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군부(三軍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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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무(軍務)를 통솔하던 군령권의 최고 기관.

개설

고려 말기 설치된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는 조선 건국과 동시에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개칭되면서 의흥친군(義興親軍)을 통솔했다. 1400년 중추부(中樞府)와 합치고 승추부(承樞府), 삼군도총제부, 오위진무소(五衛鎭撫所)를 거쳐 세조 때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가 되었다.

이후 오위도총부는 유명무실해지면서 군권이 분산되었고, 1865년(고종 2) 명목상으로 삼군부(三軍府)가 다시 설치되었다. 의정부와 비변사를 합치고, 조선 초기의 정부와 군무 분립 정신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군령의 최고 기관으로 삼군부가 실제적으로 설치된 것은 1868년이었다. 삼군부는 군무를 통솔하고 숙위(宿衛) 문제를 총괄하여 살피는 동시에 변방에 관한 모든 사항까지도 관장하였다. 이로써 삼군부는 의정부와 대등한 위치를 점하였고 의정부는 정부(政府)로, 삼군부는 무부(武府)로 불리게 되었다.

삼군부 운영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병조 판서를 겸임한 삼군부의 제조(提調)였으며, 흥선대원군 하야와 함께 삼군부도 약화되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과정에서 삼군부가 최고의 군령 기관으로 위상을 드러냈으나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설치를 계기로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다가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에 합부되었다.

변천

고려 말기 이성계 중심의 신진 사대부 개혁파들은 1391년(고려 공양왕 3) 온 나라의 군사를 통솔하기 위해 삼군도총제부를 설치했다. 도총제사(都摠制使)는 시중(侍中) 이상의 관료가 겸임하게 하여 이성계가 맡았고, 재상급은 삼군총제사(三軍摠制使)를 맡게 하여 조준·정도전 등이 임명되었다. 이 외 부총제사 단사관(斷事官)·경력(經歷)·도사(都事)·육방녹사(六房錄事)·군녹사(軍錄事) 등이 구성원으로 있어 행정 실무를 담당했다.

조선이 건국되자 태조는 1393년 9월 의흥친군을 통솔하는 관청으로 삼군총제부를 의흥삼군부로 개정하고 중방(重房)을 폐지하였다. 지금 서울에 삼군부를 설치하고 지방에 시위(侍衛) 각패(角牌)를 두어서 삼군부에 소속시키고 반을 나누어 돌아가며 번(番)을 들게 한 것은 부위(府衛)의 유법이라는 보고도 있었다. 1394년 2월 판의흥삼군부사정도전은 군정 개정에 관한 상소문을 올리면서 군사는 엄격함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한 부위의 법을 범한 자는 삼군부에서 상세하게 심문하고 형조(刑曹)한성부(漢城府)로 보내어 과단하게 처리할 것을 주장하였다.

삼군부는 1400년 중추부와 합쳤고, 태종은 이듬해 승추부로 개칭하였다. 1403년에는 승추부에서 따로 분리하여 다시 삼군도총제부로 하였다가, 1409년(태종 9)에는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라고 고쳤다. 1451년(문종 1) 군사 제도를 고치면서 오위진무소, 1467년(세조 12)에는 오위도총부로 개칭되었다.

삼군부가 명목상 재설치된 것은 1865년(고종 2)이다. 대원군은 의정부의 기능을 확대·강화하기 위해 비변사를 의정부에 통합하고, 조선 초기의 정부와 군무 분립 정신을 살리기 위해 군령의 최고 기관으로 삼군부를 재설치하였다. 영의정조두순은 왕에게 정무를 보고하는 차대(次對)에서 현재의 예조(禮曹)가 있는 자리는 국초의 삼군부가 있던 곳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오위의 제도를 갑자기 복원할 수는 없지만 훈련도감의 신영(新營)·남영(南營)·마병소(馬兵所)와 5영의 낮 근무소를 지금의 예조에 함께 설치하여 삼군부라고 칭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삼군부가 공식적으로 재설치된 것은 비변사가 폐지된 지 3년이 지난 뒤였다.

1868년 영의정김병학은 삼군부가 이미 재설치되었으므로 원임장신(原任將臣) 가운데 대광(大匡)은 영사(領事), 상보국(上輔國)과 보국(輔國)은 판사(判事), 승록(承祿)·승정(承政)은 행지사(行知事), 정헌(正憲)·자헌(資憲)은 지사(知事)로 모두 겸직으로 임명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래서 김좌근은 영삼군부사(領三軍府事), 김병기·김병국·이규철은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 신관호·이경순·신명순은 행지삼군부사(行知三軍府事), 이경하 등은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가 되었다. 그러나 시임대신(時任大臣)들은 삼군부의 구성원에 포함되지 않았다. 삼군부가 의정부와 함께 정1품 아문으로 공식화된 것은 이해 6월이었다.

