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吉祥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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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개성시성거산에 있었던 절.

개설

길상사(吉祥寺)의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려후기 충렬왕, 공민왕 등이 절에 행차하여 오백나한재를 열었다. 조선초기에도 나한재 도량으로서의 사격을 유지하였다. 조선시대 여러 문인들의 시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전기까지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폐사된 시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내용 및 변천

(1) 고려시대

고려의 수도 개성에는 300여 개의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중에서 이름이 알려진 절은 100여 개이다. 길상사에 대해서는 위치나 창건 시기 등 자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고,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단편적인 사실 몇 가지만 전한다. 그리고 길상사라는 명문이 있는 고려시대의 향완(香垸) 1점이 현재 호암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높이 24㎝의 아담한 향로인데, 길상사의 주지 중대사(重大師) 원승(元乘)이 발원하여 부처님 앞에 봉안한다는 내용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고려후기인 1280년(고려 충렬왕 6) 왕이 왕비인 제국대장공주와 함께 절에 행차하였다가 박연폭포(朴淵瀑布)를 구경하였다. 박연폭포가 개성의 북부 성거산(聖居山)에 있으므로, 길상사는 개성 북부의 성거산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282년(고려 충렬왕 8)에는 왕이 공주와 세자를 데리고 절에 가서 오백성재(五百聖齋)를 열었다.

오백성재는 오백나한재(五百羅漢齋)의 다른 말인데, 오백나한을 공양하는 법회이다. 고려시대에는 기우제(祈雨祭) 의식으로 행하기도 하고, 호국(護國)을 기원하는 법회로 열기도 하였다. 주로 보제사(普濟寺)에서 자주 열었고, 외제석원(外帝釋院)이나 신중원(神衆院)에서도 행하였다. 1284년(고려 충렬왕 10)에도 왕이 공주와 함께 오백나한재를 열었다. 1367년(고려 공민왕 16)에는 왕이 신하들과 함께 절에 갔다가 박연폭포에서 3일간 놀았다.

(2) 조선시대

조선시대 들어서도 길상사의 나한재 도량으로서의 특성은 계속 이어졌다. 1422년(세종 20) 호조 판서신호(申浩)를 절에 보내어 나한재를 지내게 하였다(『세종실록』 4년 5월 6일). 이후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김시습(金時習)과 성현(成俔) 등 여러 문인의 시(詩)에 간간이 이름만 보일 뿐이다.

참고문헌

  • 김창현, 『고려의 불교와 상도 개경』, 신서원, 2011.
  • 한기문, 『고려사원의 구조와 기능』, 민족사, 1998.
  • 김형우, 「고려시대 국가적 불교행사에 대한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 박종진, 「고려시기 개경 절의 위치와 기능」, 『역사와 현실』38, 역사비평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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