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구(宋英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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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6년(명종11)∼1620년(광해군12) = 65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자는 인수(仁叟)이고, 호는 표옹(瓢翁) · 일호(一瓠) · 백련거사(白蓮居士)이다. 본관은 진천(鎭川)이고, 주거지는 전라도 전주(全州)이다. 아버지는 송령(宋翎)이고, 어머니 진주하씨(晉州河氏)는 사온서(司醞署)영(令)하세준(河世濬)의 딸이다. 우계(牛溪)성혼(成渾)의 문인이며 백사(白沙)이항복(李恒福) · 추포(秋浦)황신(黃愼) · 월사(月沙)이정귀(李廷龜)와 교류하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84년(선조17) 친시(親試)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注書)에 보임되었는데, 그때 고모부 유근(柳根)이 이조 좌랑에 재임하여, 친혐(親嫌) 관계 때문에 문관직으로 나가지 못하고 무관직으로 나가서 사과(司果)를 4년 동안 지냈다. 1587년(선조20)에 부친상을 당하고 얼마 뒤에 모친상과 조모상을 연달아 당하여, 전후로 6년 동안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전주에서 지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된 송강(松江)정철(鄭澈)이 송영구(宋英耈)를 불러 종사관(從事官)을 삼았다. 송영구는 충청도 · 전라도에서 의병 1천여 명을 모집하여 행재소(行在所)로 가던 도중에, 세자시강원 사서(司書)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의병을 막료(幕僚)에게 부탁하고 단기(單騎)로써 왜적의 소굴을 뚫고 달려가서 간신히 세자의 행조(行朝)에 이르렀다. 1593년(선조26)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는데,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중국 북경(北京)에 다녀온 다음 고향 전주로 돌아갔다. 지평, 헌납(獻納)에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99년(선조32)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 겸 장주사(掌舟師)에 임명되었고, 1600년(선조33)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어 홍문관에 들어갔다. 이어 이조 좌랑에 발탁되어 이듬해 이조 정랑으로 승진하였으며, 의정부의 검상(檢詳) · 사인(舍人)을 거쳐, 사간원 사간(司諫)으로 임명되었다. 선조 앞에서 이항복을 칭찬하는 실언(失言)을 한 것 때문에 청풍군수(淸風郡守) ·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 이 일로 이항복도 영의정을 사직하였다. 1607년(선조40)에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승진하였으나, 정인홍(鄭仁弘)의 일당과 반목하다가 끝내 파직당하였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10년(광해군2) 시강원 필선(弼善)에 임명되어, 사간원 사간을 거쳐 시강원 보덕(輔德)으로 전임되었다.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어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올랐다가, 형조 참의 · 병조 참지에 임명되었고, 이윽고 대사간(大司諫)으로 승진하였다. 1611년(광해군3)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1613년(광해군5) 성절사(聖節使)로 임명되어 중국 북경에 갔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우리나라가 일본과 교통한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가 황제에게 양국 관계를 분석하는 글을 올려 명확하고 간곡하게 변명하니, 명나라에서 의심을 풀었다. 돌아와서 복명(復命)하니, 광해군이 그 노고를 치하하여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추부 동지사에 임명하였다. 1616년(광해군8)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1617년(광해군9)에 광해군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를 논하도록 하였고, 1618년(광해군10) 인목대비의 존호(尊號)를 폐지하고 서궁(西宮)이라 부르도록 하려는 정청(庭請)을 열었다. 송영구는 이 정청에 불참하여, 정창연(鄭昌衍) · 유근 · 이정귀 · 윤방(尹昉) · 김상용(金尙容) · 이시언(李時彦) · 오윤겸(吳允謙) 등과 함께 ‘팔간(八奸)’이라고 배척당하였다. 또 조정에서 폐모(廢母)의 논의가 일어나자, 송영구는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며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에 대간(臺諫)에서 합사(合辭)하여 귀양보낼 것을 청하여 파직되었다. 송영구는 울분한 마음을 삭히지 못하고 병이 들어 3년을 지내다가 1620년(광해군12) 서울의 우사(寓舍)에서 죽으니, 나이가 65세였다. 그가 죽기 4일 전에 전주 고향집에서 부인 윤씨가 죽었으므로, 부부를 함께 합장(合葬)하였다.

성품과 일화

송영구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풍채가 단아하고 언행이 바르며 성격이 강직하였으나, 남의 잘못은 너그럽게 용서해주어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산업(産業)을 일삼지 않아 처자들이 항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렸으나 그는 언제나 태연자약하였다. 성품이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궁색한 사람이 있으면 주머니를 털어 주었고, 자립(自立)하지 못할 친족(親族)에게는 숙식(宿食)을 제공하였다.

묘소와 추모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묘소는 전주 북쪽 선영(先塋)에 있는데, 절친한 친구 월사이정귀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월사집(月沙集)』 권43) 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종부시(宗簿寺)정(正)윤승경(尹承慶)의 딸인데, 자식이 없어서 송흥시(宋興詩)를 양자로 삼았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뒤에 예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전주의 서산사우(西山祠宇)에 제향되었다.

행적, 관력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월사집(月沙集)』
  • 『백사집(白沙集)』
  • 『백호전서(白湖全書)』
  • 『사계전서(沙溪全書)』
  • 『상촌집(象村集)』
  • 『성호사설(星湖僿說)』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아계유고(鵝溪遺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계집(牛溪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