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구(擊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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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달리며 채 막대기로 공을 쳐 구문에 넣는 경기이자 기마무예.

개설

말을 달리며 채 막대기로 공을 쳐 구문에 넣는 경기이자 무예. 격구가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9세기 초반 발해 때 첫 기록이 확인된다. 그 후 격구는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기마무예를 연마하는 수단이자 유희로 성행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에 격구는 무과의 시험과목으로 채택되면서, 무인들의 필수적인 무예로 등장하였다. 격구가 기마무예를 연마하는 최고의 수단으로 인식된 것이다. 이는 종래 단체전에 의한 경기격구 이외에 개인이 혼자 행하는 시험용 격구의 출현을 가져왔다. 격구는 서양의 폴로와 비슷하지만, 채 막대기의 끝이 숟가락 모양의 나무로 치는 것이 아니라 소코뚜레와 같은 형태로서 공을 떠 돌리거나 던져 구문에 넣는 방식이다. 이는 우리의 격구문화가 서구의 폴로와 다르다는 점을 잘 말해준다. 그 제도는 『경국대전』에 명문화되었고, 국왕 앞에서 행하는 격구는 하나의 의식으로 정착되어 『국조오례의』에 나타난다. 격구가 무과의 시험과목으로 정비되면서, 격구는 무인들에게 필수적인 무예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양란을 거치면서 실전용 무예가 중시되어 기초무예라 할 수 있는 격구의 중요성이 점차 감소되다가 18세기 말부터 무과시험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연원 및 변천

격구는 원래 페르시아에서 시작하여 인도, 중국 또는 북방민족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격구의 기록은 9세기 초반 발해 때에 처음 확인된다. 821년(선왕 4) 12월 일본으로 파견한 사신 왕문구(王文矩)가 그 이듬해 정월에 격구를 보이자, 일왕과 신하들이 그의 묘기를 찬탄하는 시를 지은 사례가 그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발해 이전 고구려 때부터 격구가 시행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격구가 발해 건국 이후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했음을 잘 말해준다.

그 후 격구는 후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에 들어와 더욱 성행하였다. 고려의 국방전략상 북방민족과의 전투를 위해 기병의 전력 강화가 요구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격구장이 도성 내에 설치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매년 단옷날에는 국왕 이하 관리와 백성, 부녀자들까지 참석하여 격구를 관람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격구는 무신들은 물론이고 국왕뿐 아니라 여성들까지 즐기는 경기로 발전하였다. 무신정권이 들어선 이후 격구의 열기가 대단하여, 개경에 격구장이 별도로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에는 격구로 명성을 얻은 무인들이 많았는데, 고려말 이성계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격구는 조선왕조에 들어와 더욱 성행하였다. 특히 세종은 격구가 단순한 놀이가 아닌 마상에서 무예를 연마하기 가장 좋다는 판단 아래 무과의 시험과목으로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종래 다수의 참여자가 참가하는 경기 형태가 아닌 무과시험을 위한 1인용 격구가 크게 발달하였다. 그 결과 격구는 『경국대전』에 식년무과의 초시, 복시, 전시의 과목으로 정비되었고,『국조오례의』에 무과전시의(武科殿試儀)에 하나의 의식으로 체계화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격구는 자주 채택되지 못하였다. 총포류 발달과 함께 격구가 실전무예로서의 기능이 떨어진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결국 18세기 말부터는 격구가 완전히 무과의 시험과목에서 제외되었다. 다만, 격구의 구체적인 경기방식이 24반 무예의 하나로서,『무예도보통지』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무과의 시험과목에서 제외된 격구는 그 후 사라져 영영 자취를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경기도구 및 장소

격구는 말을 타고 채 막대기로 공을 치거나 떠 넣는 경기였다. 격구에 필요한 도구는 말과 안장, 복식, 숟가락 모양의 채 막대기인 장시(杖匙), 그리고 붉은색 나무 공, 공을 쳐 넣은 구문(毬門) 등이고, 말을 달릴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어야 했다. 우선, 말은 과하마(果下馬)라고 불리는 토종마이다. 말안장은 매우 화려하고 사치스러워 고려 때에는 중인(中人)의 집 열 채 가격에 맞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격구의 복식을 격구관복(擊毬冠服)이라고 불렀다. 이때 관복이란 모자와 의복을 말한다. 모자는 검은색 말갈기로 만든 갓으로 모정이 평평하고 첨이 있는 종립(鬃笠)에 물총새의 깃털인 취우(翠羽)와 호랑이 수염인 호수(虎鬚)를 모자의 양쪽에 꽂아 세웠다. 옷은 직령 형태의 홍색 철릭을 입고 허리에 과두(裹肚)를 갖추고 광조대(廣組帶)를 매고 팔에는 소매 끝을 쪼여 매는 사구(射韝)를 착용하였다. 다만, 무과시험을 볼 때는 철릭 대신 무거운 갑옷을 입고 할 경우에 점수를 더 주기도 하였다.

