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추부(承樞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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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 초에 군사 관련 업무와 왕명 출납을 관장하던 관서.

개설

승추부는 1401년(태종 1) 왕권의 안정화를 위한 제도 개혁 과정에서 만들어진 관서이다. 종래 군사는 의흥삼군부에서, 왕명 출납은 승정원에서 담당하던 것을 통합해 모두 승추부에서 주관하였다. 1405년에 혁파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승추부는 1401년 7월 13일 관제 개정 때 의흥삼군부가 개편된 관서이다. 의흥삼군부는 당시까지 군사와 관련된 일을 관장하던 관서였는데, 승추부로 개편되면서 그 업무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아울러 이때 승정원 역시 폐지되면서 승정원에서 담당하던 왕명 출납의 역할도 승추부로 이관되었다. 이렇게 업무를 통합한 이유는 태종이 즉위한 초반은 정치 상황이 불안정했기 때문에 이를 타개하기 위해 군사권과 왕명 출납을 함께 장악하는 강력한 기구가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조직 및 역할

승추부의 조직은 영사(領事)(『태종실록』 3년 7월 16일)와 판사(判事)를 비롯해 참판(參判)(『태종실록』 2년 3월 7일참지(參知)·첨서(簽書)(『태종실록』 2년 7월 22일제학(提學)(『태종실록』 2년 5월 4일경력(經歷)(『태종실록』 1년 7월 19일)과 진무(鎭撫)(『태종실록』 3년 7월 19일) 등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왕명 출납은 부속기관으로 대언사(代言司)를 설치하고 지신사와 4명의 대언이 담당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년 7월 13일).

승추부는 군사적인 역할로 군인들의 상태를 점검하거나(『태종실록』 1년 11월 24일), 무인의 선발(『태종실록』 2년 4월 15일) 등 군사의 양성이나 선발 등에 대한 업무를 주관하였다(『태종실록』 2년 6월 1일). 그리고 이 과정에서 관련 법률을 제정하기도 하였는데, 1402년 군정성적법(軍丁成籍法)(『태종실록』 2년 8월 1일)을, 1404년에 한량관숙위지법(閑良官宿衛之法)을 제정하기도 하였다(『태종실록』 4년 6월 9일).

변천

승추부는 설치 이후 조정의 핵심인 의정부(議政府)·사평부(司平府)와 함께 삼부(三府)로 불리며, 조정의 핵심 관서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국정 운영을 주도하였다(『태종실록』 1년 12월 5일).

1402년 9월 인사 제도에 대한 정비 과정에서 승추부 관원의 선발은 이조(吏曹)에서 전담하도록 하였고(『태종실록』 2년 9월 8일), 1405년 1월 태종의 육조 중심의 국정운영 도모와 관련된 관제 개편 과정에서 승추부는 그 군사관장 기능을 병조(兵曹)에 귀속하고, 왕명 출납 기능은 대언사를 승정원으로 독립시켜 관장시킴에 따라 혁파되었다(『태종실록』 5년 1월 15일).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