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海印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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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장경이 봉안된 법보사찰로, 경상남도 합천가야산에 위치한 절.

개설

해인사(海印寺)는 경상남도 합천가야산(伽倻山)에 위치한 사찰로 고려 재조대장경이 봉안된 법보사찰로 유명하다.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초에 창건되었고, 고려후기 대몽항쟁기에 조성된 팔만대장경판이 봉안되어 있다. 조선 세종대 선·교 양종의 교종 18사에 포함되었으며 15세기에 중건된 장경각(藏經閣)과 그 안에 안치된 대장경판이 현재까지 온전히 유지되고 있다.

연원

해인사는 통일신라후기인 애장왕대에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창건하였다. 순응은 의상(義湘)의 문도인 신림(神琳)의 제자로서 중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가야산에 터를 잡고 왕실의 지원을 받아 절을 착공하였고 이정이 완성하였다. 해인사의 명칭은 『화엄경(華嚴經)』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유래한 것으로 화엄사상과 관련이 있으며 의상 계통의 화엄 10찰 중 하나로 꼽힌다. 후삼국 시대에는 화엄 학승 희랑(希郞)이 주석하면서 고려 태조를 지지하였고 이에 고려 개국 후 전지 500결을 지급하고 국찰로 삼았다.

조선초인 1398년(태조 7) 강화도에 있던 고려대장경을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다음해 다시 해인사로 이안하였다. 세조대와 성종대에 장경각을 중건하였는데 이후 잦은 화재로 사우의 소실과 중건이 거듭되었지만 장경각과 대장경판은 화마에 손상되지 않았다.

변천

태조대에는 고려대장경판을 해인사에 이안하였고 해인사의 전지에 대한 조세 징수를 면제하고, 절의 수조지(收租地)로서 인정하였다(『태조실록』 7년 1월 26일). 태종대에는 해인사의 대장경을 인출(印出)하여 태조가 창건한 개경사(開慶寺)에 봉안하였고 이에 참여한 승려 200명에게 급료를 지급하였다(『태종실록』 13년 3월 11일).

1424년(세종 6) 세종은 기존의 7개 종단을 선·교 양종으로 나누고 각각 18개씩 36개 사찰만 공인하였는데, 이때 해인사는 교종 18사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해인사는 원래 보유하던 토지 80결에 120결이 추가로 지급되어 200결이 되었으며 거주하는 승려는 100명으로 정해졌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세종실록』「지리지」의 합천군 항목에서는 해인사가 가야산 남쪽에 있으며 교종에 속하고 전지 200결이 지급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세조대에는 해인사의 고려대장경 50벌을 인행하였고 그 중 3벌은 서울 흥천사에 봉안되었다(『세조실록』 3년 6월 26일) (『세조실록』 4년 7월 27일). 성종대에는 학조(學祖)로 하여금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뜻을 이어 해인사를 중수하도록 하였다(『성종실록』 18년 11월 8일). 이때 왕실 장례에 쓰이는 면포 3,000필을 중수 공사를 위해 지급하게 하자 비판 여론이 일었고 결국 면포 지급을 중단하였다(『성종실록』 19년 2월 12일) (『성종실록』 19년 2월 22일).

해인사는 조선후기에도 사세를 유지하였고 19세기까지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동문선(東文選)』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여말선초 대불교시책』, 일조각, 1993.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 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