격구의 공은 나무로 깎아 만든 공[毬]으로, 붉은색을 칠하였다. 이 때문에 격구공을 주칠목환(朱漆木丸)이라고도 하였다. 공의 둘레는 1척 3촌이다. 격구의 채인 장시(杖匙)는 나무로 만들었으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자루 부분과 공을 치는 부분이다. 공을 치는 부분은 숟가락처럼 생겨 시부(匙部)라고 부르는데, 길이와 넓이가 각각 9촌이다. 자루 부분은 길이가 3척 5촌이다. 채의 시부는 소코뚜레처럼 나무를 둥글게 구부려 묶어 공을 뜰 수 있게 만들었다. 자루에는 다섯 가지 색깔을 칠하였다.

격구장은 줄여서 구장(毬場)이라고 불렀다. 무과시험을 위한 격구장에는 시험 점수를 매기는 도청(都廳)이 장막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곳은 시험관이 격구 응시자들의 득점을 채점할 뿐 아니라 북과 징을 울려 출발과 끝을 알려주었다. 격구의 경기 장소는 고려 때만 해도 수도인 개경에 구장(毬場)이 마련되어 있었고, 고려 무신집권기에는 별도의 격구장을 위해 수십 채의 민가를 헐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조선왕조에서 격구의 장소는 서울에서는 주로 모화관과 훈련원이 이용되었고, 지방에서는 주로 무과의 초시를 보았던 읍내 공간의 강무당 앞에 격구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경기 방법

경기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구문(球門)을 경기장 양쪽에 세우고 양편에서 서로 공을 쳐 상대방 구문에 넣는 방법이다. 이는 단체로 편을 나누어 격구경기를 하는 형태로서, 발해 때부터 고려시대까지 크게 유행하던 방식이다. 경기가 시작할 때, 기녀(妓女)가 노래하고 춤추면서 구장 한복판으로 공을 던지면 양쪽 경기자들이 달려들어 공을 치는데, 상대방의 구문 안으로 공을 많이 넣는 편이 이긴다.

둘째는 구문(球門)을 경기장 한쪽에 세우고 개인이 무과에서 격구시험을 볼 때 사용하던 방식이다. 경기장 한끝에 두 개의 구문을 세우고 다른 한쪽 끝에서 출발하여 일정한 순서에 따라 공을 치면서 되돌아 나오는 방법이다. 응시자는 출마표(出馬標)라 하는 두 개의 깃발이 세워져 있는 출발점에서 대기한다. 출마표에서 50보 거리에는 치구표가 표시되어 있었고, 그곳에는 공이 놓여 있다. 치구표에서부터 구문까지는 200보에 이르는데, 두 개 구문의 거리는 5보이다. 출마표에서 말을 달린 응시자는 치구표에 이르러 돌면서 공을 밀고 돌리기를 세 차례 한 후에 구문으로 달려가 공을 세 차례 에워싸고 돈다. 그 후에 다시 말을 달려 치구표로 돌아와 공을 놓고 출마표에 돌아와 그친다.

공을 구문으로 쳐낸 자는 15점을 주고, 공문 옆으로 비껴 보낸 자는 10점을 주되, 규정된 자세를 갖춘 자라야 한다. 말을 출발시킬 때 채를 말목과 말 귀에 가지런히 놓은 귀 견줌 자세를 취하는 것을 비이(比耳)라 한다. 이 자세로 치구표에 달려와 채 안쪽으로 공을 들어 올리는 배지(排至)를 하고, 반대로 공을 공채의 바깥쪽으로 돌리는 지피(持彼)를 한다. 지피는 도돌방울인 도령(挑鈴)이라고도 한다.

