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원(朴準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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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39년(영조 15)~1807년(순조 7) = 69세]. 조선 후기 정조~순조 때 활동한 외척, 문신. 공조 판서(判書)를 지냈다. 자는 평숙(平叔)이고, 호는 금석(錦石)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공주판관(公州判官)박사석(朴師錫)이며, 어머니 기계 유씨(杞溪兪氏)는 유수기(兪受基)의 딸이다. 조부는 통덕랑(通德郞)박필리(朴弼履)이고 조모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군수(郡守)이만시(李萬始)의 딸이다. 순조(純祖)의 외조부이다. 김양행(金亮行)의 문인이다.

정조~순조 시대 활동

선비 가문의 후예라 맏형 박윤원(朴胤源)과 같이 어려서부터 총명이 뛰어나 책을 읽으면 한 번에 수십 줄씩 읽었다. 육경(六經)과 백가(百家)의 글에 두루 통달하였다.

1786년(정조 1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1787년(정조 11) 2월 그의 셋째 딸이 정조의 후궁 수빈(綬嬪)으로 삼간택(三揀擇) 되자, 건원릉(健元陵)참봉(參奉)을 거쳐 사복시(司僕寺)주부(主簿) · 공조 좌랑(佐郞)이 되었다. 1790년(정조 14)에 보은 현감(報恩縣監)이 되었다. 그 해 박수빈(朴綬嬪)이 원자(元子: 순조)를 낳자 그는 호산(護産)의 노고로 같은 해 6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호조 참의(參議)가 되었고, 이어 공조 참판(參判)이 되었다. 그 뒤 항상 대궐에 머물면서 원자를 보호하고 보도(輔導)하였다.

1800년(순조 즉위) 순조가 즉위하자 그 해 7월 수렴첨정(垂簾聽政) 하던 정순왕후(貞純王后)에 의하여 공조 판서가 되었다. 그 해 8월 장용대장(壯勇大將)이 되었으며, 11월 형조 판서가 되었다. 1801년(순조 1) 1월 초순에 의금부(義禁府)판사(判事)이 되었다가 같은 달 하순에 돈녕부(敦寧府) 판사(判事)가 되었으며, 5월 원종특진관(原宗特進官)이 되었다. 1802년(순조 2) 1월 금위대장(禁衛大將)이 되었고, 11월 숭록대부(崇祿大夫)를 가자하였다. 1803년(순조 3) 3월 다시 의금부 판사가 되었다. 1805년(순조 5) 2월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가 가자되었고, 그 해 6월 공조 판서가 되었다. 그 뒤 돈녕부 판사로 있다가 1807년(순조 7) 2월 7일 돌아가니, 나이는 69세이다. 저서로는 『금석집(錦石集)』 12권이 있다.

성품과 일화

박준원의 성품은 공근(恭謹)하였다고 한다. 정조의 명을 받들어 금중에 들어가 원자를 보호하고 교도(敎導)하는 책임을 주로 전담하였는데, 조심스런 마음으로 공근하여 늘 해이하지 않았다. 순조가 임금이 되자 지위가 더욱 높아졌으나 더욱더 겸손하고 두려워할 뿐이었다고 『순조실록(純祖實錄)』에 기록되어 있다.[『순조실록』순조 7년 2월 7일 「박준원 졸기」]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묘소는 경기도 여주에 있으며, 순조가 친히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남아 있다. 1807년(순조 7)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되었다. 부인 원씨(元氏)는 원경유(元景游)의 딸이다. 자녀는 6남 3녀를 두었는데, 1남은 박종보(朴宗輔)이고, 2남은 박종경(朴宗慶)이며, 3남은 박종익(朴宗翊)이고, 4남은 박종희(朴宗喜)이며, 5남은 박종염(朴宗琰)이고, 6남은 박종영(朴宗永)이다. 3녀는 순조의 생모인 박수빈이다.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금석집(錦石集)』
  • 『한국인(韓國人)의 족보(族譜)』
  • 『대전회통(大典會通)』
  • 『아산현읍지(牙山縣邑誌)』
  • 『반남 박씨 오세 유고(潘南朴氏五世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