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과(武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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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고위 무관을 선발하던 과거.

개설

무과(武科)는 무관을 선발하던 과거제도로, 무거(武擧)라고도 하였다. 무과는 문과와 함께 3품 이상의 고위직에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무과에 합격하면 품계와 관직을 받는데, 장원은 종6품을 받고 그 나머지는 종7품에서 종9품을 받았다. 그들은 무관으로 진출하여 무반(武班)을 이루며 치국(治國)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조선시대의 무과는 문과에 비하면 그 격과 비중이 떨어졌지만, 조선의 양반 관료 제도를 이끌어 가는 중추적인 인재 선발제도였다.

내용 및 특징

무과는 문과와 마찬가지로 3년에 1번씩 정규적으로 실시하는 식년(式年) 무과와 비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증광시(增廣試)·알성시(謁聖試)·정시(庭試)·춘당대시(春塘臺試) 등의 각종 별시(別試)무과가 있었다. 식년시는 문과와 같이 초시(初試)·복시(覆試)·전시(殿試)의 3단계 절차가 있었다.

초시는 식년인 자(子)·오(午)·묘(卯)·유(酉)년의 전해 가을에 서울과 각 지방에서 시험을 보아 모두 270명을 뽑고, 식년 봄 서울에서 복시를 보아 28명을 뽑은 다음 역시 식년 봄 서울에서 실시하는 전시에서 이들 28명을 갑과(甲科) 3명, 을과(乙科) 5명, 병과(丙科) 20명의 등급으로 구분하였다. 식년마다 33명을 뽑는 문과에 비하여 무과의 선발 인원은 적었지만 문과와 달리 이 숫자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외적의 침입 등 긴급하게 무사를 선발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원래의 정수보다 많은 인원을 선발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식년무과보다는 각종 별시무과에서 더 빈번하게 이루어졌는데, 임진왜란 이후에는 식년무과에서도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수천 명까지 뽑은 경우도 있었다. 특히 광해군대에는 정시에서 10,000명에 가까운 인원을 뽑는다고 해서 만과(萬科)라는 용어가 등장하였고, 숙종대에는 18,000여 명을 한꺼번에 뽑기도 하였다.

시험 과목으로는 무예와 강서(講書)가 있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무예로 목전(木箭)·철전(鐵箭)·편전(片箭)·기사(騎射)·기창(旗槍)·격구(擊毬) 등 6가지를 시험 보았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이후부터는 기사를 기추(騎芻)로 바꾸고, 유엽전(柳葉箭)·조총(鳥銃)·편추(鞭芻) 등 실전전인 과목을 추가하였다. 강서는 전략을 위한 병서(兵書)와 의리를 위한 경서(經書), 그리고 목민관의 능력을 위해서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시험하였다.

시험 장소와 시관은, 식년무과초시의 경우 서울은 2곳으로 나누어 각 소(所)마다 2품 이상 1명과 문관 당하관 1명, 무관 당하관 2명을 시관으로 삼고, 감찰이 감시관을 맡았다. 지방은 각 도의 지역을 돌아가며 시험을 보았는데, 수령 3명이 시관을 맡았다. 복시는 전국의 초시 합격자를 대상으로 서울에서 실시하며 병조와 훈련원이 주관하였다. 복시의 시관은 2품 이상의 문관 1명과 무관 2명, 당하관인 문관 1명과 무관 2명이 맡고,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리가 감시관을 맡았다.

전시는 복시에 합격한 28명을 대상으로 왕이 참석한 가운데, 최종 등급을 매기는 시험이었다. 처음에는 6과목을 모두 시험 보았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11과목 가운데(중에) 2~3과목을 선택해 시험 보았다. 시관은 복시와 같으나 의정(議政) 1명을 명관(命官)으로 삼았다. 식년무과 이외에 각종 별시무과는 증광무과 외에는 초시와 전시만 치르며 모두 서울에서 시험을 보았다. 따라서 서울은 언제 볼지 모르는 각종 별시에 대비하기 위하여 전국에서 지원자들이 몰려들었고, 그에 따라 서울의 쌀값이 오르는 등 폐단이 적지 않았다.