공채의 안쪽으로 비스듬히 공을 끌어 높이 던져 올리는 것을 배지라 하고, 공채의 바깥쪽으로 공을 끌어당겨 던지는 것을 지피라고 한다. 배지나 지피를 할 때에는 반드시 공채를 말의 가슴에 대야 하는데 이를 할흉(割胸)이라고 한다. 이러한 동작을 세 번 끝낸 다음에야 말을 달려 격구를 진행한다. 자세를 취하는 동작이 세 번 끝나더라도 격구를 진행할 형편이 못 되면 4회나 5회를 해도 무방하다.

격구를 처음 시작할 때 공을 세로 치지 않고, 공채를 잡아 말귀와 나란히 가로놓는데 이것을 귀견줌이라 한다. 이렇게 두 번이나 세 번 귀견줌을 한 뒤 손을 들어 세로 공을 치면 손은 높이 올려도 공채는 아래로 드리워 흔들리는데 이것을 수양수(垂揚手)라고 한다. 수양수의 동작은 규정된 횟수가 없이 공을 구문으로 내보낼 때까지 한다. 수양수의 동작을 할 때 몸을 한편으로 기울이면서 젖혀 누워 공채로 말 꼬리 쪽을 겨냥하는데 이것을 치니마기, 즉 방미(防尾)라고 한다.

공이 구문을 나간 다음에는 공을 치지 않더라도 짐짓 수양수의 동작을 하고 또 공채를 말목에 가로놓은 채 말을 출발시키기 위하여 세워놓은 깃발 아래로 달려 돌아온다. 혹시 귀견줌을 할 때 미처 수양수의 동작을 하지 못하고 공이 문을 나간 경우에는 구문 안에서 짐짓 수양수의 동작을 하고 또 구문 바깥에서도 짐짓 수양수의 동작을 한다. 혹시 공이 구문 앞에 와서 멈추려고 할 때에는 다시 쳐서 구문 바깥으로 내보내도 상관없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고려 때에는 매년 단오절에 격구가 국가적인 행사로 이루어졌다. 이를 위해 고려 조정에서는 무관 자제들을 미리 뽑고, 큰길에 용과 봉황 무늬가 그려진 장전(帳殿)을 설치하고 그 앞에 격구장을 만들었다.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200보 정도 되는 길 가운데에 구문을 세우고 길 양편에 오색 비단으로 부녀들이 막을 치고 관람석을 만들었다. 격구를 하는 사람들의 옷이 사치스러웠을 뿐 아니라 말안장은 중인의 집 열 채 가격에 해당할 정도로 비쌌다. 경기는 두 편으로 나누어 하는데, 경기장 가운데서 기생이 연주에 맞춰 춤을 추다가 공을 던지면 경기가 시작한다. 좌우대가 모두 말을 달려 공을 서로 차지하려 다투는데, 먼저 문 안에 집어넣은 자를 수격(首擊)이라 한다. 고려말에는 단옷날 원나라와 고려가 격구시합을 벌이기도 하였다. 격구를 위한 국제경기가 벌어진 셈이었다.

조선시대의 격구는 무사들의 무예인 동시에 마상에서의 기예를 선보이는 경기였던 만큼, 외국에서 사신이 올 때 격구를 선보이기도 하였다. 격구는 말이 나무로 만든 공을 잘 보고 뛰어야 말 위에서 잘 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공을 말 먹이통인 유구통에 넣어 두었다. 말이 콩을 먹으면서 늘 공을 보는 것이 습관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후에 공을 들어 던지면 말이 그 공이 있는 곳에 먹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이를 따라 뛰었고, 이에 따라 공을 자유자제로 칠 수 있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 『구당서(舊唐書)』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 조선풍속자료집설, 조선총독부 중추원, 1937.
  • 나현성, 「한국축국 격구고」『민족문화연구』3, 1969.
  • 심승구, 「조선초기 무과제도」『북악사론』1, 1989.
  • 심승구, 「아이들도 왕도 신나는 장치기놀이」『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996.
  • 임동권·정형호, 『한국의 마상무예』, 마사회, 1997.
  • 심승구 외, 『조선전기 무과전시의 고증연구』, 충남발전연구원, 1998.
  • 심승구, 「조선시대 격방의 체육사적 고찰」, 『한국체육대학교논문집』3, 1998.
  • 심승구, 「한국 축국의 역사와 특성」, 『전통과 현대』20,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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