고종은 1868년 6월 삼군부에 직접 전교를 내렸고, 시임대신들도 삼군부의 구성원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삼군부는 군무를 통솔하고 숙위 문제를 총괄하여 살피는 동시에 변방에 관한 모든 사항까지도 관장하면서 의정부와 대등한 위치를 점했다. 이후 의정부는 정부로, 삼군부는 무부(武府)로 불리게 되었다.

삼군부는 영의정김병학의 제의로 북병사와 동래부사의 인사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당시의 고위 관료들은 삼군부가 이러한 인사권을 갖는 것이 삼군부의 체모(體貌)나 변경 방어에 합당하다는 견해를 보였다. 이후 삼군부는 각 도의 군사 훈련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고, 독자적으로 군영(軍營)을 조절하여 배치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방의 포군(砲軍) 설치와 무기의 배급에 관한 업무도 주관하였다. 뿐만 아니라 영의정김병학은 포도대장의 추천권 행사를 제의하였고, 왕이 신행(辛行)할 경우 삼군부사가 수궁대장을 맡도록 하여 삼군부의 위상을 강화하였다.

삼군부 재설치의 가장 큰 의미는 독자성이 강한 각 군영의 대장들을 삼군부의 유사당상(有司堂上)으로 흡수하여 각 군영 간의 업무 협조와 역할 분담을 적절하게 수행한 데 있었다. 이것은 1871년 신미양요와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때 삼군부가 각 군영을 직접 통솔한 데서 확인된다. 그리고 무관들의 일상적인 인사는 물론이고,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 대장들을 유사당상으로 삼아 삼군부의 업무를 돕도록 하였다. 그 밑에서는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종사관이 삼군부의 종사관을 겸하여 대장들을 보좌하게 하였다.

삼군부 운영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병조 판서를 겸임한 삼군부의 제조였다. 당시 병조 판서는 무관의 인사만을 담당하는 직책이 아니라 각 영의 군제를 관할하는 책임도 있었다. 그래서 영의정 김병학은 병조 판서 책임의 중요성을 들어 임기를 정해야 한다고 제의하였고, 본병의 통할과 전주·재부를 주관하면서 직무와 권한이 삼군부의 운영에 적용되기도 했다.

1871년 좌·우포도대장은 의정부 당상의 예에 의거하여 삼군부의 제조를 겸임하였다. 포도대장이 삼군부의 기밀에 참여하게 한 것은 의정부를 통해 삼군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고종의 의지였다. 이것은 삼군부의 정치적 지위가 하락함을 의미하며, 흥선대원군이 하야할 때까지 삼군부는 일상적인 군무만 처리하였다.

삼군부가 최고의 군령 기관으로 위상을 드러낸 것은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과정에서였다. 그러나 이후 군령을 시급하게 처리할 일들이 생기지 않았고, 급기야 삼군부의 존재는 부각되지 않았다. 1880년 12월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면서 새로운 건물이 필요하게 되자 유명무실한 삼군부의 폐지를 공식화하였다. 그러다가 2년 후인 1882년(고종 19) 6월 고종은 전교를 통해 기무아문을 혁파하고 삼군부를 부활시켰다.

삼군부는 일본인이 울릉도에 들어와 나무를 찍는 일을 금하는 공문을 발송하였다. 또한 고종은 전교를 통해 문관, 예문관, 교서관의 삼관(三館) 관리를 천거하는 삼천(三薦)을 의정부와 삼군부에서 각각 아뢰도록 하여 삼군부의 역할과 위상을 강화했다. 임오군란으로 충주로 피난 간 명성황후가 환궁할 때 삼군부의 당상과 낭청이 행차를 모시고 호위해 오기도 했다.

1882년 형조 좌랑강홍거는 삼군부를 혁파하고 통리아문의 칭호를 다시 설치할 것을 상소하였다. 이해 12월 삼군부와 기무처를 통리군국사무아문에 합부하라는 고종의 전교로 인해 삼군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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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욱, 「대원군 집정기 삼군부 설치와 그 성격」, 『군사』32, 1996.
  • 최병옥, 「고종대의 삼군부 연구」, 『군사』19,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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