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각(尹先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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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43년(중종 38)∼1611년(광해군 3) = 69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초명(初名)은 윤선각(尹先覺)이다. 자(字)는 수부(粹夫) 또는 수천(粹天)이고, 호는 은생(恩省) 또는 달촌(達村)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경산 현감(慶山縣監)윤희렴(希廉)이고, 어머니 광주 이씨(廣州李氏)는 충의위(忠義衛)이여경(李餘慶)의 딸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61년(명종 16)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과 진사(進仕)의 양 과(科)에 모두 합격하였고 7년 뒤인 1568년(선조 1) 나이 26세에 증광시(增廣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방목』] 과거에 급제한 이후에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예조 좌랑(佐郞)으로 승진하였다. 1573년(선조 6)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을 거쳐서,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로 전임되었다. 1579년(선조 12)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고, 1583년(선조 16)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를 거쳐서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

1584년(선조 17) 청주 목사(淸州牧使)에 임명된 후 몇 개월 만에 파직되었으나, 돌아와서 장악원(掌樂院)정(正)이 되었다. 이 해에 선조가 3공(三公)에게 하교하여 각기 어진 인재를 추천하도록 했는데, 우의정정유길(鄭惟吉)이 윤국형을 천거하였다.(『선조실록』 선조 17년 11월 1일) 그 후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고, 1586년(선조 19) 홍문관 응교로 승진하였다. 1587년(선조 20)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을 거쳐서,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전임되었고, 다음해 다시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으로 승진되었다가, 좌승지(左承旨)에 임명되었다.[『우복집(愚伏集)』 권17 「자헌대부 공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동지춘추관사 윤공 신도비명(資憲大夫工曹判書兼知義禁府事同知春秋館事尹公神道碑銘)」, 이하 「윤국형 신도비명」으로 약칭]

1589년(선조 22) 4월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좌천되었는데 이 때의 일화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때 3사(三司)가 차자(箚子)를 올려 만류하려 하자, 그가 낭패라 여겨 즉시 떠나 남벌원(南伐院)에 이르렀다. 이때 승정원의 서리[吏] 수십 명이 그의 말머리에서 일제히 절하면서 말하기를, “원컨대 전송하는 술잔을 드리고자 합니다.” 하였다. 윤국형이 “‘너희들이 왜 이러느냐?” 하고 물으니, 말하기를, “승정원으로부터 수령(守令)이 되어 나가는 것은 본 적이 없는 까닭에 마음이 진정 한탄스러워서 굳이 이렇게 합니다.” 하였다. 이 일을 사림(士林)들이 듣고 서로 전하면서 아름다운 일로 삼았다.[『연려실기술』] 임기를 마치고 1591년(선조 24) 충청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우복집』 권17 「윤국형 신도비명」]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충청도 관찰사윤국형은 순찰사(巡察使)를 겸임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병기를 준비하고 성지(城池)를 수축하며 전쟁에 대비하였고, 장병을 지휘하며 방어에 힘썼다. 그러나 왜란이 일어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조령(鳥嶺)을 넘어 호서(湖西)로 바로 가는 길이 왜적에게 뚫렸고, 서울도 이미 함락당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그 해 5월 조정에서는 보덕(輔德)심대(沈岱)를 파견하여 호남과 영남의 근왕병(勤王兵)을 징발하여 와서 구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전라도 관찰사이광(李洸)은 병사들을 이끌고 올라오다가 공주(公州)에 이르러 서울이 벌써 함락되고 왕의 행차가 서쪽으로 갔다는 소문을 듣고 병사들을 철수시켜 본진으로 돌아갔고 충청도 관찰사윤국형도 움직이지 못했다. 원군이 오지 않자 보덕심대가 자신이 남쪽으로 가서 이광에게 명을 전달하겠다고 하니, 선조는 기뻐하면서, “경이 남쪽 군대를 불러온다면 국가를 경과 함께 하겠다.” 하였다. 이때 도로가 끊겨 사람들은 모두 그를 위태롭게 여겼으나 심대는 조강(祖江)을 거쳐 바다를 이용하여 남쪽으로 내려가서 이광 등을 만나 대의(大義)를 들어서 질책하니 이광과 윤국형이 병사들을 합쳐서 북상(北上)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5년 5월 3일) 이때의 상황을 비변사에서는 “충청 감사윤국형(윤선각)의 장계를 보건대, 왕사(王事)를 위해 책려(策勵)하는 뜻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한결같이 완만하기만 합니다. 두 장수만 시켜 병사를 거느려 올려 보내고 감사 자신은 꼼짝도 않고 머물러 있으니 근왕(勤王)의 뜻이 결코 이럴 수가 없습니다. 급히 전진하여 도검찰사(都檢察使) · 도원수 · 도순찰사와 함께 서로 날짜를 기약한 다음 있는 힘을 다하여 수복하도록 하서(下書) 하소서.” 라고 하며 선조에게 건의를 할 정도였다.[『선조실록』 25년 5월 19일] 이처럼 전세가 다급한 상황에 이르자, 1592년(선조 25) 8월 마침내 전라도 관찰사이광, 경상도 관찰사김수(金睟), 충청도 관찰사윤국형 등이 군사 8만을 거느리고 바로 서울로 향하였다.[『기재사초』 하] 그러나 충청도 관찰사윤국형은 전라도 순찰사이광과 함께 참여한 용인(龍仁) 전투에서 패하였고, 이 일로 관직이 삭탈되었다.

