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교사(興敎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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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의 능인 후릉의 능침사로, 경기도 개풍백화산에 있던 절.

개설

흥교사(興敎寺)는 경기도 개풍백화산(白華山)에 위치한 사찰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고려시대에도 사격을 유지하였고 조선초에는 정종의 능인 후릉을 보호하고 명복을 빌어주는 능침사였으며, 세종대 선·교 양종의 선종 18사에 추가로 선정되었다.

연원

흥교사의 창건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고려말의 이색(李穡), 백문보(白文寶) 등 유명한 문사들이 이 절에 대해 쓴 시가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정종의 비 정안왕후(定安王后)의 원당이었고 정종의 능인 후릉(厚陵)의 능침사로 지정되었다.

변천

태종대에는 흥교사의 탑을 개성의 연경사(衍慶寺)로 옮겨 세웠는데(『태종실록』 10년 4월 8일), 연경사는 정종과 태종의 모후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제릉(齊陵)에 위치한 재궁이었다. 하지만 상왕인 정종의 요청으로 흥교사에는 전지 30결이 지급되었다(『태종실록』 13년 12월 21일).

1424년(세종 6) 세종은 기존의 7개 종단을 선·교 양종으로 나누고 각각 18개씩 36개 사찰만 공인하였는데, 이때 흥교사는 교종 18사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선·교 양종이 처음 세워졌을 때 흥교사는 36개의 공인 사찰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2년 후 정종의 수륙사(水陸社)송광사(松廣寺)와 정종의 능침사인 흥교사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선종에 소속된 기존의 구례화엄사(華嚴寺)와 은율정곡사(亭谷寺)를 혁파하고 이들 두 사찰을 선종에 새로 포함시켰다(『세종실록』 6년 10월 25일). 이러한 조치가 내려지기 직전에 화장사(華藏寺)를 혁파하면서 정종이 하사한 전지 200결을 흥교사에 지급하였고(『세종실록』 6년 9월 8일), 『세종실록』「지리지」해풍군(海豐郡) 조목에서는 흥교사를 후릉의 재궁으로 삼았으며 선종에 속하게 하여 전지 250결을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앞서 선·교 양종 36개 사찰을 공인할 때 선종의 화엄사에는 원래 보유 전지 100결에 50결이 추가되었고 거주 승려는 70명으로 지정되었으며 정곡사는 원속전 60결에 90결이 더해졌고 거주 승려는 70명이었다. 이들을 대신해 흥교사와 함께 선종 18사에 새로 포함된 송광사에는 전지 130결이 지급되었다. 지급된 토지의 규모만을 비교해 보면 당시 이들 사찰 가운데 흥교사의 위상이 가장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명종대에는 능침사인 제릉의 연경사와 후릉의 흥교사 전각이 오래되어 수리할 필요가 있으므로 태조의 옛 사저인 목청전(穆淸殿)의 고사목(枯死木)을 활용해 쓰도록 하였다(『명종실록』 7년 11월 6일). 흥교사는 조선후기에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근대기까지 이어졌지만 현존하지는 않는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三國遺事(三國遺事)』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고유섭, 『송도의 고적』, 열화당, 1977.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사찰문화연구원, 『북한사찰연구』, 한국불교종단협의회, 1993.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여말선초 대불교시책』, 일조각, 1993.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 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