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경(朴宗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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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65년(영조 41)~1817년(순조 17) = 53세]. 조선 후기 정조~순조 때 활동한 문신. 호조 판서를 지냈다. 자는 여회(汝會)이고, 호는 돈암(敦巖)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돈령부(敦寧府) 판사(判事)박준원(朴準源)이고, 어머니 원주 원씨(原州元氏)는 원경유(元景游)의 딸이다. 누이가 순조(純祖)의 생모인 박수빈(朴綬嬪)이다. 증조부는 통덕랑(通德郞)박필리(朴弼履)이고, 증조모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이만시(李萬始)의 딸이다. 조부는 공주 판관(公州判官)박사석(朴師錫)이고, 조모 기계 유씨(杞溪兪氏)는 유수기(兪受基)의 딸이다.

정조∼순조 시대 활동

1790년(정조 1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음보(蔭補)로 동몽 교관(童蒙敎官) · 사옹원(司饔院)주부(主簿) 등을 거쳐 순안현령(順安縣令)과 충훈부(忠勳府)도사(都事)를 지냈다.

1800년(순조 즉위)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貞純王后)김씨(金氏)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자, 지극한 총애를 입어 이듬해인 1801년(순조 1) 사과(司果)로 있다가 10월 홍문관(弘文館)부수찬(副修撰)이 되었고, 11월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 1802년(순조 2) 3월 규장각(奎章閣)직각(直閣)이 되고, 7월 의정부 검상(檢詳)이 되었으며, 8월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자급(資級)을 받았다. 1803년(순조 3) 9월 이조 참의(參議)가 되었다. 1804년(순조 4) 2월 검교 직각(檢校直閣)으로 있다가 4월 다시 이조 참의가 되고, 9월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고, 10월 또 다시 이조 참의가 되었으며, 11월 규장각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가 곧 부제학이 되었다. 1805년(순조 5) 1월 예조 참판(參判)이 되고, 3월 이조 참판이 되었으며, 6월 다시 이조 참판이 되었다. 1806년(순조 6) 1월 초순에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가 같은 달 중순에 이조 참판이 되고, 그 해 5월 초순 검교 직제학이 되었으며, 5월 중순에 예조 참판이 되었다.

1809년(순조 9) 5월 홍문관 제학(提學)이 되고, 7월 총융사(摠戎使)가 되었으며, 10월 병조 판서가 되었다. 1810년(순조 10) 4월 이조 판서가 되고, 5월 호조 판서가 되었고, 6월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이 되었으며, 7월 다시 호조 판서가 되었다가 9월에 다시 이조 판서가 되었다. 1811년(순조 11) 1월 홍문관 제학이 되었고 윤3월 규장각 제학이 되었으며 4월 훈련대장(訓鍊大將)이 되었다가 같은 달 이조 판서가 되었다. 그 해 6월 예조 판서가 되었다가 8월 초에 호조 판서가 되었고, 8월 상순 다시 이조 판서가 되었다. 1812년(순조 12) 1월 홍문관 제학이 되고, 2월 의금부(義禁府)지사(知事)이 되었고, 3월 공조 판서가 되었으며, 5월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좌부빈객(左副賓客)이 되었다. 그 해 7월 『선원보략(璿源譜略)』의 중수(重修)가 완료되었는데, 이때의 공으로 종부시(宗簿寺)제조(提調)로서 정헌대부(正憲大夫)를 가자하였다. 그 해 8월 초에 호조 판서가 되었다가 같은 달 중순에 홍문관 제학이 되고, 같은 달 말에 훈련대장이 되었다. 그 해 11월 호조 판서가 되었다가 같은 달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 ·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 ·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이 되었으며, 12월 공조 판서가 되었다.

1813년(순조 13) 2월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고, 3월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으며 4월 예조 판서가 되었다. 그 해 5월 다시 한성부 판윤이 되고, 7월 세자시강원 우부빈객(右副賓客)이 되었고, 9월 예문관(藝文館)제학(提學)이 되었으며, 11월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1814년(순조 14) 2월 예조 판서가 되었고, 3월 홍문관 제학이 되었으며, 4월 공조 판서가 되었다. 6월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가 되었는데, 이때 숭정대부(崇政大夫)를 가자하였다. 그 해 7월 의금부 판사(判事)가 되고, 10월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이 되었다. 1815년(순조 15) 2월 세자시강원 좌부빈객이 되고, 6월 이조 판서가 되었다가 8월 홍문관 제학이 되었고, 10월 공조 판서가 되었으며, 12월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1816년(순조 16) 2월 이조 판서가 되고, 7월 호조 판서가 되었고, 9월 세자시강원 우빈객(右賓客)이 되었다. 1817년(순조 17) 3월 의금부 판사가 되었는데, 4월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를 가자하였다. 그 해 9월 세자시강원 좌부빈객이 되었고, 12월 1일 호조 판서로서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53세이다.

1811년(순조 11) 12월 <홍경래(洪景來)의 난(亂)>이 일어나 매일 사방에 격문이 나돌자, 당시 훈련도감에 있어서 군심(軍心)을 진정시키기 힘들었다. 『반남 박씨 오세 유고(潘南朴氏五世遺稿)』를 편집하였다. 글씨로 「박준원신도비(朴準源神道碑)」가 있다.

시호와 가족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첫째 부인 덕수 이씨(德水李氏)는 이술모(李述模)의 딸이고, 둘째 부인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신대재(申大載)의 딸이다.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매산집(挴山集)』
  • 『반남 박씨 세보(潘南朴氏世譜)』
  • 『아산현읍지(牙山縣邑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