1594년(선조 27)에 이르러,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로 다시 서용되었다.[『우복집』 권17 「윤국형 신도비명」] 1595년(선조 28) 병조 참판(參判)이 되었고, 얼마 후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사직하였다. 당시 영의정유성룡(柳成龍)은 윤국형을 아껴서 크고 작은 계책을 반드시 그와 더불어 협의하였는데, 이를 싫어하는 자가 모함하려 하므로, 1596년(선조 29) 여주 목사(驪州牧使)로 자원해서 나갔다. 1598년(선조 31)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었다가, 형조 참판으로 전임되었다. 1598년 명(明)나라 경략(經略)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조선을 무고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유성룡은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명나라에 가지 않는다는 북인(北人)들의 탄핵을 받아 관작을 삭탈당했는데, 윤국형도 유성룡이 몰려날 때 함께 모함당하여 파직되었다. 6년 후인 1605년(선조 38) 다시 장례원 판결사로 서용 되었다.[『우복집』 권17 「윤국형 신도비명」] 1606년(선조 39)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고,[『선조실록』 39년 10월 11일] 1607년(선조 40) 중추부 동지사가 되었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 한성부 좌윤을 거쳐서, 대사성(大司成)이 되었고, 사헌부 대사헌과 형조 참판을 역임하였고, 곧 이어 특지(特旨)로 공조 판서에 임명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같이 관직과 품계를 올려 준 것은 그가 본래 선조 때 명류(名流)였으나, <임진왜란> 당시 충청도 관찰사로서 용인 전투에서 왜군에게 패배한 후, 선조로부터 외면당하면서, 그동안 침체해 있던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1609년(광해군 1) 지사(知事)가 되었고, 우참찬(右參贊)을 거쳐서, 중추부 지사에 임명 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즉위년 2월 29일 · 8월 25일 · 10월 3일 · 11월 9일 ·11월 13일, 광해군 1년 1월 14일 · 7월 3일 · 8월 30일 · 9월 16일]

1610년(광해군 2) 다시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2년 1월 21일] 그런데 그 해 2월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다. 그는 예를 다하여 집상(執喪)하였으며, 궤전(饋奠)은 비록 춥거나 덥더라도 몸소 자신이 행하고, 다른 사람이 대신하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해인 1611년(광해군 3) 맏아들 윤경립(尹敬立)이 죽는 참최(斬衰)의 상을 당하였다. 그 충격으로 그는 여러 달 동안 기(氣)가 꺾이고 몸이 상하더니 갑자기 풍병(風病)이 나서 8월 6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享年) 69세였다.[『우복집』 권17 「윤국형 신도비명」] 저서로 『문소만록(聞韶漫錄)』이 있다. 이 책은 수필집으로 저자의 친지 · 친구에 관한 사적과 일화 및 자신의 벼슬살이할 때의 기록이 대부분이며, 임진왜란에 관한 기술이 많다.[『성호사설』 권15]

