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松廣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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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순천시에 위치한 승보사찰로, 세종대 국가에서 공인한 36사(寺) 가운데 선종에 속한 절.

개설

송광사(松廣寺)는 전라남도 순천시조계산(曹溪山)에 있는 사찰로, 고려후기 보조지눌(普照知訥) 이후 16국사를 배출해 승보(僧寶) 사찰로 일컬어져 왔다. 세종대 선·교 양종의 선종 18개 사찰에 포함되었고 조선후기에는 부휴계(浮休系)의 본산으로서 높은 사격을 유지하였고 현재까지도 지눌의 유풍을 선양하고 있다.

연원

신라말에 길상사(吉祥寺)로 시작한 절로 현재의 송광사는 고려후기인 1200년(고려 신종 3) 보조 국사지눌이 정혜사(定慧社)를 옮겨와 주석하면서 거대 도량이 되었다. 고려 희종이 왕명으로 송광산(松廣山) 길상사를 조계산 수선사(修禪社)로 개칭하였고 지눌의 제자이자 수선사 2세 사주인 진각혜심(眞覺慧諶) 이후 더욱 번성하여 지눌 이후 16국사를 배출하였다. 조선초에 16세 사주인 고봉법장(高峰法藏)이 정종의 명에 의해 황폐해진 절의 중창을 시작하였고, 1420년(세종 2) 중인(中印)에 의해 완공되었다.

변천

조선 태조대에 흥천사(興天寺) 감주(監主) 상총(尙聰)이 올린 상소에서는, 서울과 지방의 명찰들을 송광사의 제도를 본받아 모두 본사의 소속으로 삼아 규찰하게 할 것과 송광사 조사 보조지눌의 유제를 법으로 삼아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태조실록』 7년 5월 13일).

1424년(세종 6) 세종은 기존의 7개 종단을 선·교 양종으로 나누고 각각 18개씩 36개 사찰만 공인하였다.

이때 송광사는 선·교 양종의 36개 사찰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그로부터 2년 후 정종이 수륙사(水陸社)로서 중창한 중요한 절임을 내세워 선종에 들어간 기존의 구례화엄사(華嚴寺)와 은율정곡사(亭谷寺)를 혁파하고 대신 송광사와 개성흥교사(興敎寺)를 넣었다(『세종실록』 6년 10월 25일).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여 『세종실록』「지리지」 순천조에는 송광사가 선종에 속하고 전지 130결이 지급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앞서 선·교 양종 36개 사찰을 공인할 때 선종의 화엄사에는 원래 보유한 전지 100결에 50결이 추가되었고 거주 승려는 70명으로 지정되었다. 이들을 대신해 송광사와 함께 선종 18사에 새로 포함된 흥교사는 정종의 능인 후릉(厚陵)재궁(齋宮)으로서 전지 250결이 주어졌다.

송광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609년(광해군 1) 주지 응선(應善) 등 송광사 측의 요청에 의해 부휴선수(浮休善修)가 벽암각성(碧巖覺性)을 비롯한 문도 400명을 데리고 와서 중창하였다. 이후 송광사는 조선후기 부휴계의 본산으로서 사격을 유지하였고 보조지눌의 유풍을 선양하는 거점이 되었다. 이후 1842년(헌종 8)에는 큰 화재가 발생하여 대웅전 등 2,150여 칸의 전각이 소실되자 용운처익(龍雲處益)이 각계의 후원을 받아 대대적인 중창 공역을 벌여 1856년에 완공되었다.

1886년(고종 23) 축성전을 짓고 고종, 명성황후, 세자의 탄일을 경축하는 원당으로 삼았으며, 1903년(광무 7) 고종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해 성수전을 신축하고 기로소원당으로 삼았다.

참고문헌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 임제법통과 교학전통』, 신구문화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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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여말선초 대불교시책』, 일조각, 1993.
  • 김용태, 「부휴계의 계파인식과 보조유풍」, 『보조사상』25,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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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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