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덕(金大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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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7년(선조 10)∼1639년(인조 17) = 63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이자, 서예가. 형조 참판(參判) 등을 지냈다. 자는 득지(得之)고, 호는 소봉(蘇峯) 또는 이안당(易安堂)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거주지는 서울과 경기도 금천(衿川)이다. 친아버지는 돈녕부(敦寧府)동지사(同知事)김원록(金元祿)이고, 친어머니 원주 원씨(原州元氏)는 원국량(元國良)의 딸이다. 어려서 백부(伯父)의 양자가 되었는데, 양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김원상(金元祥)이며, 양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이헌(李*)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사헌부 감찰김종(金綜)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사옹원(司饔院)봉사(奉事)김숙문(金叔文)이다. 공조 판서(判書)김예몽(金禮蒙)의 5세손이자, 기묘명현(己卯名賢) 김구(金絿)의 종손(從孫)이기도 하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남한산성(南漢山城)에 45일간 포위되었을 당시 강화 조건으로 척화신(斥和臣) 김상헌(金尙憲) 등을 청(淸)나라에 넘기려고 하자, 적극 반대하여 넘기지 못하게 하였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601년(선조 34) 사마시(司馬試)에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고, 바로 그해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5세였다.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로 보임되었고, 1602(선조 35) 예문관(藝文館)검열(檢閱)과 예문관 대교(待敎), 예문관 봉교(奉敎)로 승진하였다.(『선조실록』 35년 4월 11일),(『선조실록』 36년 3월 21일),(『선조실록』 37년 6월 22일) 1603년(선조 36) 예문관 대교로 있을 때 사관(史官)을 겸하여 사고(史庫)에 다녀왔고, 조강(朝講)기사관(記事官)으로 입시(入侍)하였다.(『선조실록』 36년 3월 21일),(『선조실록』 36년 8월 10일) 1604년(선조 36) 예문관 봉교로 있을 때 조정에서 선조에게 존호(尊號)를 올리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영의정윤승훈(尹承勳)을 따라 반대하다가 외직인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로 좌천되었으며, 이어 사간원(司諫院)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였다.(『선조실록』 37년 9월 22일) 이에 선조 말년에는 고향인 경기도 금천에서 은거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다시 예문관 봉교에 임명되었다가, 성균관(藝文館) 전적(典籍)으로 옮겼다.(『광해군일기』 즉위년 4월 25일),(『광해군일기』 즉위년 7월 13일) 이어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 광해군의 생모 추숭을 반대하였다.(『광해군일기』 2년 3월 4일),(『광해군일기』 2년 3월 13일) 성절사(聖節使)정문부(鄭文孚)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갔다 왔다.(『광해군일기』 2년 12월 1일) 1613년(광해군 5) 병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자원하여 서산군수(瑞山郡守)로 나갔는데, 많은 곡식을 비축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다. 1615년(광해군 7) 조정에 들어와서 호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는데, 대북파(大北派)의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기 위하여 <정청운동(庭請運動)>을 전개하자, 이에 반대하다 1617년(광해군 9)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이에 고향 경기도 금천에서 은거하였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권17 「김대덕(金大德)」 이하 「김대덕묘갈」로 약칭]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다시 조정에 들어와서 여러 가지 벼슬을 역임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인조를 따라 강화도(江華島)에 피난하였다. 얼마 안 되어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면서 예제(禮制)를 다하였다.[「김대덕묘갈」] 그리고 1630년(인조 8)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使)에 임명되었다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總管)이 되었다. 한편 후금(後金)의 누르하치가 요동(遼東)을 점령하자, 요동에 살던 중국 농민들이 평안도 가도(椵島) 등의 섬으로 피난하였다. 이때 파락호(擺落戶 : 패잔병) 출신 모문룡(毛文龍)이 자칭 도독이라 일컬으며 가도의 농민들을 규합하여 후금을 공격하고자 조선에 막대한 군량미를 요구하였다. 1632년(인조 10) 김대덕은 접반사에 임명되어 가도로 가서 명(明)나라 도독(都督)모문룡을 만나 그를 접대하고, 그가 요구하는 군량미의 숫자를 최대한 줄였다.(『인조실록』 10년 3월 12일) 모문룡은 조선과 명나라⋅청나라 사이에 외교적으로 골칫거리였는데, 접반사김대덕이 모문룡을 잘 구슬려서 그 피해를 최소화하였던 것이다.

1636년(인조 14) 사은사(謝恩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대고 이를 사양하였다. 당시 명나라로 가는 육로가 막혔기 때문에 해로로 갈 수 밖에 없었는데, 뱃길이 험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것은 일시 중단되었다.(『인조실록』 14년 9월 6일)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 일행은 강화도로 피난을 가다가 남한산성에 45일간 오랑캐 군사에게 포위되었다. 당시 전쟁에 지친 군사들이 김상헌·정온(鄭蘊) 등의 척화신들을 청나라 태종(太宗)에게 넘기고 빨리 화해하자며 시위하였는데,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었던 김대덕 등은 이를 적극 반대하여 중지시켰다.(『인조실록』 15년 1월 23일) 그 뒤에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자, 척화파 김상헌 등은 죽음을 면하고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나중에 돌아왔다. 1637년(인조 15)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되어, 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였다.[『승정원일기』인조 15년 2월 22일] 1638년(인조 16)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管)에 되었다. 그해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2세였다.(『인조실록』 16년 8월 29일)

그는 글씨에 뛰어났는데, 특히 초서(草書)예서(隸書)에 능하였다. 종조부 자암(自庵)김구는 조선 4대 명필가의 한 사람으로, 김대덕은 어릴 때부터 김구의 서법(書法)을 그대로 익혀 자암 서체(書體)를 발전시켰다.