성품과 일화

윤국형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우복집』 권17 「윤국형 신도비명」] 그는 풍채와 자질이 빼어났고, 기상과 식견이 점잖고 차분하여 무리에서 뛰어났다. 사람됨이 중후하고 덕량(德量)이 있었으며, 기쁘고 성냄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충신(忠信)으로 일관했고, 근신함으로 몸을 지켰다. 다른 사람들과 말할 때는 호탕하고 명백하여 일호(一毫)의 수식도 없었으며, 남의 착한 점을 보면 칭찬해 마지않았으며, 남의 허물을 들으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정치에 임하거나, 일을 처리하거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 이르러서는 의연하여 그 뜻을 누구도 빼앗을 수 없어, 비록 우부(愚夫)라도 그가 군자(君子)임을 알았고, 질투하는 자라도 끝내 감히 사인(邪人)이라 지목하지 못하였다. 그는 태어나서 보름 만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어머니 얼굴을 모르는 것을 평생의 지극한 아픔으로 여겼다. 다른 사람들이 어머니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목이 메어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계모를 섬김에 그 효성을 다하였고, 나이가 많아지고 지위가 높아져도 자식의 직분을 지키면서 조금도 효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장흥리(長興里) 도봉산(道峯山)에 있고, 정경세(鄭經世)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우복집(愚伏集)』 권17 「자헌대부 공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동지춘추관사 윤공 신도비명(資憲大夫工曹判書兼知義禁府事同知春秋館事尹公神道碑銘)」] 부인 평양 조씨(平壤趙氏)는 경력(經歷)조수(趙琇)의 딸인데, 5남 1녀를 낳았다. 1남 윤경립(尹敬立)은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고, 2남 윤의립(尹義立)은 경주 부윤(慶州府尹)이다. 3남 윤정립(尹貞立)은 풍덕 군수(豐德郡守)를 지냈다. 4남 윤예립(尹禮立)과 5남 윤덕립(尹德立)은 요절하였다. 1녀는 관찰사권분(權肦)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계갑일록(癸甲日錄)』
  • 『계미기사(癸未記事)』
  • 『문소만록(聞韶漫錄)』
  • 『갑진만필(甲辰漫筆)』
  • 『우복집(愚伏集)』
  • 『고봉집(高峯集)』
  • 『기재사초(寄齋史草)』
  • 『난중잡록(亂中雜錄)』
  • 『동계집(桐溪集)』
  • 『서애집(西厓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암집(燕巖集)』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학봉전집(鶴峯全集)』
  • 『혼정편록(混定編錄)』
  • 『옥계집(玉溪集)』
  • 『송강집(松江集)』
  • 『동강집(東岡集)』
  • 『사류재집(四留齋集)』
  • 『중봉집(重峰集)』
  •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 『지헌집(芝軒集)』
  • 『만회집(晩悔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고산유고(孤山遺稿)』
  • 『병계집(屛溪集)』
  • 『귀록집(歸鹿集)』
  • 『이재유고(頤齋遺藁)』
  • 『강재집(剛齋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연천집(淵泉集)』
  • 『화서집(華西集)』
  • 『모당집(慕堂集)』
  • 『가휴집(可畦集)』
  • 『문월당집(問月堂集)』
  • 『운와집(芸窩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백사집(白沙集)』
  • 『부계기문(涪溪記聞)』
  • 『상촌집(象村集)』
  • 『성호사설(星湖僿說)』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자해필담(紫海筆談)』
  • 『잠곡유고(潛谷遺稿)』
  • 『해동역사(海東繹史)』
  • 『월정집(月汀集)』
  • 『오산집(五山集)』
  • 『백사집(白沙集)』
  • 『장암집(丈巖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문월당집(問月堂集)』
  • 『일봉집(一峯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