무과 합격자는 ‘출신(出身)’이라고 부르며, 문과 합격자와 마찬가지로 홍패(紅牌)라는 합격 증서를 주었다. 조선초기 무과 합격자는 훈련원과 별시위의 권지(權知)분관(分館)되었는데, 갈수록 출신자가 늘어나고 별시위도 폐지됨에 따라 별도의 천거제에 따라 관직으로 나갔다. 하지만 실제로는 출신자의 문벌에 따라 우열이 정해져 수문장(守門將)·부장(部將)·선전관(宣傳官) 등의 순으로 천거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문벌이 없는 출신자의 관직 진출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해졌다.

무과의 응시 자격은 처음에는 문과와 같았다. 하지만 광취(廣取)무과가 시행되면서 서얼과, 군공을 세우거나 납속(納贖)을 통하여 면천한 천민까지 응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문과도 마찬가지였지만 면천을 하였다고 해도 문과에 응시하기는 어려웠고, 응시를 하더라도 합격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따라서 천민이 문과에 응시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비교적 응시하기 쉬운 무과에 주로 진출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되자 무과의 위신은 문과에 비하여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후기에는 천민들이 무과에 불법으로 응시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이 만들어질 정도로 천민들의 무과 응시가 성행했다. 그러나 관직 진출을 위해서는 추천을 거쳐야 하였기 때문에 천민은 무과에 합격하더라도 관직에 진출하기란 거의 불가능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층민들은 무과에 합격하고도 홍패만 안고 평생을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신분 상승이라는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으므로 조선시대 하층민들에게 무과는 관직 진출보다는 신분 상승을 위한 기반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무과를 통하여 관직에 진출하는 것은 거의 사족이나 양반 자제뿐이었다. 이는 무과가 양반이나 사족의 관직 진출 통로로서 지속되었음을 말해 주는 사실이라고 하겠다.

변천

무과는 중국 당나라 때에 처음 시행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953년(광종 9)에 과거제를 처음 도입하였으나 당시에는 문과와 잡과만 실시하였다. 고려초 반독립적인 지방 호족을 문신으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무과를 도입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다가 여진 정벌을 위하여 1109년(예종 4)부터 1133년(인종 11)까지 24년간 무과를 실시하였으나 문신들의 반대로 곧 폐지되었다.

고려말인 1390년(공양왕 2)에 무과 설치를 논의하였지만 채 시행하기 전에 고려가 멸망하고 말았다. 조선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즉위 교서에서 문무 양과의 실시를 천명하였으나, 실제로는 1402년(태종 2)에 처음 시행되었다. 그 후 정비 과정을 거쳐 1486년(성종 16) 『경국대전』에 최종 확립되었다.

16세기 이후에는 그동안 응시가 제한되었던 한량의 무과 응시가 가능해졌고, 정시의 도입과 함께 직부제(直赴制)의 시행으로 다양한 무사의 시험제도가 무과와 연결되었다. 또한 남왜북로(南倭北虜)의 침입이 빈번해지면서 부방(赴防) 군사를 확보하기 위하여 한꺼번에 많은 인원을 뽑는 광취가 이루어졌다. 그러한 관행은 임진왜란 이후 만과가 본격화되는 하나의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만과의 실시는 서얼은 물론이고 공사천(公私賤)이 무과에 진출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고, 사족 자제들이 무과를 기피하는 배경이 되어 무과가 천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의 무과는 위로는 양반 자제로부터 아래로는 공사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이 신분 상승을 이루는 발판이 되었고, 중세 신분제 사회에 균열을 일으키는 되었다. 무과는 문과와 함께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이후 근대식 관료제가 도입되면서 폐지되었다.

의의

무과는 조선시대 과거제도의 한 특징으로 문치주의 사회를 뒷받침할 무관을 양성하기 위한 인재 선발제도였다. 신분 사회였던 조선왕조에서 무과는 시험을 통하여 무관을 선발함으로써 혈통보다는 능력을 본위로 하는 조선왕조의 인재 선발정책을 잘 반영한 제도였다. 그런 점에서 무과는 개방적인 인재 선발책의 성격을 띠지만 실제로는 양반 또는 사족 자제가 다수 합격되는 특징을 보였다.

즉, 무과는 조선시대의 양반 사회에서 축소된 문음을 대신해 지배층을 재생산하는 기능을 수행하였음을 의미하였다. 또 무과는 신분 사회에서 사회계층 간 이동의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하층민들의 신분 상승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로 기능하였다. 이는 중세의 신분제 사회 질서가 흔들리는 속에서 한편으로는 사회 체제를 유지하게 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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