성품과 일화

성품은 충직하고 질박하며, 말은 어눌하였으나 정성스러웠다. 사람과 사귈 때에는 조금도 차별을 두지 않았으나, 일을 할 때에는 직언을 잘 하였으며, 처음에 벼슬길에 나갈 때부터 구차스레 권력의 향배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았다.[「김대덕묘갈」]

그의 종조부가 조선 4대 명필가의 하나인 김구인데, 김구는 중종(中宗) 때 사림파(士林派)의 거두로서 홍문관(弘文館)부제학(副提學)을 지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화(禍)를 당한 기묘명현의 한 사람이다. 김대덕은 어려서부터 종조부 김구의 글씨를 익혀, 7~8세 무렵부터 글을 짓고 글씨를 쓸 수 있었다. 특히 초서·예서에 뛰어났으므로, 사람들이 신동이라 부르면서 자암의 서풍(書風)이 있다고 말하였다. 광해군이 세자로 있을 때 김대덕이 초서와 예서를 잘 쓴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초청하였으나, 김대덕은 기예(技藝)로써 출세하고 싶지 않아 끝내 응하지 않았다.[「김대덕묘갈」]

1604년(선조 37) 그가 예문관 봉교로 있을 때 사관(史官)을 겸하고 있었는데, 조정에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극복한 임금에게 존호를 올리자는 논의가 한창 무르익었다.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이 논의에 휩쓸리다시피 하고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나 김대덕은 홀로 이를 반대하였다. 예문관 동료들과 앉은 자리에서 항의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의 직책은 붓을 들고 임금이나 신하들의 잘잘못을 기록하는 자리인데,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서 임금에게 아첨할 수는 없다” 하고, 직책의 본분을 지킬 것을 주장하였다. 이 때문에 죄를 얻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 금천으로 돌아가서, 선조 말년에 몇 년 동안 은거하였다.[「김대덕묘갈」]

광해군이 즉위하여 생모 김공빈(金恭嬪)을 추숭하려고 하자, 사간원 정언이었던 김대덕은 그 잘못을 논박하였다. 그리고 대북파의 이이첨 등은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출하려고 하면서 조정 공론(公論)의 눈치를 보는 한편, 의주부윤(義州府尹)정준(鄭遵)을 시켜 거짓으로 조정에 보고하게 하기를, “명나라 조정에서 신종(神宗)만력제(萬曆帝)가 선제(先帝 : 아버지 목종(穆宗)융경제(隆慶帝))의 귀비(貴妃)인 정씨(鄭氏)를 폐출(廢黜)하고, 목종융경제의 제 3황자인 복왕(福王)을 죽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이첨 일당은 이것을 근거로 인목대비를 폐출하고자 하였다. 이런 가운데 1610년(광해군 2) 김대덕이 성절사정문부의 서장관에 임명되어, 명나라 북경에 가게 되었다. 광해군은 비밀리에 김대덕을 불러 그 실상을 탐문해 오도록 명하였다. 이에 김대덕은 명나라 북경에서 돌아와서 복명(復命)하기를, “신종만력제가 정비(鄭妃)를 높이 받들고, 복왕을 우애로써 대우하기를 선제가 생존해 있을 때보다 더욱 잘하고 있습니다”라고 사실에 의거하여 치계하면서, 풍자적인 용어를 섞어 은유하였으므로 이이첨 일파의 계획은 중지되었다.[「김대덕묘갈」]

1636년(인조 14) 12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45일 동안 포위되었을 때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主和派) 몇 사람이 성을 내려가서, 청나라 태종홍타지와 화의를 교섭하였다. 청 태종은 강화의 조건으로 화의를 반대하는 척화파 김상헌 등 몇 사람을 결박해서 청나라 측에 보내라고 요구하였다. 남한산성을 지키던 군사들도 싸움에 지쳐 대규모로 두 번이나 시위하면서 화의를 주장하였고, 또 강화도가 함락되어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등 왕자와 비빈(妃嬪)들이 모두 오랑캐 군사에게 사로잡히자 인조는 어쩔 수 없이 청 태종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였다. 이때 김대덕이 팔을 걷어붙이고 항의하기를, “나라는 망할지언정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붓을 휘날려 상소를 초안하였는데, 어조가 격렬하여 읽어보는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였고, 인조도 김상헌 등을 보내지 않았다. 결국 삼전도(三田渡)에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였으나, 척화파 김상헌 등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김대덕묘갈」]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금천현(衿川縣) 자경향(自敬鄕)에 있는데, 신익성(申翊聖)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지금의 경기도 광명시 일직동 6번지인데, 고속철도 공사로 무덤을 이장하던 중에 그의 무덤에서 명기(冥器)가 출토되었다. 수습된 유물은 광명시 ‘향토 행정 사료관’에 있으며, 조선시대 명기를 부장하는 풍습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김대덕은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다가, 1617년(광해군 9) 아버지 김원록을 모시고 서울에서 금천의 자경향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그 후손들이 일직동 자경 마을에서 대대로 살았으므로, 김대덕은 광산김씨 소봉공파(蘇峯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부인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관찰사성대업(成大業)의 딸인데, 자녀는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은 김익견(金益堅)이고, 차남은 김익중(金益重)이다. 장녀는 홍수하(洪受河)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계곡집(谿谷集)』
  • 『낙전당집(樂全堂集)』
  • 『백헌집(白軒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월사집(月沙集)』
  • 『응천일록(凝川日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