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朴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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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64년(세조 10)~1517(중종 12) = 54세]. 조선 전기 후반 성종·연산군 · 중종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의정부(議政府) 우찬성(右贊成)이다. 자는 열지(說之)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인데, 아버지는 사옹원(司饔院)첨정(僉正)박사동(朴思東)이고, 어머니 창원박씨(昌原朴氏)는 박천군사(博川郡事)박전(朴旃)의 딸이다.

성종 · 연산군 시대의 활동

1483년(성종 14)에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고, 1489년(성종 20)에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가 되었다. 이어 정자·저작(著作)·박사(博士)를 역임하였다. 1495년(연산군 1)에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이 되었다가 홍문관(弘文館)에 선발되어 수찬(修撰)이 되었고, 이조 좌랑(佐郞)으로 전직되어 승문원 교검(校檢)을 겸임하였다. 1497년(연산군 3) 문과 중시(重試)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 해 10월에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이조 정랑(正郞)으로 옮기었다. 1499년(연산군 5)에 사재감(司宰監) 첨정이 되고, 승정원(承政院)교감(校勘), 사헌부 장령(掌令)을 역임하고, 이 해 5월에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으며, 7월에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다. 그 해 11월에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고, 1500년(연산군 6) 6월에 또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가 군기시(軍器寺)부정(副正), 사옹원 정, 봉상시(奉常寺)정(正)을 역임하고, 1501년(연산군 7) 10월에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는데 예문관(藝文館) 응교를 겸임하였다. 1502년(연산군 8) 6월에 다시 홍문관 직제학이 되고, 이 해 8월에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 1503년(연산군 9) 1월에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고 이 해 7월에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으며, 12월에 승정원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5월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제수되고, 이 해 8월에 형조 참판(參判)이 되었다가 10월에 호조 참판이 되었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공조 참판,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를 역임하였다.

중종 시대의 활동

1508년(중종 3) 4월에 이조 참판이 되었다. 1509년(중종 4) 5월에 이조 참판 겸 의금부 동지사가 되었다가 이 해 6월에 공조 판서가 되었다. 이 해 11월에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12월에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1510년(중종 5) 3월에 예조 판서(判書)가 되었고, 7월에 이조 판서가 되었다. 1511년(중종 6) 12월에 공조 판서가 되었으며, 1512년(중종 7) 6월에 형조 판서가 되었다. 1513년(중종 8) 6월에 의정부 우찬성이 되고, 이 해 8월에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1514년(중종 9) 2월에 다시 이조 판서가 되었다. 1515년(중종 10) 윤 4월에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이 되고, 6월에 예조 판서가 되었고, 11월에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으며, 12월에 다시 의정부 좌참찬이 되었다. 1516년(중종 11) 2월에 사헌부 대사헌이 되고, 4월에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이 되었으며, 9월에 다시 이조 판서가 되었다. 그는 이때 세 차례나 이조 판서에 임용되는 것은 전례가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 해 10월에는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이 되었다. 1517년(중종 12) 1월에 중추부 판사(判事)가 되었는데, 이 해 2월 15일 우찬성으로 향년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박열은 젊어서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평생 동안 아버지를 추모하는 마음이 변치 않았으며, 어머니를 더욱더 지극한 효성으로 모셨다. 형제간에 우애하고 벗을 신의로 대하였는가 하면, 다른 사람에 거슬리지 않도록 자신을 근신하여 닦았으니, 단정한 군자(君子)라고 하겠다.

『중종실록(中宗實錄)』중종 12년 2월 15일(신유)조 기록을 보면, “박열은 사람됨이 간솔 민활하고 문장(文章)에 재간이 있어 두 차례나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청탁(淸濁) 간에 처신을 살펴 하여 세 차례나 전조(銓曹)를 맡고 여러 차례 헌부(憲府)의 장이 되었지만 다른 말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현명한 재상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그에 대하여 사신이 논하였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고양군(高揚郡)의 치소(治所) 남쪽 다원리(多院里)에 있고, 신용개(申用漑)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상장군(上將軍)권순(權淳)의 딸인데, 자녀는 1녀를 두었다. 딸은 조성(趙晟)의 처가 되었다. 후사가 없어서 조카 박세정(朴世貞)을 양자로 삼았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 『음애일기(陰崖日記)』
  • 『이요정집(二樂亭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