사전』, 불교시대사, 1991.
  • 남동신, 「북한산 승가대사상과 승가신앙」, 『서울학연구』1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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